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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듯이

엘리야1 2017. 12. 12. 23:16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듯이  


이 글은 스위스의 기독교사이트인 www.livenet.ch에 실린 글을 가져와 번역한 것입니다.

행동의 변화는 자신의 의지에만 달린 것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에 관해 만드는 상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Walter Gasser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리 뜻이 좋아도 자신감을 얻을 수 없다. 그에게는 치유하는 능력이 있는 성경의 인간상으로부터 자신의 가치를 퍼 올리는 것이 필요하다. 즉 하나님의 눈으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의 행동은 주로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서 갖고 있는 상을 통해 결정된다. 자신을 재능이 없고 약하며 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그에 상응하게 행동한다. 자신을 다른 보든 사람들 보다 뛰어나다고 느끼는 사람은 또 이를 표현한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는 성경과 예언서를 통해 알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에 관한 계시일뿐 아니라 인간이 누구인가에 대한, 하나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보시는가에 대한 계시이기도 하다.

다섯 가지 치유적인 인간상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나는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우리는 누구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피조물이라는 인식이 우리의 자아상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 다른 것들은 아주 나중에 따라온다.

"나는 당신의 피조물입니다!" 우리에게 이것은 교리적인 문장인가 아니면 삶의 기쁨인가? 이것은 철학자이며 신학자인 Romano Guardini의 다음과 같은 말을 우리가 날마다 고백할 때 삶의 기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끊임없이 저는 당신의 손으로부터 제 자신을 맞이합니다. 이것이 나의 진리이며 나의 기쁨입니다." 80세의 남자는 매일매일 자신의 신체를 생각하며 느낄 수 있는 모든 지체와 기관들을 느끼며 이에 대해 창조주에게 감사했다. 시편 139편 13,14절을 거울 앞에서 힘찬 목소리로 외우는 것은 이러한 삶의 기쁨을 훈련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나는 영화와 존귀의 관을 쓰고 있다
우리가 가치있다는 느낌은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로부터 얻는다. 그러나 성경은 다르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당신을 다르게 보신다. 모든 사람들은, 당신 또한 하나님의 눈에는 값으로 치를 수 없는, 더할 수 없는 가치를 갖고 있다."

우리가 능력과 실패를 기준으로 우리 스스로에 관하여 형성하는 모든 거짓형상들과 절교하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 자신을 위한 절교기도를 만들어서 일정 기간 매일 큰 소리로 기도할 것을 권한다. 예를 들면 "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들고 언제 어디에서나 환영받는 멋진 타입의 이상형과 절교한다-그리고 내가 성공을 하든 실패를 하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영화와 존귀를 인정한다."
   
하나님은 나를 기뻐하신다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사62:5)." 이사야는 한탄스럽게 기대를 저버렸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말했다. 모든 신부는 신랑을 화나게 하는 본질적 특성들을 갖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그릇된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말씀하신다. "너는 나의 기쁨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깊이 확신하는 사람은 더 친절한 사람이 될 것이다.

이에 관한 훈련방법 중 하나는 예수님의 세례에 관한 이야기를 묵상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요단강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이뻐하노라(눅3;22)"라는 목소리를 들으신다. 예수님은 인간이 되셨고 따라서 이 약속 '너는 나의 온전한 기쁨'은 우리에게도 해당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겐 오직 하나의 사랑만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 예수를 사랑하시듯 나를 사랑하신다"(Eckehart)

나는 유한한 존재이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면 없어지나니 그 곳이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시103:13-16)."

오늘날의 인간은 이 사실을 외면한다. 우리는 영원히 젊고 건강하려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현실적인 사람들이 될 수 있으며 하나님이 보시듯이 자신을 유한한 피조물로 볼 수 있다. 기독교 전통에서는 이를 소위 말하는 죽음에 대한 명상 속에서 훈련하였다. 인생 가운데에는 내게 올 죽음을 의식적으로 대면하게 되는 단계가 있다. Friso Melzer는 이에 관해 그의 절판된 책 "집중, 명상, 관상"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

나는 까닭 없이도 악할 수 있는 인간이다
다섯 번 째에서야 우리는 우리의 어두운 면을 대할 수 있다. '나는 죄인이다'라는 상이 첫 번 째에 온다면 파괴적인 영향을 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두움으로부터의 구원을 보이시면서 우리 자신의 어두움을 나타내신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우리를 회개로 인도한다(롬2:4).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그에게 그물을 가득 에울만큼 고기를 잡게 하심으로 엄청난 직업적 성공을 이루게 하신 다음 첫 번째 단계의 자기인식을 할 수 있었다.

이 상황에서 전혀 뜻밖에 그는 외친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5:1-11)." 벌("나를 떠나소서")에 대한 청원을 들어주시는 대신 예수님은 위대한 부르심으로(10절) 그에게 경의를 표하신다. 그 다음 단계는 베드로가 자신에 관하여 가졌었던 높은 이상이 실패하는 가운데 경험하였다.(눅22:61-62). 그는 예수님의 사랑스러운 눈길 아래에서 자신을 똑바로 볼 수 있었다. 골고다의 십자가는 우리 인간의 마음과 하나님의 구속, 두 가지를 계시하고 있다.


자료/ⓒ창골산 봉서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