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주를 향한 마음만 있다면
우리에게 주를 향한 마음만 있다면
글쓴이/봉민근
우리를 향한 주님의 기도가 얼마나 간절하고 뜨거웠는지를 기도하시는 모습을 통하여 알 수가 있다.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무릎을 꿇으시고 고개를 무릎과 무릎 사이에 넣으시고 기도하셨다.
나는 무릎과 무릎 사이에 고개를 넣고 기도해 보려고 해도 머리가 그처럼 굽혀지지가 않는다.
내가 아는 친족 중에 한 사람이 병원에서 수년 동안 오랜 시간 투병하면서 몸무게가 얼마나 빠졌는지
그야말로 뼈만 보일 정도였는데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 기도하니 그런 모습이었다.
그 모습은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에 나를 위해 얼마나 고생하시고 몸이 말랐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납작 엎드린 모습으로 기도하시던 주님의 그 간절한 기도를 생각하니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나는 주를 위하여 그토록 간절한 기도를 평생 동안 거의 해 본 기억이 없는 것 같다.
평생을 우리를 생각하시고 죽기까지 헌신하시며 고생하신 것이 주님의 삶의 연속이었다.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산다고 하지만
주님이 우리를 생각하는 것에 비하면 우리의 헌신은 턱없이 부족하고 모자랄 뿐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시는 것 천만분의 일만 생각할 줄 안다면
우리는 그 누구나 순교자적 삶을 살 수가 있는 능력의 성도가 되었을 것이다.
어느 글에 보니 이런 내용이 있었다.
"은혜를 베풀기만 하시는 건 언제나 하나님뿐이시다.
베푸는 중에도 우리는 하나님께 계속 받기를 바라고만 있다"
주를 위하여 산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 하는 방향의 문제다.
마음만 있다면 우리는 주를 위하여 무슨 일이든 할 수가 있다.
감옥 속에 있다고 못 할 것이 없다.
바울은 감옥 속에서도 전도하며 찬송하고 기도하며 예배하였다.
코로나로 인하여 교회에 가지 못한다고 예배 못 드린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마음만 있다면 혼자서도 얼마든지 예배드릴 수 있고 남을 섬기며 살 수도 있으며
주를 위하여 목숨도 내놓을 수도 있다.
문제는 우리에게 그런 마음 없다는 것이다.
받을 줄만 알았지 주를 위하여 드릴 줄도 모르고 주를 향한 간절함이 없으니
자연스럽게 몸도 마음도 떠나 있는 것이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고 하였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왜 이런 것일까?
주님을 보물처럼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 믿음 없는 우리의 심령이 주를 떠나 병약한 존재가 된 탓이다.
☆자료/ⓒ창골산 봉서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