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김순이 간증(2)**

2005. 3. 16. 14:54카테고리 없음

김순이 간증(2)


형언하기 어려운 가시밭길

어쨌든 그 후로 자라면서 끝없이 계속되는 아버지의 명령 성경 읽어라, 기도해라,

찬송하라, 행실을 절제하라는 그 모든 말씀에 어린 나는 지쳐 있었고 언제나 남을 돕고

살면서도 예수쟁이, 예수쟁이하며 사람들에게 따돌림 받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상급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나는 가능한 교회 가는 것을 피했고 예배보다 저 재미있는 일,

성경보다 더 재미있는 책 들이 세상에는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그후 나의 신앙관이 어떠했는지는 자명한 현실이다.

부모를 떠나 학교 생활을 하며 하나님과는 점점 멀어진 삶을 살다 학교를 마칠 무렵엔

나는 한 남자를 만났는데 그 사람은 부모님의 허락을 결코 받을 수 없는 불신자였고

의대를 졸업한 군의관 이었다. 어머니의 한은 골수에 사무쳤었다.

3대 독자 아버지께 아들을 낳아 드리지 못해 죄의식 속에서 사신 분으로 둘뿐인 딸

가운데 언니는 이미 결혼했고 모든 희망은 오직 내게 걸고 있었다.

예수 잘 믿는 참한 청년 한 명 을 데릴사위 삼아 아들 없는 한을 풀어 보려고 온갖 희망을

다 걸고 이미 사람까지 골라놓은 상태인데 이게 웬 배신인가!

그러나 나는 그 명령에 굴복 할 수가 없었고 그 사람은 나 없이도 죽고 말겠다는 판이었다.

나는 그 사람 의 임지인 광주 77육군 병원이 있는 곳으로 따라가서 내 마음,

내 계획대로 우리만의 삶을 시작했다.


얼마 후 그 사람은 의무관으로 월남에 파병되었고 '68년 2월, 하얀 눈으로 세상이 온통

뒤덮인 날 아이가 세상에 태어났다. 그후 일주일 뒤 나는 그 사람의 전사 통보를 받았다.

그는 내게 한 모든 보랏빛 약속들을 어긴 채 죽음 이란 형태로 나를 배신했다.

그 후의 나의 삶을 어떻게 쓰고 어떤 말로 형용 할 수 있겠는가.

"사람이 자기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길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라"

는 것을 그때 내가 깨달았더라면, 그리고 인간을 향한 절제 없는 사랑은 다스림을받아야 한다는 경고와 절제된 사랑을 요구하시 는 하나님의 뜻을 그때 내가 깨달았더라면 그런 고통과 견딜 수 없는 좌절 속에 나를 방치하진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 어린것을 끌어안고 삶을 헤쳐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 후 나는 부산으로 가서

모 신문사에 취직을 했으나 두 생명 이 살아가기엔 역부족이었다.

몇 년 후 나는 어찌어찌 몇 십만 원을 마련하여 조그만 일식 우동집을 시작했는데

놀랍게도 30세란 나이에 부산에서 몇째 안되는 일식집주인이 되었고 그 곳의 이름난

정계 인사들은 거의 우리 집의 단골이 되었다. 아이는 건강하고 착했으며 공부도 잘했다.


세월은 그 숱한 상처를 아물게 했고 하나님을 향한 원망도 조금씩 풀려 집 에도 연락을

했으며 꿈에도 그리운 아버지를 모셔와 함께 지내기도 하였다.


그때 어머님은 위암으로 돌아가셨다. 내 생애에 가장 큰 상처가 있다면 그것 은

다시 뵙지 못한 채 어머니가 돌아가신 일이다. 그런 세월 속에서도 주님은 나를 잊지

않으셨고 나의 교만을 눈감아 주지 않으셨다. 나를 향한 사랑의 채찍 또한 놓지 않으셨다.

그때 부산에 아파트 가 한 군데 세워졌는데 주로 판검사, 부자들만 그 곳에 살았다.

나는 웃돈을 얼마 더 주고 아파트를 사서 그 곳에 살면서 좋은 차에 기사에 가정교사에
식모에 외제가 아니면 입지 않고 먹지 않고 바르지도 않고, 로렉스 시계, 1 캐럿이 넘는

다이아반지, 밍크 코트를 걸쳤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기 가 차고 불쌍한 짓만 하였던가. 그런 어느 날 평소 잘 아는 사람이 찾아와 집장사를 하자며 남의 땅에 내가 돈을 대서 연립주택을 지어 이익금을 분배하자는 것이었다.

그 당시 나는 전 재산을 털어 작은 평수의 주택 다섯 동을 지었다.

그들은 그 집을 분양하고 등기를 설정하고 다 빼돌린 후 도망을 쳤고

나는 빈털털이가 되었다. 그러나 거듭되는 시련과 역경 가운데서 주님은 내 생명에는

손을 대지 않 으셨다. 아무리 자살을 결행해도 나는 성공할 수가 없었다.

그 뒤 서울로 옮겨간 나의 삶은 성공과 실패를 거듭했고 교회는 주일에 한번 습관적으로

나 가다 말다, 돈에 여유가 생기면 헌금이나 듬뿍 내고 그걸로 다된 줄 아는 여전히

하나님의 뜻에는 무관심하게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거울 속에 비추인

나의 모습을 40올 넘긴 볼품없는 중년의 여인이 되어 있었고 가슴 치는 회한과

오열이 치밀며 내 마음은 오직 하늘밖에 바라볼 곳이 없었다.

거리엔 가을 바람이 자살하라고 유혹하고 내가슴엔 스산한 빙하의 바람이 불어 미친 듯

거리로 뛰쳐나가 무작정 거리를 헤매는데 신호를 받고 내 앞에 정지해 있는 버스 한 대가 보였다.

행선지가 '오산리 기도원'이라고 쓰여 있었다. 거의 무의식중에 차 앞으로 달려가 문을

두드리니 기사 아저씨가 당황해서 짜증 섞인 표정을 하면서도 문을 열어 주었다.

나는 반 무의식 상태에서 그 버스를 탔으며 그 기도원에 처음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그 많은 사람의 무리, 그 많은 절망과 고통, 병과 사업의 실패로 인한 어찌 보면

버림받은 모든 쓰레기들을 다 거기에 모아놓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은 오직 한가지

방법,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의 절규하며 기도하는

모습들을 보며 마치 전기에라도 감전된 듯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않았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그 찬송 한 구절이 생각나며 밤낮 사흘을 먹는 것, 마시는 것 다 잊은 채 내 몸에 있는

수분이 다 빠져나가듯이 울고 또 울었다. 나의 죄악만이 모두 눈 앞에 보이는 것이었다.

습관처럼 하나님께 대들 듯하던 기도 "하나님, 내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기도하는 자의

자식은 망하는 법이 없다더니 말짱 거짓말 아닙니까? 제 아버지 김 장로님,

어떤 일생을 사셨습니까? 왜 내게 이렇게 하십니까?" 하며 하나님께 따지고

떼를 쓰던 일이 생각나서 자신이 너무 부끄럽고 한심스러워 울며 회개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이 죄인이 영원히 죄악의 길로 가도록 버려 두지 않으셨다.

나 하는 꼴을 묵묵히 보시다가 더는 안도겠다는 선까지 가면 나를 때리셨는데

나는 그 분의 그런 사랑의 매를 깨닫지를 못했다. 나는 그 곳에 쓰러져 죽기로 작정하고

"주여, 이 죄인이 나갈 길을 인도하소서"

하며 그렇게 그곳에서 기도하던 중에 문득 제주도가 생각났다.

그 곳엔 옛날에 돈이 있을 때 복덕방 주인의 말을 듣고 사두었던 땅이 조금 있었다.

'그래, 그 곳으로 가자.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가서 무엇이든 하며 조용히 남은

생을 마 감하자.' 그렇게 생각을 하고 나니 왠지 마음이 편해졌다.


그 얼마 후 나는 제주도로 내려왔다. '88년 11월이었다. 거의 기대하지 않았던

그곳의 땅은 생각 외로 큰돈이 되어 있었다. 그 땅을 판 돈을 잘 처신 하느라고 애쓰는데

어떤 사람의 말을 듣고 잠깐 동안이란 조건하에 어음 한장 바꾸어 준 것이 다시 내게 실망을 안겨 주게 됐다. 다행히 전액을 다 바꾸어 준 것이 아니었으므로 남은 돈으로 조그만

장사를 하며 지금의 제주 순복음 교회에 나가며 하루하루를 안정 속에서 살게 되었다.

비록 지난날의 잔재들이 나를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할지언정 기도로 그런 것을 견디며

살 아가고 있을 때 우연한 기회에 나는 지금의 남편인 김 집사를 만나게 되었다.

우리는 학창시절의 친구였다. 그때 그 분은 이미 가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이혼을 한 뒤

어머님과 아이 셋과 함께 살며 제주의 그 업계에선 선두에 서 사업을 하며 살고 있었다.

우 리 교회 어떤 집사님의 표현대로 우리는 서로 멀고도 험한 길을 돌아 이 곳 에서

서로가 지치고 상처진 마음으로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그 사람을 몇번 만나 대화를

나누면서 거친 폭풍을 헤쳐 항해를 끝내고 드디어 항구에 닻을 내린 안도감 같은 것이

나를 조용히 감싸는 것을 느꼈다. 선량한 눈빛, 조용한 음성, 늘씬한 키 시간이 흐를수록

서로에게 신뢰와 연민을 느끼면서도 나는 쉽게 내 마음을 열 수 없었다.

나의 지나온 세월이 너무나 내 영혼을 삭막하게 했으며 내 마음 어느 곳에도

다른 사람의 안식처를 제공할 여유가 없이 지쳐 있었기 때문이다.

난 지금도 무더운 여름날에도 갑작스런 한기를 느껴 두터운 이불을 내려 가슴까지

꼭 꼭 눌러 덥고 잠잘 때가 있다. 지난 날 돌보는 이 없이 지내온 그 외로움이 내 가슴에

얼음덩이처럼 깊이 박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시간이 흐르자 그 사람은 내게 결혼을 요구했다. 나는 두려워서 뒷걸음을 쳤다.

나에게 장성한 아들이 있었고 그에겐 중 3 딸 둘에, 중 1 아들이 하나 있었다.

사춘기에 접어둔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의 아이들을 잘 키워 줄 자신 이 없었고

또 내 성격상 문제가 있었다. 50이 다되어 머지않아 할머니가 될 나이임에도 정신적인

미숙아인 양 봄이 오면 만개한 꽃들의 현란함 때문에 오히려 슬퍼지고,

가을엔 옷을 벗는 나무와 억새풀의 일렁임을 보면 목놓아 울고 싶고 가슴 깊은 곳에서

이름 모를 슬픔들이 울컥울컥 치솟아 오른다.


이처럼 철없고 변덕에 가까운 나의 감성을 그는 조용한 미소로 다 받아 주었다.

바닷가에 앉아 작열하던 여름 해가 마지막 숨을 죽이는 일몰의 장관을 내 손을 꼭 잡고

말없이 바라보던 그런 그분의 자상함이 내 마음을 자꾸만 약하게 만들었다.

어느 날 그는 정색을 하며 다시 청혼을 했고 "큰 돈 가진 것은 없으나 당신의 마음

하나만은 편하게 해 주겠소"하는 약속에 나는 스스로 둘러쌓아 놓은 방어 벽을

허물게 되었다. 얼마 후 양가에 허락을 받고 우리는 일단 합해서 살림을 시작했다.

그때 그 문제를 놓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 마음이 평안했으므로 주님이

허락하신 일이라 믿고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인내, 연단 그리고 소망"(베드로서원)

청량고등학교 교사(등대교회 협동교사) 한 태 완/홈에서

출처 : 여호와는나와함께
글쓴이 : 이관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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