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김순이 간증(3)

2005. 3. 16. 14:55카테고리 없음

김순이 간증(3)


다정 다감하던 그이의 방탕

그런데 그때부터 진짜 고난은 시작되었는데 합하여 살기 시작한 지 얼마 안되어

그 이에겐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던 나쁜 습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아이들 세 명은

하나같이 특이한 성격의 문제를 안고 있었다.

서로가 전혀 다른 환경에서 교육을 받고 성장하고 나름대로 인격이 형성된 아이들의

교육이나 융화의 문제도 난감한데 그 분의 매일 계속되는 폭주와 무절제한 언어와

그 밖의 모든 것은 내겐 너무나 커다란 충격이 되었다. 이제야 내 영육이 쉴 곳을

찾았다고 안도의 숨을 쉬기가 바쁘게 더 깊고 더 아픈 고통으로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 되어 나를 덮은 것이다.


결혼을 하면 함께 교회에 나가자던 약속은 기억도 못했고 교회만 가자면 웃기는 소리 말라며

"차라리 내 주먹이나 믿지, 예수 믿는 것들 다 사기꾼이고 이기적이야!

나만큼만 선하게 살라지! 예수는 무슨 놈의 예수!"라고 했다.

술은 양주를 두 병 정도 마셔야 마신 느낌이 든다고 했고 담배는 하루에 세 갑을 태웠다.

술값이 한 달에 4, 5백 만원, 때로는 그보다 훨씬 많은 금 액이 교제 술값으로 지출되었다.

조금만 이유를 들어 따지거나 말대꾸를 하면 이루 형용할 수 없는 폭언이 터져 나왔고

그 다음엔 살림살이를 깡그리 때려부수고 이불이고 닥치는 대로

칼과 가위로 다 찢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면 벌벌 떨며 맨발로 도망쳐 나가 거리에

우두커니 서 있노라면 순간적으로 생각나는 것이 거리를 쏘다니는 미친 여인의 모습이다.

그 위로 내 모습 이 클로즈 업 되며 갑자기 히죽히죽 웃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런 경우 미치 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여겨졌다.
남편은 얼마 전까지 내게 보여주던 그 자상함과 양보와 사랑은 흔적도 없고

세상의 못된 짓은 다하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에 읽은 지킬박사와 하이드 씨라는 책이 생각날 정도였다.

12시전에 집에 들어오는 것이 한 달에 잘하 면 2,3일,

대개는 1시나 3시가 넘어서 들어오는 것이다.

그러고도 술이 깨면 멀쩡하게 가게에 나가고 남 보기엔 더 없이 점잖은 양반이 되어버린다.

나는 아연실색해서 배신감에 치를 떨었고 나에게 이럴 수가 있나 싶어 다툼은 끝이 없었고

눈물마저 흘릴 여유가 없어 가슴이 다 타버릴 지경이었다.

새벽 2,3시경이면 여자의 전화가 걸려 오기 일쑤였다.

끊으면 또 오고 욕설하고 나중엔 노래까지 한 곡 불러댄다.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 앉으나 서나....." 술취한 그 여자의 음성과 곁에서

코를 골며 자고 있는 그 사람을 쳐다보며 이것이 끔직한 꿈을 꾸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며 머리를 흔들어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꿈도 환상도 아닌 엄연한 현실이었다.

이런 사람을 사랑 한다고 전화로 하소연하는 그런 여자나 내가 무엇이 다를까.

어찌 보면 내가 더 어리석은 바보였다.

어찌 그 모든 일들을 이 제한된 공간에 다 쓸 수 있으며 설명할 수 있겠는가.


날이 갈수록 내 마음엔 증오가 쌓이고 하루 빨리 이곳을 떠나야지 생각하니 아이들도

시어머니도 다 싫고 나 자신은 더 저주스러워졌다.

아버지는 4 년 전에 93세로 돌아가셨고 혈육은 언니뿐이었는데 언니에게

그 사람과 결혼하겠다며 그 이의 조건들을 말할 때 언니의 두 눈엔 눈물이 고였는데

"그 좋은 자리 다 마다하더니...."하며 아쉬워하며 억지로 평안한 척하며 "

부디 잘살아라 남의 자식 키우는 게 쉬운 줄 아니? 그게 바로 십자가라더라.

참고 참고 또 참아라"했다.

시집가서 친정 부모 모시느라 남편 앞에서 기 한 번못 펴고 살아온 언니에게 이 사람과

헤어지겠다고 말하면 착한 형부가 언지 의 가슴에 또 못질을 하겠구나 생각하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형편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사람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하게 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별 반응이 없더니 내 생각이 굳어진 것을 알고는 정말 정신 차려서 다시

한번 시작해서 잘살아 보자고 다짐하며 서둘러 결혼식 날짜를 잡고 양가에 알리는 것이었다.

하도 달라지니까 나는 다시 한번 속는 셈치고 마음을 바꾸었다.

해가 바뀌는 연말에는 선물 대신 나의 소원이라는 간청에 송구영신 예배 에도 따라와

주었고 부흥회 때나 총동원 주일 같은 날에는 몇 차례 교회에 발을 디뎠다.

그러나 그가 상대하는 사람들이 전부 건설업 계통 사람들이니 만나면 술과 여자로

연결이 되었다. 사업, 사업, 오직 사업상이라는 명목으로.

결혼식 날짜를 불과 15일 정도 남겨놓은 어느 날 나는 막내 아이 고등 학교 입학 추첨

관계로 철야기도를 하러 갔다.

그는 교회 앞에까지 친절하게 태워다 주며 물었다.
"지금 10시인데 내일 몇 시까지 올거야?"
"내일 아침 6시경이에요."
"그래? 그럼 수고해!"
그리고는 돌아서는 그이에게 "일찍 들어가 주무세요"라고 말하고 지하 성전에 가서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마음이 초조하고 기도가 이뤄지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을 안고 새벽 1시 30분 경에 택시를 타고 집으로 오는데 지벵 거의 다 와서

그 이가 다른 여자와 기분 좋게 한 잔하고 길을 활보하고 있 는 것을 보았다.

온몸의 피가 다 빠져 나간 듯 너무 떨려서 집에 어떻게 들어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음날로 나는 서울로 떠났고 죽어도 살아선 다시 그이를 보지 않으리라 결심을 했다.

자기 자식 좋은 학교 가라고 철야 기도하고 있는 사이에 다른 여자와 어울리는 것을

보았을 때의 그 배신감과 서러움은 하나님이 아실 것이라고 믿는다.

서울에 있는 조카 딸 아이 집에 머물러 있는데 조카는 완전 히 혼이 나간 사람처럼

멍청해진 나를 보고 혹시 정신이 이상해 진 것이 아닌가 해서

"이모 이것 좀 먹어 봐. 이모 바람 좀 쏘이러 가자"했다.

그래도 별반 나아지는 것이 없자 시골에 있는 엄마(나의 언니)에게 연락을 했다.

그 사람이 시골 언니를 얼마나 설득했는지 사흘 뒤 그 사람과 언니가 나를 찾아왔다.

그이는 사흘간 실랑이를 벌이며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테니 내려가 자고 사정을 했지만

나는 분명히 말했다. "나는 죽어도 당신과는 살 수 없어요. 거지라도 좋으니 함께 날품을

팔며 살더라도 주일에 함께 교회에 가며 살 수 있는 사람과 살고 싶어요."

그는 나더러 세례도 받고 교회에 다니겠다고 각서를 쓰며 맹세를 했다.

그 순간 문득 내 머리엔 "한 사람의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말씀이 뇌리를 스쳤고

몰래 눈물을 흘리던 언니도 "참아라, 한번만 더 속아서 살아봐라"하는 것이었다.

언니는 "결혼식 날짜가 7일 밖에 안 남아 시골 사람들이다 제주도 간다고 야단인데

나는 창피해서 못산 다. 네가 참아라"하는 것이었다.
나는 결국 다시 제주도로 내려왔고 목사님께 모든 사연을 다 말씀 드리고

약식으로 세례를 받고 호텔에서 모 저명 인사의 주례로 올리려던 결혼식을
내 뜻대로 목사님 주례로 조촐하게 치뤘다.

여행을 다녀온 후 주일 만큼은 교회에 꼭 나가고 겉으로 보기엔 평온한 나날이 이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술과 담배를 하고 세상 사람들과 어울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교회의 담임 목사님(표순호 목사님)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점이다.

항상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그 분은 목사가 되려고 태어난 분이야.

목사 중의 최고 목사야"였는데 그 때문에 목사님은 우리 부부가 충돌할 때마다

훌륭한 해결사 역할을 하셨다.

그런데 남편이 교회를 다니니까 이젠 다른 형태의 고통이 나를 괴롭혔다.

말끝마다 조금만 내가 잘못을 하거나 말대꾸를 하면 설교 중에 들은, 자기에게 유리한

말은 다 나열했다. "남편을 하나님처럼 모셔라, 순종하라, 지아비는 아녀자의

면류관이다."라며 잘도 기억한다. 조그만 일에도 화를 불같 이 내고

"다시는 교회에 안 간다. 너도 다시는 교회에 가지 마라. 가면 죽이 겠다"하고 말씀을

인용하여 교묘하게 괴롭히는 그것을 교활하고 더러운 마귀의 술책인 것을 그때까지도

눈치를 채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내가 둔했고 말씀에 서지 못했으며

마귀의 술책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었다.


인내, 연단 그리고 소망(베드로서원)
청량고등학교 교사 (등대교회 협동목사)한 태 완 홈-제공

출처 : 여호와는나와함께
글쓴이 : 이관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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