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3. 22. 17:31ㆍ좋은 글, 이야기
세상의 소금으로 살 수밖에 없는 이유
마태복음 5장 13에 너희는 세상에 소금이라고 한 말씀대로 이 땅에서 소금으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일까? 소금의 특성을 갖고 살아가는 것일까? 우리가 아무리 변해도 소금은 될 수 없을 것이다. 성경에는 여러 단어로 소금을 번역하고 있지만 그 내용들이 서로 다른 의미를 갖고 있어 혼란을 주는 영향을 갖고 있다.
히브리어 단어로 “마흐라그흐”로 불리는 단어는 ‘비뼈 조각을 내다, 가루로 부수다, 먼지처럼 사라지다, 비비다, 절이다. 같이 섞다’ 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이렇게 단어의 뜻만 갖고 있다고 해서 의미를 다 아는 것이 아니다. 문장 사이, 구문 사이에 서로의 단어끼리 연결하며 그 뜻을 분석해 가는 것이 성경해석학이라 할 수 있다.
소금은 바닷물 속에 있을 때는 액체로 되어 있지만 어느 고정된 장소에서 물기가 사라지면 작은 알갱이로 변해 고체로 남아 있게 된다.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기능과 특성이 달라지겠지만 의약용품으로 아니면 화약에 첨가하여 사용되기도 하는 성분이지만 대부분 식용으로 사용될 때가 많다.
지난번에 칼럼에 언급한 바가 있지만 세상에 소금이 되라는 의미는 천국의 맛을 내며 살아가라는 의미를 표명했다. 밋밋해지기 쉬운 세상살이에 소금처럼 맛을 내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도 되지만 천국의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아주 맛깔스러운 삶을 표출해야 내는 것이 소금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스가랴 4:14에 소금을 (먹는 고로) “믈라흐”라는 단어는 ‘먹고 살다, 생계를 유지하다’라는 의미로 천국의 맛을 한번만 내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계속 유지해 가는 것이 세상의 소금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또한 겔 27:9, 27, 29, 욘 1:5에 나오는 ‘사공’이나 ‘선원’으로 “말라흐”라는 단어는 소금과 선원, 사공이란 단어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그래서 예수께서 “나를 따라오너라. 그러면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마 4:19)는 말씀도 소금과 어부라는 떨어질 래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지속적이며 유지해 나가야 한다는 것으로 아주 적당하게 맛을 내야 하는데 소금의 양을 너무 많이 포함시켜 버리면 그 주변이 사막이 되고 황무지가 되어버리는 상황이 된다. 그런데도 소금기가 많은 땅에는 열매를 맺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열매를 맺으려고 계속 심어댄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마 5:13에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안에서) 짜게 하리요, “할리조”라는 단어는 “할리유스”(어부) 할리유오오(고기를 잡다)는 단어가 서로 연결된 동의어들이다. 맛을 내기 위해 짠 성분을 넣어 적당한 맛을 내는 것처럼 어부가 고기를 잡아 공급하는 상황이라면 맛을 낸다는 것은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행위로 봐야 한다.
과거에 돈이나 화폐가 없었을 시대에는 돈 대신 소금으로 화폐 역할을 했는데 이 소금은 단순히 화폐로만 사용된 것만이 아니라 약속을 맺기 위한 하나의 징표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소금으로 맛을 내라는 것은 “약속을 반드시 이루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주신 것처럼 천국의 약속을 이루어야 한다.
레 2:13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드릴찌니라.
민 18:19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원히 응식으로 너와 네 자녀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변하지 않는 소금 언약이니라.대하 13:5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 자순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은 모두 소금과 같은 존재로서 소중하게 여겨야 하며 다뤄야 한다. 또한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에다 소금을 쳐야 해야 하는 이유를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약속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소금이란 헬라어로 “할라스”라는 단어는 소금만 의미하지 않고 “신중”하라는 단어를 갖고 있는데 헤픈 소금이 아니라 아주 신중한 소금으로 모든 행동이나 말에 신중한 행위를 하는 값어치가 상당히 높은 소금으로 여겨야 한다. 그런데 아주 싸구려 소금으로 값어치가 없는 행동이나 말로 격하시키는 소금이 된 존재들이 너무나 많다.
세상의 소금이라는 구문에서 세상을 일반적인 지구 땅 덩어리를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존재”를 의미하는 “게”라는 단어로 요한계시록에 많이 자주 등장하는 단어다.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 존재는 밖에 버리워 사람들에게 밟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천국의 맛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함부로 아멘하거나 할렐루야를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기도한답시고 중언부언하는 기도나 헤픈 기도를 해서도 안 되며 신앙의 결단을 위해 함부로 결정을 지어서도 안 된다. 또한 자기가 결정을 다 해놓고 일을 다 저질러 놓고서는 책임을 하나님께 떠맡기는 엉뚱한 짓도 해서는 안 된다.
‘맛을 내다’는 단어가 “아르튀오오”라는 단어는 “양념을 하다, 양념을 넣다, 준비하다” 뜻을 갖고 있는데 항상 맛을 내기 위해 준비된 상태로 살아가야 한다. 즉 언제, 어디서, 누가, 왜, 무엇을, 어떻게, 맛을 내며 살아가야 하는지 성경은 말하고 있다. 맛을 내지 못한다는 것은 생명의 비밀을 나타내지 못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어느 음식이라도 맛이 없다면 아무리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게 보여도 쓸모없을 것이다. 따라서 천국의 깊은 맛을 내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에 대한 맛이며 신비로운 맛으로 이 세상에서 맛볼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설명을 하고 표현을 한다고 해도 이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맛을 먹어보지 않고서는 말할 수 없다.
천국의 맛을 낸답시고 거룩한 척도 하지 말고 의로운 척도 하지 마라. 그리스도 안에서 있는 자만이 천국의 맛, 진정한 소금의 맛을 낼 수 있는 것이다. 주님과 한 몸이 되지 않고서는 신비로운 맛을 낼 수 없다. 또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옷을 입지 않고는 그 맛을 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내 쪽이나 사람 쪽에서는 아무리 맛을 낼려고 해도 그 맛은 나오지 않는다. 그 맛을 지니고 있는 주님과 한 몸이 되어야 하며 십자가에서 온전한 구원을 이루신 예수님과 함께 죽고 함께 장사지내었다가 함께 부활하는 가운데 그 맛이 나오게 되어 있다.
골 4:6의 말씀처럼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는 의미는 천국의 맛으로 신중하게 말해야 하며 상대방 입장에서 표현해야 할 것이다. 내 기분과 감정에 의한 말이 아닌 만약에 예수님께서 표현했다면 어떻게 하실 것인가를 염두에 두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음식의 간을 맞출 때도 한 쪽만 간을 하지 않고 골고루 간이 이루어지도록 비벼주는 것처럼 우리의 말과 행동이 고루게 해야 함을 명시하고 있다. 하나님의 생명에 대한 신비로움을 어느 특정인에게만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그 어느 누구에게도 해당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도 마찬가지 모든 이에게 해당된다.
소금의 역할을 다하는 화목의 사람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관계를 중재하는 일로서 인간인 내가 할 수 없지만 내 안에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해 나가야 하는 일이다. 그 분 없이 화해도 없으면 화목할 수 없음을 항상 명심하며 천국의 소금으로 살아가기를 바란다.
칼 럼 필 자 |
이종남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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