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0. 13. 10:49ㆍ좋은 글, 이야기
창세기 3장 9절에 죄를 범한 아담을 찾으시는 하나님께서 “네가 어디 있느냐?” 라는 질문과 이사야 6장 6~8절에 내용을 보면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는 질문에 이사야가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오가는 내용이 마치 하나님과 숨바꼭질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 같지만 그런 장면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머리카락을 세신 바가 되었고 창세전부터 우리를 알고 계시는데 그리고 우리가 어디에 숨어 있다고 할지라도 모조리 찾아내실 수 있는 분이시다. 이런 장면을 보고 문자 그대로 인식하는 분들이 있어 어쩔 때는 그렇게 이해하고 있는 그 자체가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누누이 언급하지만 성경은 기록된 문자를 그대로 이해할 수 부분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는 부분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성경에 나오는 문자로 받아들이는 차원보다는 그 뒤에 숨어 있는 내용을 찾아 감지하는 것이 바로 올바른 성경해석의 기본이다. 그런데도 무식이 탄로 나는 지경에 이르러도 굽히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인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을 찾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이루어야 하는 네가 어디 있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받들고 그대로 실천해야 하는 네가 어디 있느냐?” 라는 질문인데도 숨바꼭질하는 모양으로 아담을 찾으시는 것이 아님을 왜 모르는가? 단순히 나무 뒤에 숨어있는 아담을 찾는 음성으로 생각한다면 버려야 한다.
지금도 이 음성이 내 안에서 울려 퍼지고 있는지, 아니면 옛날 전설 따라 삼천리 식으로 꾸며낸 생각하고 있는지 나와 상관이 없는 내용으로 접근하고 있는지 자문해 보기를 바란다. 나를 찾아내고 있는 하나님의 음성이 아담에게만 해당되는 음성이 아니라 지금 현재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와 필자에게 호소하고 있는 음성으로 들어야 한다.
이사야 6장에도 마찬가지 “내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단순히 영웅심이나 객기를 부리기 위한 결단의 소리가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이루고 있는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고 있는 제가 여기 있사오니 저를 보내시면 어떠실런지요.” 라고 겸손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이사야처럼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할 수 있는 자신감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차원이라면 어떤 상황이라도 가겠다는 결단과 다짐의 모습이다. 이사 6장 9절처럼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며, 오히려 듣는 백성들의 마음이 둔하게 하고, 귀가 막히며, 눈이 감기게 되는 극한 상황이 된다는 것이다.
그들이 그 말씀을 눈으로 보고 귀고 듣고 마음을 깨달아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염려하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하나님의 말씀이 이런 것이다라는 내용은 알지만 그 말씀대로 실천하며 순종하는 부분에서는 포기하고 단념하며 불순종하는 차원에 머물러 눈과 귀, 마음은 구원받았지만 행동으로 옮기는 생각과 행동이 구원받지 못하는 악한 상황에 치닫게 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만 선악과를 따먹을 수밖에 없는 십계명을 알지만 그 행동지침을 지킬 수 없는 그 외에 주기도문대로 살아가면 되지만 주기도문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 산상보훈대로 살면 천국이 보장되어 있다 하여도 그림의 떡에 불과하여 만져보지도 못하는 차원에 머물고 마는 존재가 되고 만다.
하나님을 향하여 주의 뜻대로 살겠다고 다짐했던 순수했던 첫 사랑이 안개처럼 사라지고 순교를 하겠다며 결단했던 사명의 밤은 언제였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아득한 저 옛날 얘기로 들려오는 정도라면 하나님과 숨바꼭질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잠수하여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있는 존재가 있을 것이다.
이런 존재들, 회개하는 죄인을 철저하게 찾아내시는 하나님과 계속 숨바꼭질하고 있을 텐가? 그러나 자신의 잘못을 알고 부끄러워 숨어대지만 아무리 숨어봤자 그리고 무화과 잎으로 아무리 가려봤자. 자신의 수치를 감출 수 없는 것인데 기어코 감춰보려고 애를 쓰고 있는 인간들을 찾아내어 가죽옷을 입히시는 하나님께로부터 찾음을 당해야 한다. 철저하게 찾음을 당해야만 살아날 수 있는 것이다.
이사야는 입이 부정하여 천사들로부터 숯불로 갖다 대어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라졌음을 당한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찾음을 당하지 않으면 그런 은총과 섭리를 맛볼 수 없을 것이다. 올바른 복음을 외쳐야 되는 존재들에게는 반드시 거쳐야 되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내 입이 할례를 받든지 아니면 숯불로 악과 죄가 제거함을 받아야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의 말로 바꿔서 전해왔다면, 인간을 설득하려고 인간의 이성과 방법을 동원했다면, 천사로부터 숯불로 제거함을 받아야 한다. 이것부터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져 가는 은혜 위에 은혜임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부터 되지 않은 상황에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하지도 말라.
부정한 입이었던 제가 이제 정결한 입으로 바뀌어져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하고 있는 제가 있다고 해야 한다. 공허와 혼돈과 흑암 가운데 있던 제가 하나님의 빛 가운데 있는 제가 여기 있다고 고백해야 한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헤매고 있던 제가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부터 해방을 얻어 기쁨으로 살아가고 있는 제가 여기 있다고 외쳐야 한다.
위선과 왜곡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던 제 심령이 주님과 한 마음으로 된 제가 여기 있다고 자랑해야 한다. 창세전부터 이뤄졌던 주님의 형상이 윤곽이 분명하게 드러나 이제는 그 어느 누구로부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는 제가 여기 있다고 확신을 가져야 한다. 과거에는 희미하게 보였지만 이제는 선명하게 보여 지는 천국의 왕으로 살아가고 있는 제가 여기 있다고 담대하게 보여 져야 한다.
남들을 의식하는 차원에서 이제 함부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하지 말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내 자신의 초라함과 수치스러움에 두려워하지 말고 있는 그 모습 그대로 나오라. 내가 무엇을 했기 때문에 나를 부르시는 것이 아니며 내게로부터 가능성을 찾기 위해서 부르심이 아닌 것을 깨달아야 한다.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
칼 럼 필 자 |
이준호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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