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해져도 싸움은 계속 되어져야 한다

2012. 3. 5. 11:39좋은 글, 이야기

거룩해져도 싸움은 계속 되어져야 한다

 

 

 

 

  

    여호수아서를 읽으면서 느낀 것은 거룩한 땅에 입성했다고 해서 적군이 없어 안도를 하거나 싸움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진정한 안식을 얻고자 한다면 매일매일 충실한 삶을 살아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안식”이란 단어가 솨바트란 단어로 ‘쉰다’는 의미도 있지만 하나님 안에서 정착한다는 의미가 더욱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단순히 쉬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과 더불어 정착하기 위해서 세상의 일을 잠시 멈추는 날이 거룩한 날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거룩한 날이 안식교에서 토요일이나 개신교에서 주일만을 의미하는 것일까? 지금 현재 하나님 안에서 내가 정착하고자 하는 그 순간이 바로 안식일인 것이다.

 

    이스라엘이 멸해야 할 것을 진멸하지 않는 불순종 속에서는 타협과 패배만 남게 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변함없는 원칙이며 상식이다. 만약에 여호수아서처럼 가나안 땅에 입성하는 것처럼 어느 지역에 점령했다고 해서 그 지역의 원주민을 몽땅 다 죽여야 하는 재현을 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여호수아서의 사건은 그 사건으로 끝난 것이다. 그런데 성경 그대로 준행한다고 여호수아처럼 그 땅에 있는 종족을 몽땅 죽이려고 했던 사건이 삼백 년 전에 일어났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다고 해서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앞 다투어 신대륙을 향했다. (신대륙의 발견은 잘못된 것으로 이미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그 중에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얻고자 신대륙으로 쫓겨났을 때 마치 애급에서 탈출하여 가나안 땅으로 입성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 땅에 도착하여 농사하기도 어려웠으며 심은 것마다 재배되지 않아 겨우 생산되는 것이 호박으로 척박한 땅으로 고기 맛이 별로 없는 칠면조를 잡아먹었다.

 

    그래서 추수감사절 때가 되면 미국에서는 호박파이와 칠면조를 요리해서 먹는 풍습이 이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시절에는 식량을 구하기가 쉽지 않아서 굶주림으로 인해 그리고 풍토병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다. 그리하여 먹을 것과 머물 곳이 없어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과 추위에 죽게 되었다.

 

    하지만 원주민이었던 인디언들은 그들에게 담요와 천막을 제공하며 먹을 것을 주었다. 한 때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친밀했으며 복음적으로 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엄청난 땅에 점령하기 위해서 청교도들이 신앙이란 미명아래 그들을 몰아내고자 엄청난 인디언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인디언들에게 인디언이라고 호칭하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 그들은 인도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Native American이라고 불리기를 원한다.)

 

   아돌프 히틀러가 유태인들을 600만 명을 희생시켰고 전쟁으로 인해 엄청난 사상자를 냈다고 하지만 미국 청교도들이 인디언을 몰살하기 위해 죽인 숫자는 2억 명이란 숫자라는 통계를 갖고 있다. 물론 공식적인 집계가 아니라고 하지만 잠정적인 통계로 그 당시에 미국 땅에 살았던 인디언이 약 2억 여 명이라고 추산하고 있다.

 

   그들이 쫓겨나 남쪽 멕시코나 북쪽 캐나다와 알레스카로 도망갔으며 마지막으로 투항했던 시애틀 추장으로 인해(현재 시애틀 시로 된 이유) 살아남은 인디언들이 뿔뿔이 흩어져 현재는 약 700만 명이 생존하고 있다. 이들이 미국 정부에서 주는 생계비는 겨우 연명할 정도로 생활할 수 있는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인디언들과 우리 한국 민족과의 DNA가 85.7%가 일치하여(고려대학교에서 연구) 한국의 혈통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아주 친근한 민족일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문화와 생활적인 면에서 흡사한 부분이 상당히 많다고 한다. 이로 인해 한국 교회는 미국으로부터 복음의 빚을 졌다면 그 빚을 감기 위해서는 인디언들에게 선교의 눈을 돌려야 한다.

 

    최근에 출판된 박 종현 선교사의 “인디언의 눈물”이란 책을 반드시 구입해서 보신다면 인디언선교를 위해 13년 동안 혼신의 힘을 다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태권도 하나로 그들에게 접근하여 생명의 복음을 전했다. 태권도 도복을 입은 채로 결혼식, 장례식을 집례 했으며 심방이나 전도한 흔적이 너무나 많다.(책 문의는 010+2733+3112)

 

    우리들은 성경을 읽다가 보면 사람들의 이름이나 지명만 등장하게 되면 성경을 읽는 흥미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람들이 마음먹고 창세기 1장부터 시작해서 4장까지 잘 진행이 된다. 그런데 5장에서 멈춰버린다. 그러다가 또 다른 계기로 인해 성경을 읽기를 시도하면 재차 반복되는 상황이 되어 버린다.

 

   마태복음 1장도 마찬가지이며 여호수아 12장에도 이와 같은 현상으로 세상의 정신에 의해 지배되어 있는 마음에는 이러한 성경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어느 누구도 흥미를 갖지 않는다. 예수님 발아래서 은혜를 간구하는 마리아처럼 사모하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다른 내용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마태복음 1장이 왜 신약성경의 첫 머리에 와 있는지 성경을 아무리 수천 번을 읽어도 발견할 수 없는 비밀인 것이다. 신약성경 첫 번째 기록된 마가복음도, 예수의 역사적인 순서에 의한다면 누가복음도 제외되었고 역사적인 면에서 요한복음이 먼저 와야 되는데도 불구하고 세 번째 기록된 마태복음 1장이 제일 먼저 입문서로 배정되어 있다.

 

   그것은 구약성경 총 전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신앙족보의 내용을 간파하지 않고서 신약성경을 읽을 수 없다는 것이다. 1장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혈통 계보가 아니며 아브라함의 생명과 신앙의 뿌리와 근원이 이삭으로 이어지고 야곱으로 이어져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어져왔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하지만 이어져 오는 혈통관계가 아니라 족보에 나오는 인물들의 생명 신앙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근원되었으며 믿음의 원형과 본질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뿌리를 내려져 있다는 의미심장한 내용을 마태복음 1장에 담고 있다는 것이다. 단순히 유대인들의 혈통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간파해야 한다.

 

   따라서 막달라 마리아처럼(세상에서 가장 욕심이 많은 여자라고 유머적인 요소로 본다면) 성령의 감동감화하심에 의하여 기록된 말씀을 탐내다시피 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먹기 때문에 여호수아 12장에 있어서 ‘승리의 일람표’ 같은 내용도 그러한 독자에게는 흥미 충만으로 말씀을 접근하게 된다.

 

   요단 동편 광야에 있어서는 이스라엘은 두 사람의 왕을 정복함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 서편에 가나안에 있어서는 31명의 왕을 정복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어서도 그와 같이 신약성경의 지극히 크고도 귀한 약속의 모든 것을 요구도 하지 않고 받는 일도 없이 머물러 만족하고 있는 자는 죄와 육과 세상에 의하여 얼마 뿐의 승리 밖에는 얻지 못하게 되어 있다.

 

   즉 세상에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받은 것이 어쩌고저쩌고 내가 새벽, 철야, 천일, 금식 기도해서 승리를 얻게 되었다는 둥, 하늘의 계시와 환상을 보고 실천했더니 이렇게 되었다는 간증은 이제 그만해라. 저 위에서 보시는 분에게는 고만고만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옥상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키 차이를 느끼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완전한 데까지(히 6:2) 나아가는 사람들은 온전한 승리를 얻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명백하게 또는 개인적으로 기록된 31 왕의 승리에 대하여 읽는 것도 격려되고 또는 감동되는 일이다. 꼭 30의 왕을 이긴 승리가 아니라 31 왕의 승리였다는 것을 중점적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그 하나하나의 승리는 성경을 읽는 사람들에게는 흥미 없는 작은 것으로 생각될지 모른다. 하나님의 눈에는 중요한 것이고 하나님의 마음(뜻)에는 귀한 것이었다. 적에 대한 어떠한 승리도 하나님의 뜻에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성경 중의 정밀한 수, 말하자면 이스라엘의 초생아의 수, 다윗 용사의 수, 요한복음 21장의 물고기의 수 등도 유익한 성경연구의 자료가 될 수 있다.

 

  요단에 들어간 후 이들 31명의 왕을 정복한 일은 거룩하게 된 후에도 아직 남아 있는 죄를 하나하나 처분해야 할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라고 언급하는 분이 있는데 그 설은 순간적인 거룩을 가르치는 성경의 가르침은 아니라고 본다. 그리스도의 피는 모든 죄에서 단번에 거룩하게 하시며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받힐 때 단번에 없어진다.

죄의 뿌리인 옛 사람은 이미 처분되어 있는데 아직 오만함이라던가, 성급함이 남아 있다고 생각할 것은 아니다. 거룩해져도 아직 죄가 남아있다는 것은 모순이다. 그러나 죄의 성질은 거룩해져 죄의 능력에서는 해방되었다고 하더라고 거룩해진 생애에도 싸움은 계속 진행되어 져야 한다.

 

   즉 공중의 모든 권세를 잡은 자, 하늘에 있는 악의 영과 싸우는 것이다. (엡 2:2, 6:12)이 악령과의 정면충돌은 천국백성이 된 존재로서 당연히 감당해야 할 부분이다. 이것이 여호수아 12장에 등장하는 31명의 왕과 정면승부를 해서 승리하는 것을 보여주는 교훈이다. 그러나 신앙과 복종에 의해 연전연승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고 요구하고 있는 것일까? 내가 싸워서 이긴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존재하는 그 분과 함께 한 몸이 되어서 승리한 것뿐이다. 전쟁의 귀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치룬 전쟁은 승리해야만 된다. 그러나 잠시 망각하여 나 혼자 싸우거나 한 몸이 되어 싸우는데 인간의 생각으로 지배당하면 패배한다.

 

   죄가 다른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 짓는 죄도 포함되지만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새 사람이 된 것을 망각하거나 세상의 환경에 의해 혼미해져서 일상생활을 하게 된다면 그것이 죄를 의미한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주님의 생각을 가득 차, 주님과 한 몸으로 연합된 상태에서 임하면 반드시 승리하게 되어 있다.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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