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지 나사로처럼 살아가야 합니다.

2013. 6. 20. 16:32좋은 글, 이야기

 거지 나사로처럼 살아가야 합니다.

 

 

    눅 16:19-31에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 대한 이야기는 익히 잘 알고 있는 내용이다. 다른 복음서에는 언급하는 곳이 없는 비유로서 심오한 내용을 교훈해 주고 있는지를 명확히 알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핵심적인 내용으로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정확하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 곳은 이곳뿐이다.

 

   이 내용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여 천국과 지옥을 간증한다고 하는데 죄송하지만 본인들이 보고 온 천국과 지옥을 다 봤다고 떠들고 있지만 아니다. 요한계시록을 작성한 사도 요한마저도 천국을 다 보고 온 것이 아니라 일부분을 보고 온 것이다. 심지어 사도 바울을 삼층 천을 갖다 왔지만 일언반구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있지 않은가?

 

    오늘 본문의 내용에서 열거하는 천국과 지옥에 대한 개념을 올바르게 인식하지 못하면 천국과 지옥이 막연한 천국과 지옥이 되어 버리게 되고 실상 없는 허상으로 끝나게 된다. 현재 서점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천국과 지옥을 갔다 온 경험자들이 서술한 내용의 서적이나 관련된 자료를 보면 서로 다르게 보이지만 사실상 거의 비슷하다.

 

   본문에 나오는 부자는 육에 속한 삶을 살아가면서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최대의 호화판 삶을 누렸다. 자신이 모아둔 재물에 눈이 어두워 앞을 내다볼 줄 모르는 어리석은 삶을 산 것이다. 육의 눈이 닫혀져 신령한 세계인 내일을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으로 육신은 짐승처럼 살이 쪘지만 영혼은 영양실조상태였다.

 

   반면에 거지 나사로는 부자 집 대문 앞에서 버려진 존재였다. 부자가 먹는 밥상에서 떨어지는 음식으로 연명을 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동네에 있던 개들이 와서 나사로의 몸에 난 상처를 핥고 있었다. 이 비유를 접하는 독자들 가운데 부자와 나사로 중에 어느 쪽에 속하고 있는지 한번 정도는 자신에게 반문해 본 적이 있는지

 

   거지 나사로는 부자 집 대문 앞에서 상처투성이로 버려졌는가? 이것을 현재로 비유하기를 북한이라고 하며 일본이라고 한 분도 있다. 현실적인 면에서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그런 내용으로 치부할 수 없다. 거지 나사로는 자신 속에 있는 육적인 속성을 잘라내고 깨뜨려 나가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자신에게 엄습하고 있는 공허와 혼돈, 흑암의 권세를 깨드림으로 인해 자신의 몸에 상처가 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준행해나가면 반드시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도 상처를 받게 되어 있다. 이런 상태가 가난하고 곤고할 수밖에 없는 기근을 당한 형편으로 인식하는 차원을 금식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금식은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며 능력 받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 과거에 어느 부흥사는 40일 금식을 여러 번 했다고 명함에 기록하여 뿌리고 다니며 자랑하는 분도 있었다. 금식을 했다고 해서 육의 소욕이 완전히 죽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죽기는커녕 몇 숟가락 밥을 먹고 나면 옛날 성격이 나온다.

 

   자주 인용하는 이사야 58장에서 금식을 거론하고 있는데 자세히 읽어보라. 밥을 먹지 않고 소극적으로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며 능력을 받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금식의 능력은 육의 소욕인 무저갱의 속성들을 잘라버리고 다시는 받아들이지 않는 신앙의 결단이다. 또한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 줄을 끌려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어 주는 것이다.

 

    나사로는 바로 이런 금식을 한 것이다. 육신의 향락을 누리는 자는 이러한 금식을 할 줄도 모르고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한다. 금식하는 자가 어리석은 바보로 보일 뿐이다.금식에 대한 원형과 본질을 깨닫고 금식기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했으면 한다. 위에 열거된 내용을 실행하려면 오히려 밥을 잘 먹어야 할 것이다.

 

    나사로의 히브리어 원음은‘나자르’인데 “구원하다, 돕는다”는 뜻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기름 부어진 말씀대로 익히고 적용해가는 것이 구원이다. 예수는 부르는 이름은 부르라고 준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예수와 함께 이루어나가야 하는 이름이며 구원을 성취하는 이름이다.

 

    육의 속성인 무저갱의 옥에서 해방시켜 자유 함을 누리게 하는 이름이다. 이 땅에 오신 예수는 우리가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입고 잘 사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오직그리스도로 기름 부어진 말씀을 삶속에서 적용하고 실천하여 육의 속성인 무저갱을 깨뜨려 가는 것이 함께 추구하기를 원하신다.

 

    나사로는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간 곳이 천국으로 아브라함은 육의 속성들을 깨뜨리고 높이 들리운 자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적용한 것으로 자아를 정복하여 하나님의 사상과 동등하게 그리스도의 사상으로 개방하는 존재가 아브라함이다. 이와 같이 육의 속성인 무저갱을 깨뜨리지 않으면 아브라함 품에 못 들어간다. 세상에서 할 짓 못할 짓 다 하면서 아브라함 품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착각을 하면 인생의 비참한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부자가 호화판으로 살았다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육신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라고 자유를 준 것을 의미한다. 세상에서 폼 나게 살고 멋지게 살고 싶은 것은 그 어느 누구도 당연지사지만 하나님께서는 나사로처럼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나사로처럼 무저갱의 옥에서 벗어나야 아브라함 품속으로 들어간다.

 

   육의 생각을 죽이고 하나님의 생각대로 통치를 받으면서 살아가라는 것이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 것이다. 남의 눈치를 보며 자존심을 상한 가운데 자신의 굴욕을 참고 살아간다는 것이 쉽지 않다. 이러한 신앙생활은 참다운 생명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달하신 훈련이 필요하다.

 

   최고의 호화판 부귀영화를 누렸던 부자가 죽어서 음부의 고통 중에 던져진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음부는‘스올’(l/av)이다.“문의하다, 물어보다”는 뜻으로 무저갱의 옥에 갇혀서 불 속의 고통을 면해보고자 무저갱에서 벗어나려면 어찌해야 하는가를 몸부림치며 묻고 있는 그 자체가 음부인 것이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담고 있는 무저갱은 반드시 살아있을 때 소멸시키고 깨뜨려져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지옥에 있는 부자가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아브라함 아버지여! 나를 긍휼이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라고 하였다. 무저갱을 깨뜨리지 못하고 불속에 던져진 자의 울부짖는 소리다.

 

    “물”(!yim')은‘나사로의 육의 속성을 깨뜨리고 잘라낸 하나님의 말씀’을 뜻한다. ‘그의 손가락 끝’은 번역의 오류로서 전체 내용을 오해하게 되어 있다. 나사로가 말씀의 물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물에 완전히 담가진 것과처럼, 무저갱의 속성이 깨뜨려지기를 원하오니 이제부터라도 저도 나사로와 같이 무저갱의 속성을 깨뜨리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익혀나감으로 말씀의 물에 담가지기를 원합니다. 의미이다.

 

    만약에 기존에 번역된 내용처럼 불속에 있는 자에게 목마른 극심한 고통이 나사로 손끝에 물 한 방울을 찍어 적셔준다고 해결이 될 수 있겠는가? 한 물동이를 줘도 모자랄 것이다. 부자와 같이 타지 않고 극심한 고통만 주는 불구덩이에 들어가서라도 정신을 차렸다는 것은 그래도 천만다행이다. 정신을 차릴 수 있는 지옥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사람의 마지막이 현존에서 끝나버린다면 육신의 속성을 갖고 무저갱에서 살아가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내세가 있다는 것을 여러 종교에서도 언급하지만 오늘 우리가 접하는 본문에는 정확하게 명시하고 있다. 죽기 전에 불구덩이를 상상만 했다가 실상 들어가 보니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어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해도 소용이 없다. 그러나 육의 속성인 무저갱을 잘라내야 하겠다는 간절함이 생겨 몸부림을 치게 된 것이다.

 

   이 글을 접하는 독자들은 부자인가? 아니면 거지 나사로에 해당되는가? 이 세상에서 거지 나사로처럼 망가진 인생이라고 좌절하지 말고, 없이 산다고 무시하는 부자도 되지 말라. 거지 나사로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푹 담겨져 있는지 자신을 돌이켜 봐야 할 것이다. 아브라함 품에 안기는 것이 진정한 안식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다음 후속편을 기대하면서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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