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0. 4. 09:39ㆍ좋은 글, 이야기
중생하지 못한 자의 하나님에 대한 적대감
중생은 심각하게 숙고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생은 신자의 시작이고 증거이며 필수입니다. 거듭남 즉 다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단지 연약함이라 표현 하거나 어쩔 수 없다는 표현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가는 죄성은 우리의 생각보다 굉장한 것이고 불치의 병이기 때문입니다. 죄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이요 이는 곧 적대감의 표출이 됩니다. 만약 이러한 의식을 가지지 못한다면 그는 자신이 거듭나야 한다는 간절함을 가지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오직 그리스도만 바라봐야 한다는 간절함을 가지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다시 태어남이 필요없는 그는 이미 죄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중생없는 구원은 없습니다. 거듭나지 않은 자는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 진리입니다.
이 말씀은 이리 저리 돌려서 표현할 필요가 없습니다. 고장 난 것을 고쳐서 쓴다는 개념이 아닙니다. 이 진리는 신생이요. 새 피조물이요. 새 피조물 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진리입니다. 이 진리는 새것이 되기 전에는 우리가 전혀 가망이 없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만약 새 피조물이 아닌 자연인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다고 보는 보편 구원론자나 행위 구원론자들은 그 주장으로 인해 구주께서 오실 필요가 없었다고 스스로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또 나는 거듭나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을 믿으니 구원받는다는 믿음 역시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 믿음으로 따지자면 아마 귀신의 믿음이 더 클 것입니다. 귀신들의 믿음이 얼마나 대단한지 거라사로 가보시기 바랍니다. 또 유대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에게 가서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거듭나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본을 따라 사랑하기를 힘쓰니 100점은 아니지만 구원을 받을 수 있을거라는 믿음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구원자가 아닌 좋은 선생쯤 생각하고 거저 주시는 그분이 다 이루신 영원한 의의 전가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소용없습니다. 거듭나지 않은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사람의 편에서 이 진리가 아무리 이해가 되지 않고 가끔 화가 나는 진리라고 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거룩하심과 미쁘심에 근거해 거짓말 할 수 없는 분이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는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신 것은 그대로 진리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편에서 손댈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거듭나야 합니다. 그리고 거듭남에서 추측할 수 있는 진리 중 중요한 또 다른 한가지는 새 피조물은 이전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죄는 본질로 하나님에 대한 적대감이요. 그것은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완전한 분리를 의미합니다. 중생하지 않은 자연인의 상태가 이와 같습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들 것입니다. 마치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 자부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입니다. 중생하지 못한 영혼이 하나님을 사랑할 방법은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미워할 뿐만 아니라 원수된 상태요. 그분을 향해 분노하는 적대감에 가득 차 있습니다. 중생하지 못한 자들은 모두 이러한 상태에 있습니다. 거듭남은 전적으로 그가 구원에 대해 불능한 것이고 어떤 노력으로도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강력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열심히 선행으로 공적을 쌓아도 소용없습니다. 죄인은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실로 그렇습니다. 중생하지 못한 자는 결코 하나님에 대한 적대감을 절대로 거두지 않고 거둘 수도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찬송하며 눈물을 흘렸던 적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자연을 보며 하나님의 솜씨에 감탄하고 찬송을 드렸을지도 모릅니다. 과연 그것이 중생한 자의 열매일까요? 아닙니다. 그 정도는 이방 종교에서도 흔히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중생한 자는 죄를 인식하고 그리스도로 인해 안식을 얻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외칩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죄인은 오직 그리스도안에서 안식합니다. 중생한 자는 이 사실을 압니다.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것들은 본질적으로 그들의 마음을 채울 수 없습니다. 그들 역시 약하지만 그 약함이 오히려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로 인해 살고 그리스도로 인해 인생길을 마칩니다. 그들은 항상 탄식하지만 그리스도가 있음에 안심합니다. 그들은 죄인으로 자신의 죄로 인해 그리스도께서 오셨음을 깊이 깨닫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평안이요 육신을 초월하는 기쁨입니다. 아.. 허탄한 인간적인 술수가 이 신령한 평안과 기쁨의 모조품을 얼마나 많이 만들어 냈습니까?
죄는 거룩함과 단 한 발자국도 같이 할 수 없습니다. 이 차이가 바로 사람과 하나님의 격차입니다. 그 격차는 온 우주의 거리보다 먼 격차입니다. 그렇습니다. 죄인은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때문에 영원이신 성자 하나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신 것이며 그분만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가깝게 느껴지십니까? 하나님이 죄인을 심판하실 리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어찌 죄와 거룩함이 사이 좋게 지낼 수 있습니까?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를 단지 싫어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만물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것을 보듯 하십니다. 하나님과 중생하지 못한 자의 거리는 결코 극복될 수 없는 거리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독생자께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그분의 놀라우신 사랑과 긍휼하심으로 죄인의 구원이 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신 그분께서 무엇이라 하셨습니까? 너희는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삼위 하나님인 성자 하나님께서 죄인을 위해 피 흘리신 사건에 비하면 세상의 모든 기적들은 실로 하찮은 기적입니다. 죄인 괴수가 거룩하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이 사건에 비하면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은 하찮습니다. 죄인 괴수가 영원하신 분을 마음에 품고 추구하게 되는 이 사건에 비하면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은 하찮습니다. 영원보다 크신 분이 어찌 지극히 낮은 우리보다 낮아지셨습니까? 어찌 자신을 드리셨습니까? 성삼위 하나님이신 성령 하나님이 어찌 벌레와도 같은 우리 속에 거하시고 영원까지 우리를 사랑하십니까? 성부 하나님께서 어찌 영원 전에 우리를 사랑하셨습니까? 실로 말도 안 되는 일이고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참으로 기이한 일입니다. 그분은 그렇게 하지 않으셔도 실로 스스로 충족하신 분이 아닙니까? 그런데 벌레 같은 존재들이 그분을 어떻게 취급하였습니까? 마치 그분이 아쉬워서 그렇게 하신 것처럼 그분이 우리들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처럼 여겼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적대감의 본질입니다.
적대감이란 단순히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반역이고 배도입니다. 왕을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왕을 보좌에서 끌어 내리려는 반역입니다. 자연인의 상태는 이와 같습니다. 그분에 관한 모든 것을 싫어합니다. 많은 분들이 인정하지 못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가장 확실한 증거를 보여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어찌 하였습니까? 그들은 한없는 긍휼과 사랑을 베푸신 그분을 조롱하고 침뱉고 못박았습니다.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까? 이것은 그냥 싫어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이것은 철저한 적대감입니다. 죄는 거룩하신 면전에서 자기 자신을 뽐내고 마치 그분이 앞에 계시지 않은 것처럼 담대하게 방탕하고 죄를 범하므로 그분을 적대시 했습니다. 죄는 담대하게 자신의 영혼의 비참함을 인식하지 못하고 임박한 심판 앞에서 먹고 마시므로 그분을 지속적으로 조롱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누구를 단단히 미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알아 달라는 마음으로 고민 상담을 해왔습니다. 그리고는 내 앞에서 누구에 대한 욕을 쏟아 부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 주고 대답합니다. OO씨 저도 사실 자주 사람들을 미워하곤 합니다. 그 마음 이해합니다. 저도 그 문제 때문에 괴롭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이끌어 주시니 다행이지요. 그는 또 나를 찾습니다. 그리곤 또 그에 대한 욕을 털어 놓습니다. 그때 마다 같은 위로를 해줍니다. 그리고 그는 또 내 앞에서 그에 대한 욕을 털어 놓습니다. 참으로 사람의 죄성이란 얼마나 대단한 것입니까?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이유가 죄를 담대히 지어야 할 이유입니까?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말씀하시는 분을 보십시요.
위로 해준다는 좋은 이유를 들어 같이 욕을 해줄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에게 대놓고 면박을 줄 수도 없습니다. 이것은 성도에게 고심이 되는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근본적으로 이렇게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 짓는 것을 결코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죄 지을 때 그분은 탄식하십니다. 죄가 틈탈 때에 내가 도저히 그를 용서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긍휼을 구하십시요. 그러면 십중팔구 그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지금 이 상황에 하나님 이야기가 어울린다고 생각하십니까? 난 위로를 받으려고 왔지 정죄를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나는 대답합니다. 성경에서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올 수 없다. 분을 품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 하신다고 말입니다. 그는 점점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고 화가 불일 듯 하여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이 그분의 거룩하심을 낮춰야 하는 이유입니까?
더 나아가 봅시다.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나에게 말한 말씀을 다 지키십니까? 당신은 위로는 못해줄 망정 나에게 절망감을 주는군요. 당신처럼 사랑이 없고 경건함을 포장하여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율법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은 대단히 착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정죄하지 않으셨는데 당신에게 그럴 권리가 있습니까? 그는 흥분하여 점점 도를 넘어섭니다. 나는 그에게 수많은 위로를 주었건만 그에게 말씀으로 단 한번 권면 했다는 이유로 바리새인으로 몰아가고 그동안 내가 그를 수없이 위로해준 일은 불속에 전부 넣어 태워버립니다. 왜 사람의 헛된 위로는 좋아하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말씀은 싫어합니까? 이것은 적대감의 표출이 아닙니까? 그들은 나단 선지자가 당신이 그 사람이라 아무리 말해도 결코 회개하지 않습니다.
한 식품점의 주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친절하고 정이 많은 사람이라 물건을 사는 손님들에게 덤으로 더 챙겨주는 것을 기뻐합니다. 그런데 하루는 이러한 일이 생겼습니다. 어느 한 손님이 반찬 거리를 사기 위해 가게를 방문하여 이것 저것 구입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꼭 필요한 하나를 덤으로 달라 합니다. 그래서 주인이 웃으며 "덤으로 드리는 건 제가 드리고 싶은 것을 드리는 것이고 사정이 안되면 드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손님이 꼭 필요하신 것은 구입을 하셔야지 필요한 것을 골라서 덤으로 달라 하시면 조금 곤란합니다." 말했습니다.
손님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올 곳이 여기 뿐인줄 아나?" 이 손님은 그동안의 호의는 다 잊고 주인이 정이 많다는 이유로 오히려 더 뻔뻔해지고 급기야는 주인을 향해 적대감을 보입니다. 이런 사람은 정죄를 받아 마땅합니다. 주님의 한 없는 용서의 십자가가 죄를 뻔뻔하게 더 지어야 하는 이유가 되었습니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죄를 지적 당했을 때에 어찌 그런 적대감을 표출합니까? "내가 올 곳이 십자가 여기 뿐인줄 아나?" 그렇습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거치는 것이 된 사람은 이제 세상에서 위로거리를 찾아 두루 돌아다니며 악을 행합니다. 이것에 적대감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는 거듭나지 않고 이 적대감을 결코 스스로 거둘 수 없습니다. 아무리 예쁜 포장지와 값비싼 화장품으로 치장을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는 반드시 먼저 거듭나야 합니다.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면 회개도 그리스도를 따름도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안에서 자라가는 것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치에 극히 합당합니다.
죄인들은 사랑의 하나님은 좋아하지만 거룩하신 하나님은 거부합니다.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은 좋아하지만 공의를 행하시는 하나님은 싫어합니다. 그들은 우리 주님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만 보입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아들에게 쏟으신 죄에 대한 긍휼이 없는 무서운 진노는 보이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를 폐하는 현장이 아니라 오히려 공의가 더욱더 완전하게 서는 현장이라는 사실이 보이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그분이 죄를 묵인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희생해야 할 만큼 죄를 심히 혐오하신다는 선언이 된다는 사실이 보이지 않습니다. 사랑을 확증하신 하나님은 좋아하지만 진노의 잔을 전부 다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습니다. 위로와 사랑과 긍휼의 하나님을 논하는 것 만이 신앙 이야기요. 죄를 깨닫게 하시고 징계하시는 하나님을 논하는 것은 신앙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아무리 겉으로 죄인이라 말해도 그들의 속으로는 죄인이 아니요. 이 이유로 그들은 죄인 구원하시는 그리스도께 달려가지 않을 것입니다. 이 사실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죄인의 능동적인 적대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능동적인 적대감입니다. 절대로 수동적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 사실을 모릅니다. 예수님이 간음한 여인을 종교재판에서 구하셨을 때에 일어났던 사람들의 반응을 말입니다. 그들은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신 것만 보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여인을 정죄하던 많은 사람들의 마음까지 녹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도려내 버립니다. 그리고 돌을 내려놓은 사람들이 단 한명도 죄를 깨닫지 못했다는 사실에 완전히 눈이 감겼습니다. 마음이 녹기는커녕 단 한명도 죄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것을 볼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양심에 찔린 많은 사람이 어떻게 하였습니까? 모두 다 예수님을 피해 도망갔습니다. 그리고 후에 그들이 어떤 일을 행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들은 능동적으로 예수님을 조롱하고 못박았습니다. 그들은 죄를 깨달은 적도 없고 오히려 적대감을 품고 끝내 그것을 표출해 예수님을 못질 했습니다. 이유라면 그분이 죄가 없고 거룩하다는 이유 하나였습니다. 죄는 결코 거룩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닐 것 같습니까? 예수님을 직접 본 그들이 그러했는데 우리는 너무 자만했던 것이 아닙니까?
그분이 사랑하시니 죄에 담대합니까? 그분이 거룩하시니 그분을 십자가에 못을 박습니까? 그분이 택하신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전했다 하여 그들을 쳐서 죽입니까? 죄를 비춰주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죄인에게 그분만을 바라보게 하려는 그 은인을 욕하고 찢어 죽입니까? 이것은 단순히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적대감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요. 은혜로 죄를 진정 깨달은 자들은 모두 주님께 달려갔습니다. 성경 어디를 펴도 죄를 인식한 죄인들이 하나님을 피했다는 구절은 없습니다. 가망없는 자는 도피성으로 달리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죄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타락하고 부패한 생래적 양심은 안타깝게도 주님을 피하고 심지어 못박기 까지 합니다. 이 사실이 바로 회심의 시금석으로 보아도 될 듯 싶습니다. 중생한 죄인의 양심은 그리스도외에 달리 찾을 곳이 없음을 깨닫고 머리를 조아리고 그분께로 갑니다. 그러나 중생하지 못한 죄인의 양심은 그분을 부담스러워 하고 피합니다. 타락한 죄인의 머리인 아담이 그러하지 않았습니까? 그안에 있는 모든 죄인도 같은 본성을 가집니다. 성경 어디를 펴봐도 이에 대한 증언이 넘치고 넘칩니다.
많은 사람들은 여인을 구하신 예수님만 보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이 사실은 감춰져 있고 죄가 발각되면 하나님을 피함과 동시에 그분에게 적대감을 보이고 이내 그분을 다시 십자가에 올리려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두고 오래 참으시고 아직도 먹고 입히십니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라면 그러한 자에 대해 참지도 않고 가만히 놔두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진 정의가 그분의 거룩하심보다 수준이 높습니까?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이것이 그분을 보좌에서 끌어 내리려는 반역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분은 이런 우리들에 대해 오래 참으십니다. 그러나 그 오래 참으심이 언제까지입니까? 그날은 도둑같이 임합니다. 우리는 너무 자만하지 않았습니까?
중생하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을 결코 사랑하지 않습니다. 아니 사랑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분의 거룩하심 앞에서 도망하고 반역의 기회를 엿봅니다. 죄는 마치 화산과 같아서 잠잠할 때에는 자신을 정체를 숨기고 때로는 아름다움을 자랑하기 까지 합니다. 그러나 정체를 숨길 수 없을 만큼 부풀었을 때에 사정없이 하늘을 향해 불과 유황을 분출합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닿는 모든 것을 태워 버립니다. 마치 아담이 하와를 원망했고 하와는 뱀을 원망했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그의 자손은 오래가지 않아 살인이라는 궁극적인 죄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자손들이 받은 평가가 어떠합니까?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악할 뿐임을 보시고" 이 말씀은 바로 우리를 비추는 거울과도 같습니다. 세상이 어떻습니까? 길게 말로 나열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만든 피조물로 아담은 본질 상 하나님께 자신의 화를 분출하고 다름 아닌 그분을 향한 반역을 저질렀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말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범죄가 아니라 배은망덕이요. 배도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선악과 사건을 단순하게 보시면 안됩니다. 그는 배도한 죄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작고 작은 피조물의 반역에 위기감을 느끼시고 그분의 거룩하심을 조금이라도 낮추셔야 합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피조물인 아담이 명백하게 배도하였습니다. 범죄한 그는 마치 하나님이 없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 했음이 명백합니다. 마치 우리가 은밀한 죄를 행할 때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은밀한 죄를 행할 때에 하나님이 없으면 좋겠다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적대감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 말씀을 달리 이리 꼬고 저리 꼬아 생각할 이유가 없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처럼'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은 그 자체로 하나님과 '원수'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혐오하시는 것이 분명하고 모든 중생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과 원수입니다. 그는 새로 태어나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소망이 없습니다. 회심하지 않은 죄인들은 이렇게 해야 합니다.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깨닫게 해주시고 자신에게 그리스도를 계시해 주시기를 간구하십시요. 그분께서는 배도한 아담에게도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제가 왜 이런 글을 쓰고 이런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제가 뭇 사람들 보다 인격이 뛰어나서 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오늘도 내일도 저는 수없이 넘어질 사람이고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고 나의 중보가 되신다는 확실한 사실로 인해 안식하는 무염치한 사람일 뿐이고 그리스도로 인해 기뻐할 사람입니다. 이 글은 저도 읽어야 하는 글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이유를 제쳐두고 먼저 거짓없이 말해야만 합니다. 결코 거짓 확신을 주어 영적 살인을 해서는 안됩니다. 먼저 믿은 자로 여유를 부리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것들을 생각하지 말고 다른 것들을 비교하지 마십시요. 오직 당신 자신을 보십시요. 거듭나지 않았다면 당신은 분명히 거듭나야만 합니다.
죄인들이여. 자신의 소망 없음을 알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달리십시요. 죄를 고백하십시요. 그리스도로 옷 입으십시요. 염치없다 해도 죄인은 그 수밖에 없습니다. 혼신을 다해 그분에게로 달리십시요. 도피성을 향해 혼신을 다해 뛰십시요. 가서 믿음의 눈으로 똑똑히 보십시요. 그분을 때리는 채찍을 보십시요. 죄가 없는 그분이 살인자보다 더 악한 자로 취급받습니다. 피조물이 창조주를 조롱하고 침을 뱉고 뺨을 때리고 가시 면류관을 씌웁니다. 그러나 양처럼 순하신 그분을 보십시요. 그분은 아무런 저항이 없으시고 오히려 죄인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그분의 고난과 흘리신 보혈을 보십시요.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 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삐죽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피조물은 충분하지 않았던 것인지 그분의 옆구리를 찔러 남은 피와 물을 전부 쏟아내게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전부 쏟으신 그 피는 도리어 그분을 찌른 죄인 괴수의 씻음이 되었으니 십자가 달리신 주님을 보십시요. 그분은 모든 피를 전부 흘리셔야만 했고 하나님의 공의의 칼과 진노의 대접은 아들을 쳤으며 아들에게 전부 쏟아졌습니다. 우리의 죄가 그분을 찔렀고 흘리신 그 피는 도리어 우리의 씻음이 되었습니다. 죄와 사망의 적대감은 어리석게도 그리스도 앞에서 그 정제를 드러냈고 서로 협력하여 그리스도를 대적하였으나 결국은 멸망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부활, 승천이 이 모든 일의 확증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분은 승리하신 정복자 이십니다. 또 살아계시고 영광중에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만유의 통치자 이십니다. 그분은 실로 낮아지셨고 비천함에 처하셨으나 지금은 영광중에 계시고 모든 권위 위에 권위로 계시는 분입니다.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에 엎드리고 그분의 무한하신 지혜를 찬양해야만 합니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셨으나 우리는 얼마나 그분을 적대했습니까? 그 크신 분이 어째서 나 같은 죄인을 살리셨습니까?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너무나도 놀라운 일입니다. 이 일은 애초에 말이 되지 않는 일입니다. 저는 그분의 사랑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먼저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그분 앞에서 대체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그분이 왜 더러운 우리를 씻기시고 제일 좋은 옷으로 입히시고 반지를 끼우시고 신을 신기십니까? 왜 아직도 거리가 먼데 그분이 달려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십니까? 그분을 적대시한 일 외에 한 일이 없는 우리가 대체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우리는 실로 아무것고 없고 줄 것도 없는 원수의 자손 절름발이 므비보셋이 아닙니까? 그는 은총을 입을 근거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단지 요나단과의 언약에 근거해 태어나기 전에 이미 다윗의 은총을 입었습니다. 우리는 그저 은혜만이 필요한 머리부터 발 끝까지 성한 곳이 없는 무능한 거지가 아닙니까? 원수를 사랑하신 분은 나의 구주 예수님이지 내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뿐입니다. "주와 같은 신이 없나이다."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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