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 1. 19:49ㆍ좋은 글, 이야기
기독교인들은 새해가 어떤 의미인가?
새해가 되면 교회마다 새해맞이에 분주하여 목회자들이 정신을 못 차린다. 성탄절에다 송구영신예배, 새해맞이 예배로 인해 바짝 긴장을 하며 신년하례예배도 가야 하고 신년 맞이 기도회 등등 눈썹을 휘날리며 바쁘게 움직인다. 이러한 모습 속에 과연 기독교인들은 새해가 어떤 의미인가?
어떤 덜 떨어진 교인들은 새해맞이를 한답시고 동해안이나 산의 정상에 올라가 새해에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면서 일 년을 기원하는데 참석하는 이들도 있다. 신년 초에 한 해 동안 하나님께서 어떤 축복을 주시려는지 봉투에 일 년의 소원을 적어서 예언의 적중률이 가장 놓은 기도원 찾아가서 안수기도를 받는다.
이런 행태의 모습들은 기독교적인 면이 아니고 무속종교에서 접목시켜 온 것으로 올바른 기독교의 모습이라 할 수 없다. 새해의 소원을 비는 것은 기독교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시켜야 한다. 기독교적인 송구영신예배와 신년 맞이 예배는 한 해를 보내고 한 해가 맞이하는 그런 종류가 아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해를 바라보며 한 해를 기원하는 무속종교의 틀을 깨야 한다. 내 안에 떠오르는 태양은 바로 하나님인데 그 분의 역사와 활동을 하는 것이 바로 내 안에 새해가 떠오르는 것이다. 그것도 눈에 보이는 해가 떠오른 것이 새해가 아니다. 내면에 떠오르는 해가 바로 하나님의 실체이며 본질인 것이다. 그 분이 나타나는 것이 바로 새해이며 정월 초하루인 것이다.
이러한 바탕이 없이 새해를 맞이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나타나서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 나와 더불어 함께 살아가기를 원하는 것이다. 나를 지배하시고 장악하여 나의 모든 운명을 바꿔주신 날이 바로 새해가 되는 것이다. 내 안에 임재하시는 주님과 더불어 새 출발을 하는 것이 바로 새해라는 것이다.
기독교는 제한적인 시간에 억매일 수도 있지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믿음의 역사를 체험하는 종교임을 깨달아야 한다. 태양을 멈추고 생명의 연수를 늘려 연장하기도 하는 것이 기독교인 것이다. 또한 하루가 천 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말씀이 이뤄지는 것을 경험하는 종교인 것을 몸소 체험해야 한다.
시간적인 세월이 바뀐 것도 새해맞이도 되지만 자신의 정체성이 바뀐 것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것이 올바른 자세다. 즉 한 해를 보내고 한 해를 맞이하는 것이 아니다. 한 해가 나를 통해 지나가고 또 다른 한 해를 나를 향해 오는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삶이 아니다. 한 해를 향해 뛰어가다 보니 또 다른 한 해가 나를 따라오는 적극적인 삶이다.
이것을 추구하며 옛 것에서 새 것으로 바뀐 것을 또 다시 성찰하며 세월에 질질 끌려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월이 내 뒤에 따라오게 하는 것이 기독교인으로서 갈망해야 되는 삶이다. 이러한 정신과 자세를 가지고 살지 않으면 항상 시간에 쫓겨서 살아가는 것이다. 지구가 돌아가는 대로 살아가지 말고 지구가 내 뒤를 따라오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창세기 1:28에 생육하고 번성하며 충만하고 정복하는 삶이 되는 것이다. 단순히 세월만 바뀐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에 본질과 원형이 바뀐 것을 주님 앞에 내놓으며 일 년 동안 바꿔진 모습으로 살아가겠다고 다짐하며 맹세하는 시간이 바로 송구영신예배이며 신년 맞이 예배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의 예배가 아닌 세월이 바뀌었으니까 다르게 살아가자는 식은 일반종교와 다를 바가 없다. 세월이 바뀌었으니까 다르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의 존재가 바뀌었으니까 다르게 살아가야 한다는 목적과 취지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목적과 의도가 아닌 송구영신예배와 신년 맞이 예배가 아닌 것을 과감히 배격해야 한다.
우리 중심의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가 무엇인지 올바르게 인식하지 않으면 내가 원하는 그리고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예배로 전략하고 만다. 예배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버지다. 그런데 그 분은 온데 간 데 없고 사람들만의 잔치가 되고 축제가 된다면 예배당이 아니라 사교장에 불과한 것이다.
구약에 정월 첫 날에 무엇을 했는지를 언급하는 내용들을 열거하면 상당히 많다. 신약에도 안식 후 첫날이란 문장이 있는데 단순히 안식일 지난 후에 첫날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창조의 여섯 과정 중에 하나하나 이루어질 때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사건이 바로 안식의 차원이며 새해 첫날을 맞이하는 순간이다.
어쩌면 새해 첫날은 창조의 여섯 과정을 한꺼번에 경험하는 날이기도 하다. 첫째 날의 안식이 이루어지고 둘째 날, 셋째 날, 넷째 날, 다섯 째날, 여섯째 날의 안식이 하나나 이루어져서 제 칠일이 안식 중에 안식인 안식일이다. 첫째 날에서 여섯째 날까지 안식이 완벽하게 이뤄져야 만이 일곱 번째 안식이 이루어지는 것임을 어찌 모르고 안식일만 중요하게 여기는지 너무나 안타까운 것이다.
진정한 안식일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토요일이 맞니 일요일이 맞니 하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이러한 인간들의 노름에 기가 막혀 할 것이다. 탁상공론에 빠지기를 원하는 사탄의 전략임을 모르고 거기에서 헤매고 있으니 누가 가장 기뻐하고 있겠는가? 제 칠일 안식일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올바르게 믿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으니
또한 주일을 안식일로 지키고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장 떳떳하다가 자랑하고 있으며 제 칠일 안식일교단들을 향해 이단이라고 정죄하고 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둘 다 맞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아니면 둘 다 틀렸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나님은 그런 것에 맞다 틀렸다고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은 거기에 두고 있지 않다. 사람들이 나와 하나가 되어 연합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는 것이 안식일이며 새해인 것이다. 사람들은 전혀 상관이 없는 것에 목숨을 걸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스라엘 민족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사람의 잣대와 판단으로 규정을 세워 자기 마음대로 법을 만들어 지키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들을 어떻게 하셨는지 잘 알 것이다. 그런데 많은 목회자들이 그런 이스라엘 민족들이 하나님을 잘 믿어서 축복을 받았다고 하면서 노벨 상을 많이 받은 우수한 민족인 것을 자랑인 냥 떠들고 있다. 사회각개각층에서 그리고 과학자와 음악가들 그리고 탁월한 재능을 가진 것이 하나님을 잘 믿어서 그렇다고 한다.
과연 하나님을 잘 믿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민족의 독특한 우월성을 지녔기 때문인지
그뿐만 아니라 록펠러가 십일조를 잘 한 것이 하나님을 잘 믿어서인지 아니면 탁월한 사업의 결과인지 올바르게 분별해야 한다. 록펠러가 사업을 하나님의 중심으로 했는지 아니면 종업원들을 쥐어짜서 얻어낸 소득을 하나님께 바쳤는지 분간해야 한다.
미국 한인의사가 탁월한 신앙을 내세우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간증을 출판하여 전국 교회와 세계 각 교회를 돌아다니면서 간증을 한 바가 있다. 그런데 그가 간증한 내용을 집필한 집필자에게 몇 푼 안 되는 돈을 주지 않았다. 과연 올바르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가? 이런 짓을 한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는지
한국 굴지 신앙서적을 낸 출판사는 사역이란 명분아래 맥을 다루는 아가씨들의 임금을 적게 준 것을 일반 공영방송이 안 뒤 방영을 하려다가 누가 뒤를 봐줘서 방영하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 그래 놓고 한국에서 괄목할만한 교회와 특이한 목회를 했다고 자랑하고 있는데 죄송하지만 아니올시다.
심지어 한국의 굴지의 기도원은 어느 기관에 집회를 주도하게 되면 헌금의 일부 중 70%가 기도원에 내야하고 주최한 기관을 30%의 헌금을 가져감에 따라 얼마나 헌금을 짜내는지 과연 올바르게 하고 있는지 성찰해보면 하나님 앞에 고개를 들 인간들이 얼마나 되는가? 겉과 속이 다른 존재들은 아무리 새해가 되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진정 새해를 맞이하는 존재는 겉과 속이 완전히 하나님 형상화가 되어 달라진 모습을 주님 앞에 내놓는 것이 바로 새해맞이 예배인 것이다. 한 부분이 달라진 것을 내놓고 한 해 동안 복을 달라고 하면 그 복을 어떻게 받으려고 하는지 아니 주체할 수 없을 것이다. 본인이 달라지지 않으면 새해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
아무리 세월이 달라진다 하더라도 내 운명은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올해 말 띠가 된다고 해서 말 띠의 운명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짐승이 주는 12지신을 믿고 산다면 차라리 기독교를 믿지 않는 갓이 낫다. 아무리 정확한 예언을 해주는 분이 있어 그 예언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그런 예언이 없다고 할지라도 주님께서 주신 세월에 따라 주님과 함께 한 몸이 되어 연합된 삶을 살아가게 되면 안식이 되며 교환된 삶을 살아가게 된다. 따라서 정월 초하루만이 새해가 아니라 매일 정월 초하루가 되는 것이다. 1월 1일만이 새해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매일 하루하루가 새해가 되는 것이며 정월 초하루가 된다.
주님과 깊은 교제 속에서 새로움을 경험하게 되면 그 날이 정월 초하루가 되는 것이며 1월 1일이 되는 것이다. 이런 것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며 내 삶의 자리에서 형성되어 가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인으로서 가져야 삶의 자세이며 정신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신앙의 본질과 원형이 없이 살아가는 부류는 지구가 끌려가는 대로 세월이 흘러가는 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단순히 새해를 맞이하는 부류는 일반인들과 전혀 다름이 없다. 그러나 진정한 기독교인은 세월에 좌우되지 않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된 살을 추구해야 한다. 세월과 환경에 좌우되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며 능가하는 삶으로 길러져야 한다. 새해라는 의미는 지난해를 건너와서 전혀 다른 새해를 향해 살아가는 것이다.
즉 히브리 민족이란 히브리는 경계를 건너왔다, 넘어 섰다 라는 뜻을 갖고 있는데 엣 것에서 새 석으로, 죄에서, 의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건너온 민족을 의미하고 있다. 애급에서 가나안 땅으로 가기 위해 요단강을 건너는 것처럼 건너가야만 한다. 그래서 천국을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건너가는 것이다. (누 16:26)
지옥에서 천국으로 건너온 존재가 맞이하는 정월 초하루가 새해를 의미하고 있다. 나에게 하루만이 정월 초하루가 될 수도 있지만 매일매일 정월 초하루가 될 수 있으며 이러한 새해를 맞이하는 분들이 매일 매일 일어나고 있다는 뜻에 새해가 되어야 한다. 정월 초하루만이 새해가 아니다. 그런 날을 맞이하는 존재를 축하하는 새해가 올해에 자주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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