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3. 30. 09:25ㆍ좋은 글, 이야기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성경)을 어떤 여건 하에서도 있는 그대로 추호도 가감 없이 옮겨야 합니다. 제도와 설교자의 성별 없는 삶에 약점을 잡히지 않으려고 말씀을 취사선택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교인의 의석수가 줄어든다할지라도 말씀과 상충되거나 자신의 과오를 깨닫게 하는 말씀이라면 회중에게 먼저 자신의 허물을 고백하고 회개하면서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소박하고 솔직한 심성과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칼럼 558호‘그리스도인의 재물관’에서 CD복제본 구입으로 회개한 어느 목사의 실화 참조)
제도교회의 설교는 여러 가지 주제들이 있겠으나 그 중에서도 단연 수위를 차지하는 주제는 마태복음(28:19-20), 마가복음(16:15)과 사도행전(1:8, 16:31) 등으로 기독교인의 절대행위 계명인 <전도>임에 이의를 제기할 교인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치 교회와 기독교인은 전적으로 <전도>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시키려는 것이 요즘 물량주의의 개신교 설교의 주류입니다.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의 신앙생활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먼저입니다. 장로교 교리의 소요리문답의 첫 질문도 ‘사람의 제일되는 묵적이 무엇인가?’에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답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전도자로서의 삶은 입술만의 회개와 성령충만이 아닌 <회개의 열매>와 <성령의 열매>를 맺는 신앙적 삶입니다. 회개의 열매와 성령의 열매가 없는, 전도를 위시한 기독교인의 모든 신앙행위는 위선이며 우상숭배입니다.
물론 전도는 두말할 나위 없이 기독교인들에게 주어진 지상과제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인들의 전도행위가 세인들에게 얼마나 긍정적인 반응을 주고 있는가를 살펴볼 때 긍정보다는 오히려 부정적인 반응이 크다는 현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회개의 열매와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한 전도자들에게는 배타적이며 기복적이고 이기적인 행위가 따르기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지 못하므로 세인들에게 지탄을 받는 것입니다. 전도행위가 면죄부나 고르반일 수는 없습니다.
사도로 선택받고 3년간 헌신적으로 따르면서 수제자로 지목된 베드로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죽음이라도 불사하겠다는 믿음과 순종으로 <신앙고백>을 하므로 예수님으로부터 축복과 칭찬을 받았던 터이었으나 성령의 열매를 맺기 전에는 세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하는 치욕적인 기록을 남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후 그는 회개의 열매와 성령의 열매를 맺고 초대교회의 반석이 되면서 종래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세례요한, 베드로, 스데반, 바울의 설교가 설교의 진수요 요체라고 전술했듯이 그 설교의 내용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너희가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성령을 받아 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의 열매를 맺으라”라고 했습니다. 결코 회개의 열매와 성령의 열매가 없는 <전도>를 명하거나 기록한 성경 말씀은 없습니다.
십여 년 전 모 교회에서 <느헤미야 같은 지도자 되게 하소서>라는 제목의 설교가 있었습니다. 필자는 느헤미야서를 읽을 때마다 느헤미야의 솔선수범하는 모범적인 청렴한 지도자상에 매력을 느끼고 있던 터에 위의 설교 제목을 보고 여느 때와는 달리 자못 기대가 컸습니다. 왜냐하면 IMF 체제하의 경제적 난국을 맞이하여 기독교인들 특히 고위 관리들의 재산 등록 및 봉급 인상 동결이라는 차원에서 경제적인 모범적 지도자상을 갈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문민정치 5년 동안 필자는 기독교인의 한 사람으로 그 분이 장로로서 느헤미야 같은 지도자상을 보여 주기를 늘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경제적 난국에서 보여준 총독으로서의 느헤미야의 지도자상은 국가와 민족을 위한 뜨거운 기도와 회개, 신앙적 개혁보다는 백성의 궁핍한 경제적 삶을 보고 총독의 녹(급료)을, 자기뿐 아니라 형제와 함께 먹지 않음에 있었습니다. (느 5:14) 왜냐하면 기도와 회개, 그리고 개혁은 교회 안에서 상존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생계를 위한 자신의 급료를, 그것도 12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사양한다는 것은 그 모양이라도 보기 힘든 일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한 그리스도인에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느헤미야와 그 형제들의 급료가 얼마만큼 백성에게 도움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보다는 이웃과의 고통분담이라는 차원에서 자기희생을 구체적으로 솔선수범하는 행위야말로 기독교적인 지도자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성경적인 지도자상은 신약시대의 교회 지도자 바울 사도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이방 전도자가 된 후에 전 생애를 복음 전파에 헌신하면서도 목숨까지 걸고(죽을지언정) 지켰던 일은 자비량 선교 사역이었던 것입니다.(고전9:15)
<성경적인>또는 <기독교적인> 이라는 수식어를 쓰는 이유는 성경에서 거론하고 있는 지도자로서의 자격조건 중에 신구약을 막론하고 빠짐없이 제시된 조건은 회개와 성령의 구체적이고 근본적 열매인 경제적 청빈한 삶이기 때문입니다.(출18:21, 딤전3:8, 딛1:7) 사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장관급이라면 현실적으로 급료를 수년 동안 받지 않았다고 해서 굶거나 헐벗거나 노숙을 해야 할 처지에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국민들에게 고통 분담을 권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지도자들의 솔선수범이 바로 성경적인 삶입니다.
구약성경 열왕기에서는 산채로 하늘로 올리어간 선지자 엘리야는 남에게 오병이어와 같은 이적을 베풀면서도 그 자신은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떡과 고기, 그리고 시냇물을 마시고 살았습니다(왕상17:6). 또한 그의 후계자 엘리사 역시 남의 호의를 받고 살면서 한 나라의 군대장관의 문둥병을 고쳐주고서도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면서 나아만이 주는 합당한 예물을 끝내 고사한 것 등을 볼 수 있습니다.(왕하5:16) 설교자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는 것으로 무전무죄, 유전유죄가 성경적임을 유의해야 합니다.(딤전6:10)
한편 세상의 지도자로서 역사적인 인물 중에 민족의 성웅인 이순신 장군도 그의 탁월한 전술보다는 나라와 겨레를 진정으로 사랑한 구체적 행위로서 그의 <백의종군>이 참 지도상이었고 조선왕조의 명재상인 황희 정승도 그의 정치적 재능보다는 <비오는 날 방안에서 우산을 쓴> 청빈했던 그의 사생활에 참 지도자상의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필자는 그 설교에서 IMF 체제하의 경제적 난국에 적합한 교훈으로 느헤미야의 성경적 지도자상이 의례히 설교되어질 것이라 기대했었으나 유감스럽게도 그 부분만(느 5:14) 제외된, 동족을 사랑하는 열심과 회개 자복하는 기도와 동족의 위협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성벽을 중수하는 등의 일반적인 지도자상 만이 설교되어 허전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바울 사도의 자비량 선교나 느헤미야의 급료 반납과 같은 모범적인 청렴한 지도자상이 강단에서 자주 그리고 힘 있게 설교되어 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떤 놀라운 사회적 불상사가 발생하면 설교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남들보다 늦을세라 기독교인들의 책임이라고 외치면서 애국심과 민족애를 위한 강도 높은 회개와 기도를 촉구하면서 말입니다. 아마도 내 자신이 실행할 수 없는 일들이기에 지도자라는 체면을 일부러 손상시키지 않겠다는 의도이기도 하고 지도자로서의 명예와 권위적 위상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성장이라든가 땅 끝까지의 선교적 사명이라는 명제가 성립된다면 하나님의 말씀(성경)을 가감하거나 변질시킬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때문일까?
고 박윤선 목사는 그의 로마서 주석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설교자는 말씀의 청지기로 성경을 온전하게 보수(保守)할 책임이 있고 성경 말씀만을 전파하여 가르치는 것이 그들의 사역이다. 그러므로 말씀을 전파할 때에 설교자의 의견에 맞는 것만 골라서 할 것이 아니고 성경말씀 전부를 전할 책임이 있다(로마서 주석 326P).> 필자는 다양한 설교를 들어 왔지만 느헤미야 5장은 물론이고 이사야서 1장, 에스겔서 33장 등을 주제로 그 내용을 실감할 수 있는 설교를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신구약을 막힘없이 줄줄 외우고, 유머와 해박한 지식으로 성경을 풀이한다고 훌륭한 설교이겠습니까? 설교는 하나님의 뜻을 빠짐없이 전해야 하며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 식의 선별 설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도 본문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 빠진다면 그 설교는 본질이 훼손된 거짓 설교가 됩니다. 아울러 성경적 본질을 이탈하지 않는 설교가 되려면 설교자들의 삶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모범적인 삶이어야 함이 요구되는 당위성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설교자는 자기가 담임하는 교회의 성도 중 가장 청렴한 성도의 삶에 그 생활수준을 맞추어야 하는 결단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설교자는 자기가 설교하는 내용과 어긋나는 삶을 살아서는 설교의 본질이 훼손되기 때문입니다. 일일이 설교의 본질을 훼손하는 사례를 거론하기에는 지면이 허락지 않습니다.‘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 24:35) 하시면서 신구약을 막론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 가감하지 말고 지켜 행할 것을 당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신 12:32, 계 22:18-19)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
칼 럼 필 자 |
이종철 경기 포천 소홀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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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보내주실곳 |
창골산 봉서방카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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