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것은

2010. 4. 28. 11:05좋은 글, 이야기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것은

 

  성경에 “나중”이란 단어가 두 개 나오는데 명사인 te,loj(텔로스)와 형용사 escatoj(에스카토스)가 나온다.

마 10:22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막 13:13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계 21: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요,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명사인 te,loj(텔로스)는 기본어 te,llw(텔로) (제한하다)라는 단어에서 유래 한계로서의 도달점, 행위 또는 상태의 결국, 종착, 결과, 목적, 세금, 지불된 부과금 5411와 비교(마 24:6, 롬 13:7) 시간적인 개념으로 종착점을 말할 수 있으며 존재적인 개념으로서 주님과 한 몸이 되어 성장된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마 19: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막 10:31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마 20:8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 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12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 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눅 13:30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계 1:17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2:8 처음이요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 2:19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형용사 escatoj(에스카토스)는 2192(접근)에서 유래된 단어로 가장 먼, 마지막의, ~의 끝, 마지막, 종일, 가장 낮은, 최고의, (마 19:30, 고전 15:45) 2192 e“;cw(에코) 어떤 시제에서만 사용된 sce,w(스케오)의 변형을 포함함, 직접 간접으로 소유, 능력, 연속, 관계, 조건 같은 소유하다, 동반하다, 간직하다. 보관하다, 붙잡다 (빌 2:29, 히 6:13)

 

  이런 단어적인 문자의 뜻이 나와 있어도 근본적인 의미와 본질을 찾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나 성경 속의 인물 중 먼저 된 자가 있지만 나중 된 자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구약 족장 중에서 이삭이 탄생하기 전 이스마엘이 있으며 야곱과 함께 나온 에서가 있다. 요셉이 등장하기 전에 열 아들이 있어 먼저 된 자들이었지만 구속사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또한 이스라엘 초대 왕이었던 사울 왕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지만 그 뒤를 이은 2대 왕인 다윗은 나중 된 자로서 이스라엘 나라를 다스려 왔다. 앞선 자들은 맏아들이나 아니면 먼저 시작한 이들이지만 하나님의 생명의 근원과 뿌리에서 제외된 것을 의미한다면 귀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처음이라고 해서 맏아들이 되거나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 아니다.

 

  나중이라고 해서 마지막이 되고 끝이 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라는 의미는 무엇이며 나중(마지막, 끝)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먼저 깨달아야 한다. 특히 에서와 야곱의 족장에서 우리는 귀중한 장면을 놓치고 있다. 에서와 야곱은 분명히 존재가 둘이지만 쌍둥이를 의미한다. 그러나 에서의 발꿈치를 붙잡고 나온 야곱과 에서는 한 몸이나 다름없다.

 

   즉 과거 내 안에 있는 옛 사람과 지금 현재 주님과 한 몸이 된 새 사람으로 구분되어진다. 하나님은 야곱을 통해 구속사를 펼치는 장면으로 보지 않고 하나의 신앙위인전으로 봄에 따라 나와 상관없는 설화나 옛날 얘기로 보고 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은 바로 나를 두고 하는 말이요, 일어난 사건도 나에게 암시하기 위해 일어난 사건으로 봐야 한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다시 찾은 아들의 비유가 집 안에 아버지와 함께 했던 맏아들과 아버지의 재산을 갖고 나가 허랑방탕 다 소비한 둘째 아들(원문에는 새로운 아들, 사전 714p, 3501 ne,oj 네오스, new,teroj 네오오테로스)을 따로 구분해서 보는 존재를 의미하지 않고 내면 속에 우리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성경의 사건이 저 멀리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일로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등장하는 인물도 과거의 인물로도 인정해야 하겠지만 나와 연관된 존재로 본다면 성경을 아주 밀접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성경은 전혀 나와 상관없이 보는 책이 아니라 나의 본질과 개념을 찾으며 원형과 뿌리를 찾는 책이다.

 

  따라서 창세기 25장에 나오는 에서와 야곱은 이중적인 인격을 가진 존재로 내면에 내재되어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버릴 수밖에 없는 존재이며 야곱은 장자의 명분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달아야 한다. 야곱이 에서의 장자의 명분을 갖고 외삼촌 라반(표백)의 집에서 머물다가 21년 만에 다시 집으로 되돌아간다.

 

  이동 중에 얍복 강나루에서 천사와 씨름하여 하나님과 싸워 이겼다고 해서 얻어진 이름 이스라엘은 단순히 하나님과 싸워 이겼다고 해서 얻은 이름이 아니다. 하나님을 올바르게 증명하는 것이 하나님을 이기는 것이며 하나님을 올바르게 나타나기 위해 싸움을 하는 자가 바로 이스라엘이란 닉네임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되며 사래가 사라로 이름을 바뀌어 지는 것은 사역 자체가 달라짐에 따라 얻어지는 이름이며 하나님을 나타내기 위한 이름으로 개명되어진 것이다. 게바에서 베드로로, 사울(큰 자)에서 바울(작은 자)로 이름 자체가 달라진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과연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이름을 고쳐야 되는 것일까? 결코 그런 의미가 아니다.

 

  옛 사람에서 새 사람으로 바꿔진 것을 의미하고자 하는 뜻이다.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 만드신 구속의 본질 속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거듭났고 새 사람이 되었어도 실수와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속의 뿌리와 생명의 근원을 멈추게 할 수 없으며 중단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롬 8:31~35)

 

  사울 왕은 기존의 왕들처럼 하나님의 명령보다는 사람들의 눈치와 이목 때문에 그런 정치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윗도 사울을 못지않게 윤리적이나 도덕적으로 치명적인 실수를 했지만 하나님과 사람 앞에 철저하게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치며 다스리는 장면이 나온다. 이와 같이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하나님의 사역과 부르심에 따라 살아가면서 끝까지 견디는 자가 되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옷을 입는 은혜가 없다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으며 처음이요, 마지막인 주님과 함께 한 몸이 되지 못하면 끝까지 견딜 수 없는 존재가 된다. 내가 실수했다고 범죄 했다고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성경에 등장한 인물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먼저 되었다고 자랑하지 말고 나중 되었다고 기분 나빠하지 말라.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포도원 품꾼들의 비유에서 우리는 주변에서 얼마든지 이런 경우를 발견하게 된다. 본인이 어렵게 알게 된 내용을 가르치면 받아들이는 너무나 쉽게 배우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이럴 때마다 불공평하게 느끼기도 하며 억울한 감정이 생길 때도 있다.

 

  그러나 우리들보다 먼저 앞선 신앙 선배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내용들을 쉽게 깨닫게 된 것이라면 그런 감정들은 사라져야 한다. 먼저 된 것이 무엇이며 나중 된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처음이 되어야 하며 마지막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알파와 오메가라는 단어보다 알렢(א 배우는 존재)과 타우(ת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존재)라는 단어가 더 정확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마 11:29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주님 한 몸, 쌍둥이가 되어서)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마지막에 견디는 존재)을 얻으리라는 말씀의 의미를 깨달아질 것이다.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 

 

 


 

 

 

    

 글   쓴   이

 이준호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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