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입히신 가죽옷은 어떤 옷인가?

2010. 11. 16. 11:43좋은 글, 이야기

하나님께서 입히신 가죽옷은 어떤 옷인가?

        

 

        창세기 3장 21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아래 우리 인간들에게 베풀어 주신 행동으로 그 어느 누구 감히 항변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너무나 귀한 은혜로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아마 대부분 가죽옷을 입히셨다면 어느 짐승을 잡아 털가죽 옷을 지어 입히셨다는 근거로 양이나 소라는 등, 아니면 다른 짐승의 가죽이라고 짐작하며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어느 짐승을 잡아 죽이고 난 뒤 취한 가죽옷이라 하여 하나님께 제단을 쌓아 그 짐승을 제물로 삼았다고 하는 것을 공공연하게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얼마나 무식한 것이 드러나는 것을 모르고 계속 전하고 있다면 과연 하나님 앞에 가서 무엇이라고 변명을 하려는지 알 수 없다. 과연 우리의 추측으로 짐승의 가죽옷일 수 없다는 것보다 가죽옷이라는 심증을 굳힐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니 육체가 없다는 이유로 짐승의 가죽옷이라고 못 박을 수 없다.

 

    그러나 에스겔 16장 8절에 보면 “내가 네 곁으로 지나며 보니 네 때가 사랑스러운 때라 내 옷으로 너를 덮어 벌거벗은 것을 가리우고 네게 맹세하고 언약하여 너로 내게 속하게 하였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내 옷이라고 지칭한 말씀을 의미를 올바르게 감지하지 못하면 성경 전체를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몸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 그러나 자신의 몸을 찢어 옷을 만들어 우리의 벌거벗은 것을 가리게 하시려고 입히셨다면 그 옷은 짐승의 옷이 아니라 하나님의 옷이다. 즉 자신의 몸을 찢어 만드신 보배로운 옷이라고 한다면 나의 죄 때문에 벌거벗은 것을 가려 주시려고 입히신 옷을 다시 한 번 상기하자.

 

    창세기 3장에 등장하는 아담과 하와가 바로 내 자신이라는 점을 감안하지 않고 성경을 읽게 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글을 읽는 나의 죄를 가려 주시려고 직접 옷을 만들어 입혀 주셨는데 그 옷이 짐승의 옷이 아니라 하나님의 분신인 자신의 몸에서 찢어 만들어 주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을 지금까지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인데 오늘날 내 삶 속에 가산이 증가되며 자녀가 잘 되고, 생활의 풍요로움이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울 뿐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예수께서 강조하셨는데 무엇인가?

 

    요한복음 5장 17절에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면서 하나님의 일을 내가 한다. 죄송하지만 그 일을 흉내도 낼 수 없다는 것을 왜 모르는지, 그러면서 그 일을 한다고 목회나 선교를 한다고 자부하지 말라. 내 몸을 찢어서 다른 사람에게 입혀 줄 수 있을 만큼 그렇게 너그러운 사람인가?

그 어느 누구도 그렇게 한다면 내가 죽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만 하나님께서 내 죄를 덮어 주시고자 자신의 몸을 찢어 가죽옷을 입혀 주신 것, 하나님께로부터 탕감 받은 긍휼하심을 자랑하는 것뿐이다. 야고보서 2장 13절에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는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내 죄가 그렇게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총아래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은 골 3: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라는 말씀처럼 긍휼의 옷을 입게 된 것이다. 만약에 이 옷을 입지 않게 된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마 22:11~14절에서 보는 것과 같이 예복을 입지 않고 잔치 집에 들어온 것이다. 예복은 외국 파티에는 제비 복이나 다른 외국에서는 예복이 따로 있다. 그런데 그 옷을 입지 않고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본다면 하나님께서 친히 만들어주신 가죽옷을 입지 않고 벌거벗은 채로 들어온 것이다.

 

   그 결과는 “사환들에 말하여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바로 무서운 심판인데 이것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면 진정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말씀 속에 입었다는 말에 주의해야 한다.

슥 3:3~5

3.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는지라.

4.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5. 내가 말하되 정결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천사는 곁에 섰더라. 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하시고자 지금까지 동분서주하시는 것이다.

 

     그 일을 함께 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동안 무덤 속에 함께 장사지내었다가 함께 부활하시어 부활의 옷을 입혀 주신 것을 몸소 보여주신 분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속사이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향한 사랑의 근본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래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사람에게 옷 입혀 주시는 사건을 보여주시고자 그렇게 장대하게 써 놓으신 것이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흰 옷 때문에 흰 옷을 입고 집회하는 이상한 단체도 있는데 정확하게 원문적으로 한다면 너무나 빛나고 밝은 옷을 의미한다. 색깔로 표현하니까 하얀 옷이라고 한 것뿐이다.

 

    계 22:14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함이로다.”는 말씀이 생명나무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며 하나님과 함께 한 몸으로 이루어진 옷을 입은 은혜를 증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제 벌거벗은 채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살아가지 않을 것인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얼마나 치부를 드러내며 살고 있는지 나 자신을 돌아보았으면 한다. 롬 13: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롬 15:17~18, 고전 15:58, 고전 16:10, 요일 3:8, 계 2:26~27, 고후 6:1,

 

    영국 청교도들이 미국 땅에 들어가서 헐벗고 굶주려 추위에 떨고 있을 때 인디언들이 먹을 것과 입을 것뿐만 아니라 잠자리까지 마련해 주었다. 그런데 그들을 2억 이란 숫자의 인디언들을 죽이고 학살했다면 과연 무엇이 기독교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한국 땅에서 청교도운동을 일으켜야 하는가? 아니면 진정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에 동참해야 하는가? 기독교의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지 아니면 성경의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지에 분별을 해야 할 것이다. 혼란스러울 것이 전혀 없다. 기독교가 저질러온 만행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벌거벗은 채로 돌아다니고 있다면 분별해야 한다.

사 63:2~3

2. 어찌하여 네 의복이 붉으며 네 옷이 포도즙 틀을 밟는 자 같으냐?

3. 만민 가운데 나와 함께 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 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으로 말미암아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튀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

 

     이제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지 아셨으면 우리가 할 일이 어떤 것인지 우리 눈에 보이는 헐벗고 굶주린 사람도 찾아가서 입히고 먹이고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 그런 사람들보다 영적으로 벌거벗고 돌아다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득시킬 것인지 무엇을 전할 것인지 올바른 대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라는 뼈대 위에 발라진 헬라사상과 철학, 로마문화, 각종 잡다한 것들이 덧입혀 져 있다. 이것을 걷어 내지 않고 그대로 성경을 읽어나간다면 그리고 잡다한 기독교의 서적들을 보게 된다면 과연 기독교는 어떻게 될 것인가? 심지어 교회 안에 행해지는 워십이 진정 어느 사상과 문화에서 흘러왔는지 살펴봐야 할 것이다. 성전 안에서 춤을 추었는지 성전 밖에 췄는지 성경에서 살펴본다면 다시 고려해 봐야 할 것이다.

 

     전통과 교리를 운운하지 말고 성경이 말하려고 하는 내용 그대로 전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이제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몸을 찢어 만들어 주신 옷을 입었다면 이 옷을 빠는 행동을 주저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옷을 빠는 것이나 그 옷 자체가 성도의 행실이라고 했는데 나의 노력과 분투를 의미하지 않는다.

 

    옷을 빠는 것이 그 옷을 더럽히지 않고 청결하게 입는 것을 의미한다. 성도의 행실이 무엇을 하는 행위로 이해하기 때문인데 사실은 신앙적인 행동강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전달하며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과 행동이 수반된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하는 것이다.

 

      이제 겨울이 다가와 추위가 몰려 올 것이다. 옷깃을 여미는 계절에 옷을 입지 못하고 돌아다니는 벌거벗은 사람들, 아니 벌거벗은 임금님이라는 동화에 나오는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다니는 허황된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만들어 주신 옷을 입혀 주는 계절이 되었으면 한다.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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