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목회자의 삶

2011. 2. 14. 11:59신앙간증

 어느 목회자의 삶

            보내신분/"김진호" kjh-0503@hanmail.net

                 신학교시절 쌀 없어 애들 밥 굶길 때 매번 몰래 쌀포대 주시던 분입니다.

    안녕하세요.. ^^ 저는 지금 어려운 형편이지만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면서 언젠가는 다가올 삶의 새로운 변화를 갈망하며 작은 희망을 이어가고 있는 27살 ‘윤소라’라고 합니다. 현재 저는 충남 아산시 둔포면에 속한 어느 작은 시골 동네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저희 집이 아닌 고모 댁입니다. 지금의 이곳에 오기까지도 저에게는 많은 시련들이 있었습니다. 저의 고향은 대전 변두리에 있는 시골마을 탑립동이었습니다. 지금은 대덕 밸리가 들어서서 아파트와 공장들로 제 고향의 흔적들이 남김없이 사라졌습니다.

 

    저희 부모님께서는 그 시골 교회의 부부집사님으로 봉사하셨고, 저는 그 고향교회에서 성장하여 피아노 반주를 하며 기쁘게 하나님을 찬양하며 지내왔습니다. 제가 고등학교에 들어간 시절, 마침 IMF가 닥쳐와 부모님의 스포츠용품점과 골프연습장 사업이 부도가 나면서부터 인생의 고난은 찾아왔습니다. 아버지께서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신학을 이미 시작하셨으면서도 계속 사업에 매달렸지만 이젠 더 이상 피할 수 없다고 하시면서 늦었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목회의 길을 걷겠다고 뒤늦게 후회하시며 사채업자들의 협박과 횡포를 피해 한 밤중에 집에서 뛰쳐나와 가족들과 함께 대둔산 골짜기의 작은 기도원에 원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낮에는 학교를 다니시면서 기도원 일을 도우며 예배를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나 학업을 중단할 수 없었던 저와 제 남동생은 이모님 댁에서 지냈습니다. 당시 이모께서도 갑작스레 저와 제 동생을 떠맡아 경제적으로, 또한 가정적으로 많은 어려움 가운데서도 저희를 따뜻이 돌보아 주셨습니다. 하지만 저와 동생은 서로 어려운 상황을 잘 알기에 작은 피해라도 끼치지 않으려고 목이 말라도 소음을 내지 않으려고 꾹 참았고, 화장실을 가고 싶어도 오랫동안 참았다가 다녀오곤 했습니다. 밤이 창문으로 깊이 찾아들면 동생과 저는 잠들지 못하고 왜 이런 가시밭길이 찾아 왔는지 부모님이 너무나 보고 싶어 깊은 시름으로 밤을 지새우거나 이불속에서 숨죽이고 울다 잠이 들 때도 많았습니다.

 

    그때부터 동생은 사람의 눈치를 많이 보기 시작했고, 남에게 피해주는 것은 사소한 것이라도 싫어했습니다. 아침마다 먹은 밥이 소화가 안 되어 학교에 도착하면 토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때부터 전 위경련을 동반한 위장병을 앓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 저와 동생은 잘 보살펴주시던 이모님 댁에서 나와 친척들이 마련해주신 유흥가의 한 상가 건물 집에 들어가 살았습니다. 그곳은 밤만 되면 무서운 곳이었지만, 동생과 함께 꿋꿋이 살림하며 살아갔습니다. 그런데 부모님께 빚을 가지고 계셨던 분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학교로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계속되는 정신적 고통과 아픔으로 제 고교 시절은 자신감 상실과 우울함의 연속이었고 돈도 없이 지내다보니 친구들과 잘 어울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당시 피아노를 가르쳐 주시던 스승님 권유와 여러 가지 도움으로 음대에 피아노 전공으로 입학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새로운 나의 삶을 위해 노력할 수 있었고, 스승님과 반년 이상의 고된 합숙훈련 끝에 대전에 위치한 한 정규 4년제 대학교에 피아노 전공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때마침 아버지께서는 청주 수곡동의 작고 예쁜 지하교회의 담임교역자로 초빙 받아 가시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의 형편으로는 집을 구할 수가 없어서 삼촌의 도움으로 11평짜리 단칸방 집을 구했습니다.

 

 

     처음엔 너무 작아 숨 막히고 비좁았던 곳이었지만, 지금 와 생각하니 그곳만큼 편안했던 곳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일 년이 지나자 저희를 초청하셨던 두 권사님들께서 교회가 부흥이 안 되었다며 우리 가족을 다시 돌려보내려고 하셨습니다. 그나마 일 년을 지나며 열 명 가량의 성도님들과 함께 작은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던 저희 가족은 갑작스런 두 권사님의 요구에 돌아갈 곳이 없다고 사정하고 매달렸습니다. 권사님 가족은 저희를 초청해 놓고는 곧 다른 교회로 옮기셨기에 아무도 없는 가운데 겨우 일 년간 열 명의 성도님들과 함께 다정다감한 작은 교회를 일구었는데 일 년간 겨우 열 명이 뭐냐며 저희가 나가지 않으면 교회의 모든 물건을 다 가져가겠다고 하셨습니다. 저희는 일 년만 더 기다려 지켜봐 달라 하였지만, 결국 그 권사님들께서는 교회 보증금 천만 원과 앰프, 에어컨을 포함한 모든 성물들 및 식당 숟가락 하나까지, 바닥 장판까지도 다 떼어 가져 가셨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대로 교회를 없애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시면서 여기저기 호소하여 우선 할머니의 씨앗헌금 250만원으로 보증금을 넣었고 그 대신 월세는 25만원에서 35만원으로 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교회 성물과 시설들은 하나도 없어서 교회 성도님들과 우리 가족은 어둡고 축축한 지하 시멘트 바닥에 스티로폼을 몇 장 깔고 앉아 눈물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도 대전 전민동에 있는 평안침례교회가 강대상을, 대전 회덕침례교회는 여러 성구와 일용품을, 청주 풍성한침례교회도 장의자를, 그 밖에 여러 교회에서 커튼과 가구, 시설 등을 보내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전 고향교회인 탑립동 새소망침례교회는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시고 매월 10만원의 선교헌금을 지금까지도 보내주고 계십니다. 저희 교회의 모교회인 청주 중부명성교회 목사님도 금요철야예배에서 만나시고는 꼭 찾아와 달라고 하셨지만 아버지는 인사도 제대로 못 드린 상태에서 손을 내밀기 부끄럽다고 하시며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주위의 많은 분들의 도움과 기도로 마침내 우리 교회는 2년을 지나며 저희 교회가 교회다운 모습을 다시 찾아갔습니다.

 

    열심히 전도를 하며 교회 성도님들도 점점 생겼고, 출석교인 50명에 적어도 30명 이상은 교회에 꼭 출석하는 훌륭한 성도들이 되어 갔습니다. 그런데 교회성도들이 대부분 신입교인들이다보니 양육을 함에 있어 많은 문제들이 생겼고 결국 성도들끼리 서로 패를 갈라 싸우기 시작하더니 이런 저런 사유를 들어 한명씩 교회를 떠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대학교에 갓 입학했던 제 동생은 그 일들로 상처를 받아 다니고 있던 대전 목원대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하며 혼자 알바하며 근처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성도들이 물이 빠지듯 쑥 빠져나갔습니다. 그리고 3년이 지나자 우리교회는 설립 5년 만에 결국 권찰님 가족과 할아버지 두 분, 할머니 한 분 등 우리가족 포함하여 10여명만이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동생을 붙잡을 기운도 빠져버린 부모님과 저의 가슴도 아픔으로만 남았습니다.

 

 

     제 대학 생활도 다시 어두워져 갔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꼬깃꼬깃하게 접힌 천 원 한 장의 헌금도 제게는 눈이 새 빨게 질 정도로 감동이었습니다. 대학교 기숙사 생활을 할 때면 굶기도 다반사였습니다. 가난이 너무나도 원망스러웠죠. 음악과의 학생 중 80-90%는 정말 부유했습니다. 제게는 그들과 어울릴 수 없는 또 한 가지 난제였습니다. 그렇게 일 년의 시간이 흐르며 교회는 조용해 졌고 저희 가족은 점점 지쳐 갔지만 남아계신 성도들과 할아버지, 할머니들과 함께 즐겁게 예배도 드렸고 날씨가 좋으면 야외에 나가 오후예배를 드리곤 했습니다. 그 순간들이 가난하고 어려웠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음을 지금에서야 깨닫습니다.

 

    교회설립 후 6년 반이 지난 2010년 1월에 우리 가족은 청주의 교회를 후임 전도사님께 인계해 드리고는 천안의 성정동에 위치한 한 교회건물을 친척들의 마지막 도움으로 보증금을 마련하여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천안으로 이전하게 된 동기는 고모님이 아산시 둔포면의 시골에 노인요양원을 설립하셨는데, 요양원 운영 경험이 있는 아버지께 시설장으로서 운영과 원목으로서 예배를 드려줄 것을 간곡히 여러 번 부탁하셨기 때문에 거절치 못하시고 요양원과 가까이 있는 교회를 찾게 된 것입니다. 그때 마침 교단 어르신 목사님이 본인 교회를 보증금만 마련하여 들어오라 하셔서 모든 성물과 시설을 감사하게도 그냥 물려받게 된 것입니다.

 

     7년 만에 지하에서 나오게 되었다고 부모님께선 행복해 하셨고, 저도 힘을 내어 청소하고 장판과 도배를 하여 최선을 다해 교회와 방을 예쁘게 꾸몄습니다. 교회 바로 앞은 천안 서부역 맞은 편이다보니 모텔들과 유흥가들의 천국이었지만 그래도 저희 가족은 꿋꿋이 그곳에서 전도하며 고모댁 노인요양원을 돌보며 지냈습니다. 그리고 청주에서부터 저희가족이 신경 쓰며 돌봐드렸던 한 할아버님께서도 같이 천안까지 따라와 주셨습니다. 유흥가에서 술에 잔뜩 취해 예배시간에 와서 소리 지르는 분들도 많았고 낮에 걸어 다니기도 무서운 사람들이 많았지만, 전 기도하며 꿋꿋이 살려고 노력해왔습니다. 그러나 제게 언제부터 우울증이 이토록 쌓여왔는지..

 

    천안에 살면서부터 그 우울증은 드러내졌고 나타나졌고 전 매일 온종일 눈물로 살기 시작했습니다. 정착하며 살지 못하고 방황하던 탓도 있지만, 모든 기운이 빠지고 머릿속이 하얘진 저는 피아노조차 칠 수 없었고, 피아노학원도 제겐 어울릴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우울증으로 자살을 한번 생각해보았던 저를 발견하고 나서는 그동안의 고통들이 이렇게 역방향으로 분출되는 것인가..하여 너무나 무서웠고 이것을 고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하지만 들쑥날쑥한 저의 이 병은 도무지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상황은 절 똑같이 만들어 주었죠.

 

    부모님께서는 유흥가의 천국이었던 밖에 함부로 나가지 못하게도 단속하셨습니다. 그렇게 고통스러운 굴레 속에서만 지내오다가 자신감조차 없는 저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도 보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이 목회하시는 것을 왜 제가 함께 책임을 져야 하는지 저는 혼란스러웠습니다. 독립을 생각하였지만, 도저히 부모님의 힘겨운 뒷모습을 저버리고 돌아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청주에서부터 3년 이상을 함께해 오신 할아버님께서 저희 가족에게 살 집과 교회를 마련해 드리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저희 가족을 그동안 지켜보셨고 그리고 이젠 때가 되신 것 같다며 교회와 집을 지어드리겠다고 교회를 지을 장소까지 알려주셨습니다.

 

 

    저와 부모님은 너무나 감격하여 약속의 날이 올 때까지 더욱 힘내어 기도하며 삶에 대한 의지로 미래를 주님께 드릴 마음을 가지고 살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의심도 들었지만 돈이 한 푼도 없는 저희가족은 어차피 손해 볼 것이 없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의심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의심하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약속의 시간이 다가올 때 즈음, 교회 건물이 있는 곳의 땅주인이 땅을 팔았기 때문에 건물을 철거해야 하니 교회를 비워달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1월에 교회를 이전해서 10개월 만에 또 이전을 해야 하는데, 마침 그분의 약속하신 날짜와 교회를 비워줘야 할 날짜가 같아 일정이 딱딱 맞아 들어갔던 이 일들은 하나님의 축복이 아닐 수가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저희 가족은 기쁨과 감사함으로 옛날의 모든 짐들을 비우고 몇 가지의 가구들과 옷들만을 준비하였고 교회의 모든 성물들과 피아노까지도 다른 교회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교회건물과 집이 완공되었다는 약속의 시간이 다가온 그 날, 저희 가족은 어느 때보다 단정하게 신경 써서 옷을 입고 할아버지의 연락을 기다렸지만, 할아버지는 그날 핸드폰을 해지하셨고, 저희 가족은 그 하루를 초조한 기다림과 간절한 마음으로 이 일이 헛되지 않길 위해 기도하면서 보내었습니다. 그러나 다음 날도, 또 그 다음날도 그분은 오시지를 않았습니다.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희가족은 새벽마다 낮에나 밤에나 늘 기도하면서 말씀을 따라왔고, 저희에게 거짓말을 한 할아버지를 우리는 진심으로 사랑하면서 돌봐드렸으며, 또한 함께 지역 주민들에게 전도하고 도움을 줄 수 있는 대로 베풂에 있어서도 봉사에 함께 동참하셨던 그분이셨는데, 그러한 분이 이렇게 하리라고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저희 가족을 무너뜨려 이익을 가질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3년 이상을 돌보아드리며 재워드렸고 먹여드렸습니다. 저희 아버지께서는 특히 위장이 많이 좋지 않으셨던 할아버지께 많은 정성의 손길로 돌보셨습니다.

 

    제 작년, 성탄절예배를 드리는 중에 갑자기 빈혈로 쓰러지신 할아버지를 업고 병원으로 뛰어가셨고, 새벽에도 배가 아프시다는 할아버지의 연락에 바로 찾아가 응급실로 모셔갔었습니다. 하지만 그 대가는 저희가족에게 깊은 아쉬움을 남겼고, 믿음의 생활을 지켜온 우리는 이 세상에 누구라도 포기할 사람은 없다고 믿었던 그 신뢰감이 허물어지는 아픔이었던 것입니다. 혹시나 해서 찾아간 그곳에는 그 장소에는 아무것도 없는 공터들 뿐 이었습니다. 그래도 긍정적이신 저희 아버지는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하시며, 할아버지를 전혀 원망하지 않으셨고, 저희 가족은 오갈 데 없이 당장 나와야 해서 그간 아버지가 시설장과 원목으로 일을 돕고 있었던 아산 둔포면에 요양원에 와있습니다. 갈 곳이 없어서, 집이 없어서, 고모님 댁 1층 방 한 칸에 부모님과 제가 함께 쓰고 있습니다.

 

    저는 정말 지칠 만큼 지쳤고,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왜 이토록 고통이 끊이지 않는지, 하나님이 너무나도 원망스러우면서도 원망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태어났을 때 부터 저를 지켜봐주신 하나님이 이토록 제게 잔인하신 분이셨는지 제가 그만큼의 커다란 죄만을 지으며 살아온 것인지, 저에게는 예배의 의미도 잃어버린 지 오래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여기저기 교회를 알아보고 계시지만, 곧 군대에서 전역하는 남동생까지 저희 가족이 함께 살려면 방이 3칸 달린 사택이 있어야 하는데 어쩌다 그런 곳이 나오면 금액이 너무 커서 감히 엄두도 낼 수 없었습니다. 천안 교회를 나올 때 모든 성물과 시설들을 이웃교회들에게 다 나누어 주고 아무것도 없는 저희 가족이 막상 다른 교회를 들어가자니 교회의 시설비도 겁이 납니다. 얼마 전 제가 이 근처의 공장일이라도 하겠다고 나섰지만 부모님은 곧 하나님이 다른 곳으로 보내 주실 거라며 잠깐 기다리라 하십니다.

 

   고모님 댁에서도 곧 나가야될 형편입니다. 이 방을 저희가 쓰고 있기에 다른 어르신들을 요양원에 모시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죠. 아버지께서는 부사역자로도 갈 곳이 없었습니다. 나이가 50 중반이 되어 가시면서 이 시대 교회들은 부사역자마저 뽑는 눈높이는 최고 학력과 젊은 나이를 요구하고 있으니까요. 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정말 목사님이시다 정말 목사님이시구나 하는 목사님을 뵌 적이 없습니다. 그럼 그렇지 하는 목사님들밖에 본적이 없습니다. 일요일마다 이곳 고모께서 운영하시는 요양원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일요일 아침마다 CBS나 CTS를 켜시는 어머니가 싫었습니다. 보면 모두 번쩍번쩍 큰 교회 예배당에 제가 어렸을 때부터 좋아하였던 성가대의 굉장한 찬양소리.. 성도들 사람들은 넘치고 많고.. 말씀 잘하시는 목사님들까지.. 그런 모습을 보면 전 더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냥 그곳은 근처도 갈 수 없을 대단한 곳 같았습니다.

 

     그때 CBS의 교회후원 광고를 보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우연히 듣기만 하였는데, CBS의 후원광고로 인해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다는 한 전도사님의 영상을 보았습니다. 왜 우리는 그런 운도 없는 걸까? 하며 아버지께 여쭈어보니 저희 아버지께서는 어려움 때문에 후원을 바라고 목회한다면 그건 주님이 원치 않는 것이니 어려움을 통해서 욥처럼 연단 받아 더욱 인격자가 되고, 기도의 능력자가 되고, 말씀을 잘 준비하여 주님께 실망 끼치지 않는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고 차분히 말씀하시더군요. 그래서 저라도 한번 알아봐야겠다고 하고 알아보았지만, CBS홈페이지에는 그런 곳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홈페이지의 중보기도라는 곳에서도 제가 글을 적을 곳은 없었습니다.

 

    며칠 전, 저희 가족은 이곳의 근처에 있는 아산시에 있는 시골교회를 가보았습니다. 교회 담임목사님께서 직접 건물도 세우셨고 20-30평정도 되는 예배당과 2층에는 가정집이 있습니다. 담임목사님의 연세가 74세가 되시면서 기운이 없으셔서 후임 목회자를 찾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직접 찾아 가보신 부모님은 그곳이 마음에 드셨습니다. 교회예배에는 마을에 계시는 할머님 권사님 몇 분이 계신다고 합니다. 담임목사님께서 앞으로 사실 거처하실 아파트의 돈만 마련해 드리면 교회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 금액은 8천만 원입니다. 저희가족에게는 역시 감히 바라볼 수 없는 비싼 돈입니다.

 

     또한 당장 떠나시는 목사님의 작은 아파트 한 칸을 마련해 드리는 부분이기에 돈을 매달 나누어 드릴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평생 일구어 오신 교회를 떠나시는데 교회로서도 아무런 노후대책도 없이 보내드리는 것은 도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현재 성도님들은 나이 드신 어르신 몇 분과 가난한 농촌 두어 가정밖에 없어서 더욱 안타깝기만 합니다. 부모님께서는 시내의 교회들 보다 더 마음이 와 닿으셨고 편안하셨는지 그 곳을 위해 기도를 하십니다. 부모님도 이젠 남으신 여생을 그곳에 정착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셨고, 저도 이제 부모님의 정착되신 모습을 보고 나서야 제가 마음껏 하고 싶은 일을 시작하면서 다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제 저희 가족은 고모님 댁에서 가능한 한 3월 전에 나와야 하는 형편입니다. 그냥..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기에... 그 한가지의 이유만으로 저는 오늘도 기도만 하고 있습니다..  후원이라는 마음의 글은.. 어쩌면 지금 정신적으로도 물질적으로도 크게 상실되어 가고 있는 제게 큰 부담이기도 합니다. 어쩌다 이렇게 무능력하게 후원을 요청할 수밖에 없게 되었는지 낙심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저를 위해 중보기도를 해주신 분들이 계셨고, 방법은 있다고 말씀해주시는 분이 계셨기에.. 수없이 고민되었던 저의 마음을 돌려 후원이라는 마음의 글을 적습니다.

 

     분명히 마음으로도 저를 후원해주시는 분들이 계시리라 저는 희망을 가져봅니다. 저희 교회의 예장개혁 교단에는 저희 교회만큼 힘든 목사님들도 많이 계시지만, 부유하신 목사님들도 계십니다. 하지만 저희 아버지의 사정을 알고 계심에도 외면을 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어차피 그 분들께 바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허황된 바램이지요. 모든 상황을 알고 계시는 부유하신 분들마저 외면하는데 후원이라는 글이 정말 성도님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가 있기나 할까 하는 의심에 의심이 꼬리 물었지만 얼마 전 저희 가족의 상황을 아신 한 목사님의 지인께서 저희 가족에게 냉장고와 온풍기, 에어컨을 보내셨습니다.

 

     비록 그분의 집에서 쓰셨던 중고의 제품들이었지만 저희 가족에게는 그간 그렇게 큰 선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결심을 하고 이렇게 제 마음의 글을 읽어주실, 읽고 기도와 마음으로라도 후원을 해주실, 아니면 정말 물질적으로 후원을 도와주실 분들을 찾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이 현실이 끔찍합니다.. 제 생활을 다시 개척해보려고 독립을 생각하려고 하니 부모님께서 우십니다. 지금 당장 제가 나가면 안 된다고요.. 마음이 저려오는 저는 오늘도 절망 바닥끝을 생각해보았습니다. 그것도 주일마다.. 승리해야 한다는 주일마다 ‘숨을 쉬며 살기가 힘들다’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른 분들의 기도는 하나님이 들어주시겠지요..? 그 하나님, 그래도 저도 다시 믿고 싶으니까 믿고 싶어서 이렇게라도...

 

    저는 지나치는 아파트를 보아도 가슴이 저려 눈물이 나옵니다. 버스 안에서 혹시 누가 보기라도 할까 눈물이 새어나오는 것을 이를 악물고 참습니다. 이제는 밤마다 숨죽여 우는 제 눈물의 비릿한 냄새와 맛도 지겹습니다. 긍정적인 생각해봐도 현실을 직시하라고들 합니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친구들이 저를 더 위로해 줍니다. 저는 정말 정착하며 살아보고 싶습니다. 제발 한번만이라도... 어떤 일이든 다 닥치는 대로 해보면서 정착하고 싶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이 후원을 통해서 제게 어떤 기적을 주실까요..? 희망의 빛을 품게 해주실까요? 전 그런 희망을 또 품어보려고 애씁니다. 저는 다시 살고 싶습니다. 제 꿈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올려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저는 저의 후원제단을 만들고 싶고 지금 이 시대에 고통 받으며 울부짖는 저와 같은 고통을 겪는 믿음의 형제자매들에게 기도와 물질과 격려로 후원과 꿈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 주위의 방황하는 목회자 자녀들을 많이 봅니다. 정말 그 방황의 끝을 모를 정도로 지친 친구들을 많이 봅니다. 이 현실이 싫습니다. 축복받아 항상 하나님의 사랑과 따뜻함이 뿜어져 나와야하는 목회자 자녀들의 얼굴에 잿빛의 그늘진 얼굴이 많습니다. 몇몇 꿀과 기름이 흐르는 기름진 친구들이 있습니다. 알고 보니 20살부터 외제차를 끌고 다니며 해외여행을 자주 다니는 부유한 목회자 자녀들이었습니다. 목회자마저도 잘사는 사람은 평생 잘살고 못사는 사람은 평생 못사는 이 한국 기독교의 왜곡된 현실이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제 꿈은 제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되어 성공하게 되면 꼭 후원재단을 만들어 이 현실 속에서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목회하시는 목회자님들의 가정과 믿음의 가정들에게 후원을 하고 싶습니다.

 

      지금은 피아노를 치고 싶어도 피아노도 제 곁에 없어진지 오래되었고 대학원이라도 진학하여 더 배우고 싶어도 갈 형편도 안 되고 하여 눈물만 흐릅니다. 지금의 제겐 사치일 뿐이겠죠? 현 상황에서는 제겐 도전할 용기도, 희망도, 형편도 못됩니다. 성도님들의 후원 속에서.. 저희 교회를 다시 세울 수만 있다면.. 주님의 교회를 아름답게 세우실 수만 있다면.. 부모님께서.. 이제 눈물의 시기에서 후원의 손길로 일어서실수만 있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제겐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저희 아버지를 도와주세요. 저희 아버지는 자신의 아픈 신음소리조차 내지 않으시는 강하신 분이십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조그마한 신음소리도 크게 걱정하시며 위로하시는 기도하시는 따뜻한 분이십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도 어쩌다 텔레비전의 후원모금 광고가 나오기라도 하면 눈시울이 붉어지시며 만원이라도 후원하시려고 전화기를 찾으시는 분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께서는 그 곳 시골교회에서 목회사명감으로 남은 생애를 바치셔서 나이 드신 성도님들과 어려운 마을 주민들을 도우며 목회의 길을 걷고 싶어 하십니다. 그리고 부모님께서는 할 수만 있다면 다문화가정센타, 아동지역센타 등 복지시설을 통하여 남은 생애를 바치시며 주님의 일에 앞장서 봉사하고 싶어 하십니다. 부모님께서 남아있는 모든 힘을 다해, 주님의 이름으로 봉사하시는 열정은 그 누구보다 뜨겁고 아름답습니다. 저는 다시 한 번 희망이라는 그 아름다운 마음을 품어봅니다. 기도와 마음으로 후원을 해주시는 성도님들께도 큰 감사를 드릴 것입니다.

 

     2011년 성도님들께 하나님의 사랑과 큰 은혜가 가득 넘쳐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이 글을 읽어주신 모든 성도님들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윤尹재봉 목사님의 1남1녀 중 장녀 윤尹소라 올림-

윤소라. 침례신학대학교 교회음악과 피아노졸업

 


 

 

╉현재 거주하는 곳 : 충남 아산시 둔포면 봉재리 446-3번지 행복요양원 옆 2층 건물의 1층

╉기도하는 교회의 장소 : 충남 아산시 음봉면 삼거리 2구 예수사랑교회

 

╉교단 : 대한 예수교 장로교 (개혁)

╉목사님(윤재봉 목사님)의 핸드폰 번호 : 010-6599-0688

╉사모님(남형자 사모님)의 핸드폰 번호 : 010-9167-0117

╉집 전화 번호 : 070-8227-06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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