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9. 28. 10:19ㆍ좋은 글, 이야기
감히 엄두를 낼 수 없는 땅을 향하여
여호수아서를 읽다보면 누구든지 갈 수 있는 땅이 아니다. 누구든지 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함부로 밟을 수 없는 땅이다. 출애굽을 인도한 모세마저도 갈 수 없었으며 눈앞에 두고 자신의 사명을 마감한 존재였다.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모두 다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닌 것을 분명하게 깨닫게 하는 책이다.
여호수아서는 모세 사후 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인솔하여 요단강을 건너 언약의 땅 가나안에 입성하게 된다. 그러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쉽사리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가나안 땅의 토착민을 물리쳐야만 했고 거주 지역성을 점령한 후 12지파가 거주할 수 있는 땅을 제비로 뽑아 분배한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여호수아는 광야의 노정에서 아말렉 싸움에서 장수로 출전하여 대승을 이끌어 낸 인물이다.(출 17:9~10) 처음 이름은 호세아였는데 여호수아와 같은 의미를 갖고 있으며 구원의 주로 헬라어 발음으로는 예수라고 불리는 이름이다. 전형적인 예수의 모형으로 여기는 인물로서 본받을 점이 많다.
모세로부터 신임을 받은 용기와 담력을 가진 용사였다.(출 24:13) 가데스바네아에서 가나안 정탐꾼의 일원으로 뽑히고 갈렙과 함께 신앙적인 보고로 인해 다른 정탐꾼의 불신앙적인 보고를 배격했다. (민 13:8, 14:6, 9) 차후에 하나님에게 택함을 받아 모세의 후계자로 임명된 경건의 사람이다.(민 27:18~23)
이스라엘 백성을 애급에서 가나안 입구까지 인도한 이는 모세로 율법을 대표하는 존재였다. 율법의 굴레를 쓰고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는 내용으로 마치 로마서를 비교해서 관찰해 본다면 1장에서 7장까지 광야의 생애를 방황하며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울부짖을 수밖에 없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은 성령의 생애의 모형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위시하여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을 인도하는 원동력은 모세가 제시하는 율법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히 4장) 율법에서 머물러 있지 말고 주 안에서 거듭나지 않으면 가나안 땅으로 갈 수 있는 약속의 복음을 얻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3장 4절에서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가보지 못하였음이니라.”라는 구절은 그 어느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난생처음 밟아보는 땅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다. 감히 엄두를 낼 수 없는 땅을 향하여 전적인 성령의 인도함을 받지 않으면 율법과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내용의 복음을 맛볼 수 없다는 뜻이다.
1장에 2절과 3절에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위한 신앙의 4단계를 제시하고 있는데 첫 번째로 “일어나야” 한다. 사도행전 3장에 나오는 날 때부터 앉은뱅이가 구걸하는 것은 하루를 연명하기 위한 돈 몇 푼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앉은뱅이 평생의 소원은 온전한 몸으로 성전에 들어가는 것이다.
성전에 들어가기 위해서 먼저 일어나야만 하는 것처럼 감히 엄두를 낼 수 없는 땅을 향하여 걸어가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해야 하는 것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야만 한다. 두 번째는 “건너가야”만 한다. 이스라엘 민족을 히브리인이라고 한 것은 경계선을 넘어 건너간 민족을 의미한다.
애급을 탈출하기 전에 마지막 재앙인 애급에서 태어난 존재 중에 제일 먼저 태어난 사람을 죽이는 재앙이 있었다. 죽음을 건너가게 하여 생명을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총을 으뜸으로 상기시켜야 할 것이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간 민족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요, 히브리민족인 것이다.
애급에서 탈출하여 나오다가 만난 홍해를 건너간 민족, 광야에서 40년 동안 헤맸지만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를 받아 광야를 건너간 민족, 그리고 여호수아의 인솔로 인해 요단강을 건너간 민족을 지칭하는 히브리민족은 어둠에서 빛으로, 율법에서 복음으로, 옛 사람에서 새 사람으로 건너간 사람을 의미한다.
세 번째는 “가라”는 명령에 의해 전진해야만 한다. 무작정 아무런 목표 없이 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가라고 한 땅, 감히 엄두를 낼 수 없는 땅을 향하여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 힘차게 전진해야 한다. 여기가 좋사오니 하면서 주저 앉아버리면 안 된다. 하염없이 발자국을 남기며 가는 것이 아니다. 주님과 함께 걸어가야 한다.
사랑은 서로 마주보며 즐기는 것이 아니다. 서로 함께 손을 잡고 목표를 향해 가야만 하는 것이다. 네 번째는 “밟으라”고 하셨는데 그냥 지나치는 길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줄로 재어준 구역을 마음껏 밟아나가야 한다. (시 16:6) 시편 1:1에 사람의 복은 하나님께서 줄로 재어준 곳을 마음껏 밟아나가는 것이 진정한 복이다.
이것이 바로 시 23편에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풀어주신다는 말씀도 일맥상통한 내용이다. 제일 상단에는 목자의 겉옷을 펼쳐 놓고 우편에는 지팡이를 좌편에는 막대기를 꽂든지 눕혀 놓고 하단에는 목자가 비스듬히 누워서 양들이 그 안에서 마음껏 풀을 뜯어 먹을 수 있도록 상을 베푼다는 숨은 비밀을 담고 있다.
창세기 13:17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도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고 하셨는데 여호수아 1:3에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라는 말씀은 약속에 의해 주어진 것이지만 내 자신이 점령 획득해야만 얻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는 말씀은 아멘, 할렐루야만 외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해야만 된다. 입으로만 해서 점령할 수 없으며 손 하나 까닥하지 않고 얻어지지 않는다. 속된 말로 털도 안 뽑고 닭을 잡아먹는 꼴이 된다.
하늘에 속한 여러 가지 신령한 은사를 우리들에게 주어졌지만 이것을 주님께서 주신 의도에 합당하게 사용하면서 신앙으로 점령하지 않으면 은사를 주신 하나님의 목적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은사를 주신 목적은 사용하라고 주신 것도 되지만 철저하게 순종하라고 주신 것이다.
요단을 건넌 것만으로, 구원받은 것만으로, 성결해진 것만으로 안심해서는 안 된다. 예수 믿고 직분을 받았다고 안심하지 마라. 내게 주신 은혜를 자기 것으로 획득하기 위해 끊임없이 점령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귀사단은 고도의 전략으로 공격하고 있는데 휴전인 줄 알고 무방비로 대처하고 있으니 한심하다.
3절부터 8절까지 다섯 가지 약속이 있는데 첫째, 믿음으로 얻어지는 산업(3~4) 둘째, 주와 함께 하심으로 받는 권위(5) 셋째, 담대함으로써 완수해야 되는 사명수행(6) 넷째, 복종에 의해 얻어지는 번영(7) 다섯째, 말씀을 지킴으로써 얻어지는 권리와 승리(8)를 부여하신다고 말씀하셨다.
이 약속과 함께 하나님께서 함께 있을 것이라는 말씀을 거듭하고 있다(5, 9) 약속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약속과 함께 하나님의 책임성을 엿볼 수 있다. 성경 전반에 걸쳐 하나님은 약속과 함께 실천에 옮기면서 우리 곁에 늘 떠나지 않고 있음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는 줄로 착각할 때가 가끔 있다.
모세의 죽음은 청년 여호수아에게 커다란 충격이었을 것이다. 모세의 후계자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받았다. 영적 전쟁의 승리를 위해서 특별한 능력을 받지 않으면 도저히 불가능한 사명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임명과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능력까지 부여하신다.
이 글을 읽는 우리는 여호수아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한 몸이 되었다면 여호수아의 사명과 함께 거기에 따르는 능력을 부여받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모세는 죽었지만 하나님은 함께 해주신다는 약속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율법으로 인해 나의 옛 사람이 죽어져야만 하나님과 함께 동행해 주신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향하여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하라”는 말씀을 세 번 거듭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6, 7, 9) 여호수아는 하나님에게만 위로와 격려를 받은 것이 아니라 백성들에게까지 위로와 격려의 축복을 받았다는 것이다.(17~18) 막중한 사명을 받게 되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용감하게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감히 엄두를 낼 수 없는 땅을 향하여 가자고 외치고 있지만 갈 수 있도록 자세한 지도와 함께 어떻게 일어나고 건너가며, 전진하고 밟아나가야 하는지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지 못한 채 “새벽기도 하세요, 금식기도 하세요, 아니면 작정헌금과 함께 작정 기도하라”는 등, 구체적이지 못할 뿐 아니라 고도의 전략으로 대처할 수 있는 영적 전쟁에 지침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예배를 드리고 목사님에게 얼굴 도장만 찍고 가버리니 무슨 전략을 세우고 만반의 공격을 준비할 수 있겠는가? 너무나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어 성도들과 교회들은 마귀사단으로부터 손쉽게 정복당하고 있다. 예배 후에 성도의 교제나 성경공부 기타, 다른 모임들이 필요하지만 전략을 세우고 실천해야만 한다.
인천에 모 교회는 예배 후 두세 시간 이상 각 가정의 영적 승리를 위해 고도의 전략으로 작전을 짜고 있다. 이게 다가 아니라 실천했는지 확인하고 그 다음에 해야 되는 언행을 모의해서 겨우 승리할 정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기고도 남음이 있어야 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겨우 이겨서는 안 된다.
백 미터 달리기를 하는 선수들이 마지막 골인 지점에서 승리의 확신을 얻고 나면 운동장을 거의 한 바퀴이상 돌면서 승리의 환희를 군중들과 함께 맛보는 것처럼 이기고도 남음이 있어야만 된다. 감히 엄두를 낼 수 없는 땅이기에 더욱 더 이기고도 남아야 한다. 겨우 이겨서 안 되는 것은 주변 사람들이 보고 간담이 녹는 것처럼 이겨야 한다.
감히 엄두를 낼 수 없는 땅이기에 자신 있게 일어나고 건너가야 하며 전진하여 밟아나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위로와 용기를 주는 축복을 받기 때문이다. 막중한 사명에는 반드시 수행할 수 있는 능력과 함께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신다는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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