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사람과 속사람

2013. 1. 15. 16:39좋은 글, 이야기

 겉사람과 속사람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삶은 언제나 너무도 육신적이다. 성경은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 8:13)”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하노라면 인간의 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인간의 삶은 영혼을 위해서가 아니라 육신을 위해서 치달아가고 있는 것 같다. 현대인의 삶은 껍질은 두터우나 알맹이는 부실한 무게 없는 삶, 쭉정이의 삶, 너무도 가벼워 한줄기 바람에도 불려가 버릴 위태로운 삶이다.

 

   윌프레드 요더라는 사람은 여러 해 동안 관절염으로 인한 통증으로 시달려 오면서도 가장 강한 그리스도인 중 하나였다고 한다. 사람들이 그를 만나 인사를 하며 “오늘은 좀 어떠세요?”하고 물으면 그는 “아주 평안합니다!”라고 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의 고통을 아는 사람들은 “그렇게 아픈데도 어떻게 평안하다는 말을 할 수가 있습니까?”라며 때때로 그의 대답을 의심했다. 그때마다 그의 반응은 똑같았다. “내 몸의 형편은 나의 평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보시다시피 나를 아프게 하는 부분은 단지 껍질뿐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내가 아니지요. 진정한 나는 아주 평안하답니다.”

 

   윌프레드가 ‘껍질’이라 부르는 것을 바울사도는 ‘장막’이라고 불렀다. 윌프레드가 ‘진정한 나’라고 부르는 것을 바울사도는 ‘속사람’이라고 불렀다. 윌프레드는 자기의 육신의 장막이 고통스럽고 낡아질지라도 그것은 결국 속사람을 위한 임시적인 거처에 지나지 않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언젠가 그는 세상 장막을 천국에서 그를 기다리는 영원한 집과 바꿀 것을 확신했을 것이다. 그때까지 윌프레드는 자기의 속사람이 매일 새롭게 되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평안합니까? 당신의 장막이 지금 늘어져 있습니까? 그리스도가 당신의 구주이시고 주님이시라면 미래의 완전한 몸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나 그때까지 우리의 겉사람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 할지라도 속사람은 ‘아주 평안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고 말은 잘도 하지만 막상 죽을병에 걸리고 의사가 얼마 못 산다고 선고를 내리면 벌벌 떨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댄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멀리 차버리고 낙망하고 좌절하며 육신의 생명을 조금 더 연장시켜보려고 발버둥을 친다.

 

   2012년에는 두 번의 큰 태풍이 우리나라를 강타했다. 곡식이 미처 여물기 전에 불어온 볼라벤으로 곡식의 알맹이는 영글지 못한데다, 두 번째로 불어온 산바가 그나마 영글려고 안간힘을 쓰던 곡식을 재차 주저앉혀 버렸다. 가을에 되어 고개 숙인 튼실한 벼들로 출렁거려야할 논에는 뻣뻣하게 고개를 쳐들고 서 있는 부실한 벼들이 꼴사나워 보였다.

 

   인간은 영과 육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은 알맹이요, 육은 껍데기이다. 모든 만물이 알맹이와 껍질로 이루어져 있다. 알맹이가 주(主)요, 껍질은 부(副)다. 그러나 주(主)인 알맹이는 소홀히 하고 부(副)인 껍질을 소중하게 여기는 일이 많다. 인간의 삶이 또한 그렇다. 중요한 영의 일은 소홀히 하고 껍데기에 불과한 육의 일은 더 중시하여 육의 일에 집착하여 살아간다.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바로의 노예의 신분에서 해방시켜 하나님의 백성을 삼아 하나님을 섬기며 살라고 모세를 보냈건만, 모세가 바로에게 백성의 해방을 촉구할 때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에 고역을 더하자 그들은 모세와 하나님을 대적하며 차라리 예전대로 살게 내버려두라고 강력하게 항의한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의 일은 생각지 않고 육의 일에만 착념하였기 때문이다.

 

   그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전도자가 불신자를 찾아가 그의 영혼을 구원하여 사탄의 종에서 해방시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려고 복음을 선포할 때 복음의 영적인 의미는 안중에도 없는 자는 묻는다.

“교회 다니면 내 병이 낫습니까?”

“교회 다니면 부자 됩니까?”

 

   심지어 어느 목사는 설교할 때마다 육적인 문제만 말한다. 기복 설교, 축복 설교가 판을 친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영혼 구원은 제쳐두고 성장주의에 빠져 있다는 비난을 듣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많은 사람이 모이는 것, 큰 건물을 짓는 것, 많은 이벤트와 프로그램으로 많은 일을 벌여 성과를 만천하에 널리 알리는 것 등을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만족해하실까, 자문해보아야 한다.

 

   요한복음 6장에는 예수님이 자신을 ‘생명의 떡’에 비유하시고 나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자 멀리서부터 온 많은 사람들에게 오병이어로 배불리 먹이신 사건이 나온다. 그 후 사람들은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 했다. 예수님이 ‘생명의 떡’임을 깨달아서가 아니라 오병이어로 장정만 세어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예수님의 능력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자 하여서이다. 예수님의 능력을 로마의 속국으로부터 이스라엘 나라를 해방시키는데 이용하고자 했던 정치꾼들의 얄팍한 술수였다.

 

   심지어 제자들조차도 예수님이 왕이 되면 누가 오른쪽, 누가 왼쪽에 앉을까를 두고 티격태격 싸웠다. 예수님이 많이 사랑하셨던 제자 요한과 그의 형제 야고보는 어머니까지 동원하여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쟁투했다. 그것이 바로 모든 인간의 참 모습이다. 나의 모습이다. 당신의 모습이다. 우리의 모습이다.

 

   그리하여 요한복음 6장 26~27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썩지 않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 17:32)”고 권고했다. 롯의 처는 하나님께서 소돔을 멸망시키실 때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어 멸망 가운데서 구원을 받아 소돔을 도망쳐 나오는 중에 소돔에 두고 온 세상 것들을 잊지 못해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었던 여인이다. 이는 지금도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서도 여전히 세상 것을 취하려고 혈안이 되어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가리킨다.

 

   세상에 대한 욕망, 물질만능주의, 세속주의, 탐심에 허우적거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께서 오늘도 경고하시는 말씀을 듣는 귀를 열어두고 살아가야 한다. 오늘날 한국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교회 밖 사람들로부터 비난과 조롱을 받고 있다.

 

   왜 그럴까? 영적으로 풍성한 삶을 누려야 할 자들이 불신자들보다도 더 육신적이고 탐욕적이어서가 아닐까?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라는 속담이 있다. 믿음을 지키며 살다가 애매히 받는 고난과 핍박에 대해서는 주님의 위로와 인정하심이 주어지겠지만 성도의 본분을 잊고 자기의 욕심에 이끌려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받는 고난과 비난은 하나님께서도 인정해 주시지 않는 무가치한 것이 될 것이다.

 

   바울사도는 고린도후서 4장 16~18절에서 겉사람과 속사람에 대해서 잘 말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2013년 새해를 맞이하여 보이는 껍데기인 겉사람에 대해서보다는 보이지 아니하는 속사람인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 즉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을 사모하며 믿음으로 행하고 보이는 것으로만 행하지 않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새로워지기를 소망한다.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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