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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철이 되면 생각나는 곤충이 ‘하루살이’입니다. 성경에 자주 인용되는 말 하나 역시 하루살이입니다. 하루살이는 덧없이 지나가는 짧은 인생의 상징으로 구약과 신약에서 자주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루살이 곤충이 정말 단 하루를 살고 생을 마치는지 확실히 모르나 다만 그들의 수명이 짧다는 것만은 짐작으로 알 수 있습니다.
학창시절 밤늦게까지 공부하느라고 마루에 나와 전등불을 켜놓고 앉아 있으면 하루살이들이 머리 위로 수도 없이 날아다녔습니다. 이따금씩 뜨거운 전구 가까이 잘못 간 나머지 타 죽거나 쇼크를 받고 책 위로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이런 하루살이는 어미가 물속에 알을 낳으면 한 달 안에 깨어 애벌레가 되고, 애벌레는 1~2년을 물속에서 살다가 성충으로 자라 날개를 달고 땅 위로 날아오른답니다. 이 성충이 바로 ‘하루살이’인데 보통 하루에서 3일 정도 살지만 길게는 2주일 넘게 사는 것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루살이는 한국을 비롯해 동남아, 유럽 등 전 세계적으로 대략 2,000종 이상이 폭넓게 분포되어 있다고 하니 놀랍습니다.
하루살이가 메뚜기하고 아침부터 놀다가 저녁이 되었습니다. 메뚜기가 하루살이에게 "하루살이야, 벌써 저녁이 되었으니 그만 놀고 내일 만나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루살이가 메뚜기에게 묻습니다. "내일이 뭔데?" 하루살이는 하루만 살기 때문에 '내일'을 모릅니다.
하루살이가 죽고 나니 메뚜기가 외로웠습니다. 그래서 만난 것이 개구리였습니다. 개구리와 놀다가 가을이 왔습니다. 그러자 개구리가 "메뚜기야, 겨울 지나고 내년에 만나서 놀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메뚜기가 개구리에게 "내년이 뭐야?" 라고 물었습니다.
개구리가 아무리 내년을 설명해도 메뚜기는 이해 할 수가 없었습니다. 눈이 오고, 얼음이 얼고, 다시 봄이 온다고 말했으나 메뚜기는 통 알아듣지를 못했습니다. 메뚜기는 '내년'을 모릅니다. 1년만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 사회에도 하루살이처럼 오늘 하루, 눈앞의 현실만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눈앞의 현실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바로 내일을 모르는 인간 하루살이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에게도 그러한 신앙의 하루살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주일에 잠시 동안만 믿음을 가지는 듯하며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이상이나 희망은 갖고 있지 않습니다. 믿는 자들은 현실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두 눈을 이 속된 세상에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돌려야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미래에 있으며 오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에 목표를 두는 삶은, 하루살이 같은 삶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겨우 며칠 밖에 살지 못하는 하루살이도 그들만의 존재이유가 있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은 나름대로의 ‘존재 의미’를 지닙니다. 하루살이도 분명 존재해야 할 가치가 있기에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 쪽에서 보면 하루살이쯤이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별 볼 일 없는 미물이겠지만 실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들이 없으면 먹이사슬의 순환고리가 망가집니다. 이는 인간의 눈에는 잘 뜨이지 않지만, 하루살이를 먹고사는 곤충이나 새들에게는 생존이 걸린 문제입니다. 마치 소나 닭이 인간에게 필요하듯 모든 존재는 이같이 저마다 필요성이 있습니다.
심지어 사냥꾼이 사슴을 잡아먹고 사는 육식동물을 너무 잡아 죽이면, 결국 번식력이 강한 사슴의 수가 많아져 숲 속의 풀을 너무 먹어치우기 때문에 숲과 자연공원들이 망가진다고 합니다. 모든 존재는 균형을 이루기 위한 필요불가결의 존재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함께 살아가는 존재에게 너무 무관심합니다. 건성으로 생각 없이 살다보면 중요한 것마저도 하찮게 보입니다. 벌에 쏘이면 아픈 것만 생각하지, 매일 수시로 먹고사는 과일에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습니다. 하루살이는 우리에게 많은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해 주고 있습니다.
예부터 빈둥빈둥 놀면서 밥만 축내고 있는 게으른 사람을 나무라고 가르칠 때 ‘하루살이만도 못한 인간’이라는 말로써 나무랄 때가 많습니다. 조상이 남긴 전통과 지혜, 역사가 전해주는 의미와 교훈, 얼마나 잘 살리고 잘 이어가느냐에 따라 우리는 하루살이가 될 수 있고 천년 살이도 됩니다.
이사야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라. 아래로 땅을 내려다보라. 하늘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땅은 옷처럼 해어져서 거기에 사는 사람들은 하루살이처럼 죽을 것이다. 그러나 내 구원은 영원하고 내 정의는 꺾이지 않을 것이다.<이사야서 51장 6절> 이처럼 성경에서 하루살이는 덧없이 지나가는 짧은 인생과 인생무상의 상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하루살이 신앙생활에서 영원한 나라를 위하여 이 세상에서 준비를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니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골로새서 3장 1절>
위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교회나 성도들이 제도나 규정을 절대시하지 마십시오! 교회의 제도나 규정에는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언제나 보완되어야 하고, 수정되고, 어느 시점에 가서는 폐기되어야할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을 절대시 할 때 언제나 분열이 생기게 되고 생명력을 상실한 공동체가 됩니다.
이제 부단히 자기 갱신을 해나가십시오! 부단한 자기 갱신을 통해서 자유 하는 사람이 되어가지 않으면 형식주의의 노예가 됩니다. 형식주의에 묶여 있을 때 진정한 구원의 경험은 불가능합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기가 고수하고 있는 그 형식주의 자체가 구원이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제 아무리 인공위성으로 달나라를 찾아가고 인터넷을 두드려 별의별 정보를 얻어내는 인간이라 할지라도, 자세히 따져보면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우리네 인간의 한계입니다. 지금까지 그 누가 자기 자신의 죽을 날이 언제일지 알고 사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루살이 인생입니다. 우리 생각이 아무리 깊어도 그것은 하루살이의 생각일 뿐입니다. 내일 죽게 될 운명을 모르고 사는 하루살이와 대동소이합니다. 내가 인정하든 무시하든 예수님은 다시 오십니다. 그 날을 믿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우리가 물어야할 바른 질문은 '언제?'가 아닌 '어떻게?'입니다
그 날을 두려움과 죄송함과 민망함으로 맞지 않고 영광과 기쁨과 감사로 맞이하기 위해 어떻게 오늘을 살아야 할까가 바른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마귀의 속임수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진리의 말씀으로 무장하라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해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라고, 점점 더 잦아지고 커지는 그 날의 사인들에 깨어있으라고.
하루살이 신앙에서 벗어나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성도의 신앙적인 마땅한 태도입니다. 우리 인생! 아는 것만 알다가 죽습니다. 아는 그만큼 인간다움의 기쁨은 커집니다. 알기 원하는 자는 천재보다 낫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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