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전문가 대신 장성한 그리스도인이 되자

2017. 12. 13. 19:42좋은 글, 이야기

기독교 전문가 대신 장성한 그리스도인이 되자                   


이 글은 스위스의 한 기독교사이트인 www.livenet.ch에서 가져와 번역한 것입니다.


Reinhold Scharnowski


영적 성숙은 우리 시대의 가장 필요한 것 중 하나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우리는 영적 성숙을 위한 새로운 접근을 해야만 한다. 오늘날 교회의 목회자들은 일반적으로 교인들에게 실제적인 지도와 함게 사회가 복잡해 짐에 따라 커지는 종잡을 수 없이 많은 주제들에 대한 가르침을 주어야 한다는 시지프스적인 과제 앞에 서있다.
  
오늘날의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적 경험을 약속하는 유례없이 많은 제안들에 둘러싸여 있다. 수련회와 세미나, 잡지와 책들 그리고 카세트테이프들을 통해 깊은 생각을 요하는 모든 주제들이 다루어진다. 한 그리스도인이 성숙으로 나아가기 위해 존재하는 모든 주제에 대해 적절한 를 배워야만 하는 것일까? 그것이 영적인 성숙을 가져다 줄까? 내가 성숙에 이르는 길들을 찾고 있을 때, 신약성서에서 에베소 교회에게 <하나님의 뜻을 다> 전하기 위해 3년이라는 시간을 사용했던 바울(행20:27)과 부딪히게 되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스스로의 책임 하에 모든 결정들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좌표계>를 갖게 하려고 했던 것같이 보인다. 심지어 요한은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요일2:27)"고까지 말했다.


성숙한 그리고 장성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갖고 있다
성숙한, 장성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과 성령의 기름부음 그리고 모든 하나님의 뜻에 관한 개념을 갖고 있다. 이를 통해 그들은 문제가 무엇이든 독립적이고 영적으로 성숙한 결정들을 내릴 수 있다. 교회 안의 사역은 절대적으로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을 길러내는 일을 지향해야 한다.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목사나 기독교 서적이 떨어뜨려 주는 것에만 의존하지 않으며 스스로 양분을 얻고 결정에 책임을 지며 자신의 사역과 봉사로 자라간다. 성숙이 왜 필요한가? 삶은 탄생으로부터 수많은 단계를 지나 생물학적 성장, 인격형성, 사회적 행동 등의 여러 영역에서의 성숙으로 이어지는 발달의 과정이다. 어린이의 특성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청소년에게는 문제가 되며 성인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된다. 생물학적으로 성숙은 존재하는 모든 소질들이 계발되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성공적인 번식을 위한 전제이기도 하다.


위대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 영적 성숙
영적인 의미에서도 성숙은 하나님께서 우리 세상에 갖고 계신 더 큰 목적들이 실현될 수 있도록 하는 전제이다. 이 목적들은 하나님의 전 백성들이 움직일 때에만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우리가 그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의도를 볼 때에만 오늘날의 수많은 혁명들, 위기들, 파괴와 변화들을 이해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마침내 자신의 백성들을, 이 자고 있는 거인을 일깨우시려는 것이다. 마침내 수백년 동안 -성숙을 막는 구조도 한 몫을 했던- 잠자고 있던저장품들과 은사들과 능력들을 움직이시려는 것이다.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살며 세상 안에서의 자신들의 임무와 사역을 알고 하나님 나라라 불리우는 엄청난 역사를 위해 무엇을 기여하여야 할지 알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과 세상을 열렬히 섬기기 위해 <나-나에게-나의-나를>이라는 자아의 단계를 떠났고 자신들의 작은 목적들과 세상에 대해 죽었다.


<영적 성숙의 여덟 가지 특징>
이 주제에 관한 중요한 성경구절들을 모아보면 우리가 향하여 자라가야 할 상을 보여주는 성숙, 장성함 그리고 <온전함>에 대한 몇몇 특징들이 드러난다.
  


1. 성숙은 나의 분량을 아는 것이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엡4:7)." 우리 모두는 비교하기를 좋아하며 좌우를 곁눈질 하면서 우리의 정체성을 찾으려 한다. 이때 우리는 일반적으로 의기소침함("나는 절대 그렇게 될 수 없을 거야")과 교만("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미 내가 할 수 있는 것이고 더 잘하지") 사이를 왔다갔다 한다. 수년동안 나 자신도 내가 설교자 X씨 처럼 그렇게 성공적이지도 철저하지도 못하다는 것으로 괴로와 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내게 내 분량의 믿음과 은사를 주셨다는 것을 처음으로 이해하고 이 분량을 찾는 경험을 했다. 내가 좌우로 비교하는 것을 그만 두고 하나님께서 내게 준비시켜 주신 곳에 서는 것을 배우는 것은 성숙으로 나아가는 근복적인 단계이다. 사람들은 평온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모순되게도 이 분량은 엄청나게 자랄 수 있게 된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나보다 더 많은 은사를 가진 사람들을 진정 담담하게 기뻐할 수 있다. 나는 나의 분량에 책임이 있지 다른 사람들의 분량에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2. 성숙은 봉사하는 것이다
장성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삶을 봉사로 -포괄적인 의미의 봉사로(엡4:12a)- 이해하는 사람들이다. 우선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봉사를 하는가 혹은 교회 안에서 봉사를 하는가 <세상> 속에서 봉사를 하는가가 아니라 봉사에 준비가 되어 있는가이다. 이것은 <내가 천국에 갈 수 있을까?>하는 태도에 대한 근본적인 패러다임 전환이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살전1:9)" 구원받았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더이상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도록 우리를 대신해 죽으셨다(고후5:15)." "전에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기만 했지만 오늘날 우리는 사랑의 관계에 있다"는 식으로 <하나님 사랑하기, 하나님과 관계맺기>와 <하나님 섬기기> 간의 모순을 만들어 내려는 시도는 무의미하다. 사랑의 관계에 전혀 반대하지는 않지만 언젠가 우리는 품에서 벗어나 세상밖으로 나와야만 한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말을 행한다"고 말씀하셨다. 충분하다. 따라서 모든 교회의 조직에서 제기되어야만 하는 질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이곳에서 그들의 소명을 충분히 발휘하도록 지도받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말했듯이 "그들이 교회부서에서 봉사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들의 봉사에 준비가 되어 있는가?"하는 질문이다. 이 봉사에 투입되기 위한 준비(무장)는 어른으로 성숙하기 위한 근본적인 단계이며 전 세계에 전 복음이 전 교회를 통하여 전달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모든 지도자들의 핵심질문은 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감독하고 그들의 후견인으로 나서고 있는가 아니면 그들을 성숙의 길로 또 독립적인 봉사로 이끌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3. 성숙은 그리스도의 전체 몸을 본다
극도로 개인화된 우리 사회에서 이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몹시 힘들다. 그러나 우리는 이에 대한 새로운 상을 가져야만 한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개인과 개인적인 완성에 관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단체, 장성한 교회(엡4:12b-13)에 관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단지 개인들을 천국으로 인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한 몸을 세우려 하신다. 성숙은 이 몸을 보며 추구한다. 모든 은사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제국>이 아닌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한다. 물론 각자의 시야에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몸은 직접 관계된 곳일 것이고 다른 사람들에겐 전국적이거나 세계적인 관계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구하지 않고 예수님의 몸을 세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숙은 어떤 형태이든 항상 집단적인 경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지식과 믿음에 이르기까지 함께 길을 가고 있으며 함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숙해 간다(엡4:13). 어떤 그리스도인 개인도, 어떤 가정교회도, 어떠한 교회나 교단도 혼자 그리스도의 충만을 나타낼 수는 없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서로서로 성숙해 가도록 보완하기를 힘써야만 한다.


4. 성숙은 확고함과 관련이 있다
지난 수 년간 얼마나 많은 약속들이 주어졌으며 얼마나 많은 기복을 겪었던가! 많은 축복이 있었으나 또 얼마나 많은 압박과 이루지 못한 기대들이 있었던가! 장성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관점을 갖고 있다. 그는 가르침에 관해 알고 있으며 <단단한 음식>을 소화시키는 법을 배웠고(히5:11-14) 성경으로부터 판단할 수 있다. 그는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에 정통하기 때문에 더이상 새로운 사실이나 풍조에 동요되지 않는다(엡4:14-15). 그는 지름길이란 없음을 알고 있으며 마치 어린 아이처럼(위의 히브리서 말씀의 문자적 표현대로) 모든 약속에 넘어가지 않는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진리를 사랑 가운데 말하는 법(엡4:15)을 배웠다. 따라서 그는 때때로 불편한 동료가 될 수도 있다. 바로 그에게는 그리스도가 중요하기 때문에 스스로 메시아라고 하는 자들에게 속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울리지 않는다면 모든 것을 함께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과 일들을 위임하신 것을 감사할 수 있다. 나는 결코 강제로 혹은 두려움 때문에 무엇인가를 함께 해서는 안 된다! 사족을 붙이자면 오늘날에는 옛날의 율법주의뿐 아니라 새로운, 그리고 카리스마적 율법주의도 존재한다. 에베소서 4장 16절은 또 성숙에는 다양성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모든 형태의 단일문화는 개인의 성숙으로 이끌지 못한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과 은사, 사역이 필요하다. 다양성의 인정은 필요악이 아니라 바로 성숙한 교회의 상징이며 성숙한 그리스도인들로 자라기 위한 전제이다. <하나님 나라의 복합음>을 들을 수 있어야만 한다(W. Vorlander)-특히 특허처방을 갈망하는, 그래서 그 특허처방들이 유일한 열쇠가 되는 시대에는 이 다양성이 더욱 더 중요하다.


5.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앞을 바라본다
관점을 갖고 있다는 것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반대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그가 하나님에 관해 별로 알고 있지 않듯 알고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그를 겸손하게 하며 항상 무릎꿇게 한다. 그러나 그는 전진한다(빌3:13-15). 내가 신약에 나오는 <온전함>이 도달한(혹은 도달하지 못한) 어떤 상태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가고 있는 방향을 나타낸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것은 마치 계시와도 같았다. 그리스어로 teleios인 신약의 단어 <온전한>은 <목적을 의식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얼마나 자유롭던지!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좇아가노라"고 바울은 말한다. 그리고 15절에 이렇게 덧붙인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성숙한, 목적의식이 있는)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찌니."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에서의 <잊다>는 그리스어 단어는 "우산을 잊고 왔다"에서 처럼 단순히 <잊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더 이상 관심이 없다, 그것을 생각할 시간이 없다!>라는 의미의 강력하고 적극적인 단어이다. Forget it! 내 뒤에 놓인 것이 더 이상 나를 붙잡아서는 안 된다. 왜? 왜냐하면 나는 목표를 눈 앞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과거를 후회하지 않는다. 그는 과거와 화해하며 산다. 이 말은 앞으로 나아가는 어떤 순간들에서도 상담적인 작업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성숙한 그리스도인 자신의 과거가 아니라 목표가 자신을 결정한다는 것을 안다. 그는 쟁기를 잡고 목적을 의식하며 산다. 넘어지면 그는 다시 일어선다. 여기 부르심이 있고, 일구어야 할 밭이 있고 이겨야 할 경주가 있다. 나는 더 이상 불어오는 바람에 따라 진로를 벗어나지 않으며 앞으로 돛을 달고 -순풍이거나 역풍일 때도-나아간다. 그러나 나에겐 항로가 있다.


6.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분별할 수 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은 지각>을 소유하였다고 히브리서 5장 14절은 말한다. 그는 옳고 그름,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 것에 대한 영적 지각능력을 갖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음성과 자신의 본성의 음성 그리고 원수의 음성을 구분하는 것을 배웠다. 그는 숙련되었고 더 이상 모든 것을 직접 보지 않아도 된다. 이러한 사람들은 교회 안의 중요한 지주들이고 또 가정교회의 아버지와 어머니들이다. 따라서 영들을 분별하는 은사는 초자연적인 인식일뿐 아니라 오랫동안 훈련된 지각의 결과이기도 하다. 우리의 본문(히5:11-12)은 성숙은 당연한 것이 결코 아님을 또 분명히 하고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인들이 시간으로 보자면 이미 오래 전에 이르렀어야 할 성숙으로 자라나지 못한 것을 한탄하고 있다. 그들에겐 아직도 우유가 필요하다. 우리 모두는 자연적인 삶에서나 영적인 삶에서 책임을 질 필요가 없는 유아적 단계에 머므르면서 성인이 되는 것을 거부하는 남녀들을 알고 있다.


7.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시험을 통하여 확고하게 된다
성숙에 이르는 길에는 왕도가 없으며 일반적으로 이 길은 고통과 연결되어 있다. 야고보서 1:2-4은 우리에게 성숙에 이르는 일반적인 길을 보여준다. 시련-지킴-확고함-성숙. 최근에 한 친구가 내게 말했다. "깨어지지 않은 사람은 누구도 믿지 말게!" 공격, 위기와 고통은 성숙을 위한 하나님의 도구이며 오늘날에도 그러하다. 공격을 받을 때면 항상 고통스럽게 나의 무능력이 드러나며 따라서 더욱 철저하게 그리스도에게 매달리게 된다. 그리고 모든 인스탄트식의 해결과 <나는- 모든 것을- 지금- 하겠다>는 기도들에도 불구하고 성숙함에는 시간이 필요하며 확고함, 긍정적인 고집같은 것이 있어야 한다. "나는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이제 되돌아 가거나 자리를 양보하지 않겠다." 그러므로 시련은 그것을 없대 달라고 기도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 기뻐해야 하는 것이라고 야고보는 말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논리이다! 모든 극복되어진 시험은 우리를 다음 시험의 대기자로 만든다.
  
8.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조건 없이 원수라도 사랑한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을 까다로운 관철주의자로 상상한 사람은 몹시 실망할 것이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많이 웃으며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웃는다.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기쁨 안에 머무는 것과 하나님의 평화를 자신들의 유업으로 요구하는 것을 배운다. 이렇게 성령의 열매가 그들 안에서 자라간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때문에 그들은 사랑의 사람들이다. 그들의 대적들 조차도 이를 알 수 있다. 산상수훈 중에서 예수님은 인간에 대한 일반적인 사랑과 원수에 대한 사랑 그리고 <온전함>을 함께 말씀하신다. 이 사랑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나타낸다(마5:48). 바울은 이 사랑을 바로 <온전하게 매는 띠>(골3:14)라고 부른다. 어떤 시금석이 필요하다면 한 사람이 자라간 만큼의 사랑에서 측정할 수 있을 것이다.


자료/ⓒ창골산 봉서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