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간증] 빛과 어둠의 세월
2005. 8. 23. 11:22ㆍ신앙간증
빛과 어두움의 세월!
1991년 8월 4일 주일 !
그 날은 세상의 모든 빛이 다 가리워진 날이었습니다.
우리 집에는 그로부터 늘 어두움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교회에서는 장로이고 지역에서는 유지이고, 약사이며 가장이신 저의 남편이 실명을 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평소에 당뇨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한번도 아프다거나 몸이 피로를 느낀 적이 없이 30년간을 약국을 경영하면서 늘 남들에게 나누어주고 베풀어주며, 교회 개척을 2곳 하면서, 우리가 살 집을 짓기 전에 교회를 먼저 세우고 난 뒤에 지금의 이 집을 짓게 되었습니다.
91년 5월 초순 어느 날, 외적으로는 아무 하자가 없어 보이는 남편이 영적으로는 왜 그리 답답한지, 진정한 부부와의 대화가 되지 않았고
심령이 통하지 않았던 터라 그날 따라 그 남편을 위해 통곡을 하며 성령 님께서 인도 하시는 대로 거의 1시간 정도 눈물로 기도를 드렸습니다.
눈이 퉁퉁 붓기까지 했는대도 남편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고 무감각하였습니다.
내가 기도를 한 그 며칠 후 남편은 한쪽 눈에 이상이 온 것 같다면서 안과에 가셨다가 온 후부터 두려움과 불안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리하여 새벽기도회를 같이 나가게되었습니다.
이유인즉 당뇨 합병증으로 망막 에 이상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한쪽은 벌써 많이 진전이 되어 있어서 손을 쓸 수가 없는 상태이고 다른 한쪽을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그것도 종합병원에 가서 방사선 치료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5월- 7월 사이 치료를 받는다고 대구 경대병원에 가서 2-3시간쯤을 기다렸다가 차례가 되면 기계가 고장이 났다고 하여 헛걸음하고 돌아온 적이 2번 있었고 2번 정도 치료를 받던 중에 실명을 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주일 아침 새벽기도회를 같이 갔다와서 당신은 더 자고있었고, 나는 그 당시 중등부 교사인터라 일찍 교회에 갔다가 모든 봉사를 마치고 오후 2시정도 되어서 집에 들어오니...이상한 광경이 벌어졌습니다..
아침에 누워있던 그 자리에 그대로 누워서 물에 빠진 사람처럼 손을 흔들며 허우적대는 시늉을 하며 나를 불러들였습니다.
이상한 기운이 감도는 것을 직감하며 곁에 앉으니... 하는 말...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듣고 놀라지 말라고... 내가 지금 아무 것도 안 보인다고... 아침에 잠을 깨서 눈을 떠보니 깜깜해서 꿈인가 하여 살을 꼬집어보니 꿈은 아니고
정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 지금까지 가만히 누워서 곰곰히 생각을 해 봤는데 이제 나는 살지는 못 할 것 같으니 당신이 정신 바짝 차리고 남은 아이들 공부 마저 시키고, 결혼시키고 이 가문을 이끌어 나가기 바란다.... 이렇게 유언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에 정말 나의 힘이 아닌 주님의 담력이 나를 사로잡았습니다.
어디에서 나온 침착성인지 내가 놀랄 정도의 잔잔함을 느끼며... 일단 그를 안정시켜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보세요, 당신! 눈이 어두운 것하고 생명의 죽고 사는 것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 이예요... 아이들 문제...걱정 말아요..
20세 이상 키워놓은 우리아이들 어디에다 내놔도 저들의 길을 다 잘 갈 수 있으니 걱정말고 내 걱정도 마세요...집 있고 점포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살펴 주실텐데 왜 못살겠오...
지금 당장 할 일은 일단 아침식사를 못하고 있는 당신이 밥을 먹는 일이고, 그리고 마음을 가라앉혀서 어떻게 하면 이 병을 치료할 수 있을까? 어떻게 수술을 해야할까... 그 문제가 급선무입니다.
차분히 그렇게 말하니까 후유...하고 한숨을 내쉬며 당신이 그렇게 생각해 주니 한결 마음이 놓이는구나... 하시며 주방으로 따라나섰습니다. 사방 전후 좌우 분별을 못 한 체 정말 언덕에서 떨어진 심정으로 우리 부부의 시련의 분투는 시작되었습니다....
그 해 9월 어느 날 서울대학 병원에 갔다가 수술 예약을 10월 중순으로 날을 잡아놓고 다시 집으로 왔습니다.
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과 중도에 실명한 사람과의 차이 점이라면 중도에 실명한 사람은 정신적인 타격 - 그 충격이 너무 커서 안 보인다는 그 자체보다 실명 그 자체를 수용하기가 정말 힘드는 것이었습니다.
10월 어느 날 병원에 입원하였을 때 제일 먼저 찾아온 이는 맏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서울에서 신학대학원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 벌써 시험을 쳐서 입학을 했어야 할 아들이 시간만 보내고 밍기적 거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 와서는 한다는 첫마디가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하나님 ! 내가 정말 신학을 해서 목사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어떤 표적을 보여주세요....라고 했는데 왜 그 표적이 하필이면 우리 아버지냐고 했습니다.
나는 그에게 한 첫 말이 네가 이래도 머뭇거리고 있을테냐? 라고 했지요.
하루아침에 완전히 뒤바뀐 삶의 패턴을 적응해 나가느라 죽을 고생을 온 가족이 모두 함께 겪어야 했습니다.
신학교 기독교 교육학과에 재학 중이던 두 딸은 휴학 계를 내어야 했고, 아들은 그 때 부터 결심하고 신학교 시험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사망의 몸이 무엇인지를 조금은 알 것 같았습니다. 산사람과 죽은 사람의 몸을 함께 얽어 매어놓은 듯한 나날의 움직임이 바로 그것이라고...
그러는 가운데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한 5년 정도의 세월이 흐른 후에 당신은 조금씩 영적으로 성숙해져 가고 있었습니다.
나는 한 마리의 잃은 양을 기르는 목자의 심정으로 날마다 그에게 꼴을 먹였습니다. 성경 테이프.. 찬송가 테이프를 들려주며, 찬송가 가사를 외워서 안보고도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내가 직접 불러서 가사를 반복하여 읽고 곡을 붙혀서 녹음하여 주면 잘 못했다고 던져버릴 때도 있었습니다- 그렇게도 아팠던 아픔의 세월이지만 그래도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6년의 세월이 흐른 후 어느 날 그는 숨쉬기가 힘들다고 하여 병원에 갔더니 신장 기능이 약해서 투석을 해야한다고 했습니다.
요즘은 기계시술이 잘 되어 있어서 혈액투석을 하면서도 그런대로 건강을 유지하며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틀에 한번씩 일주일에 세 번을 앞못보는 사람을 데리고 다니면서 혈액투석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나도 너무 과로한 이유인지는 몰라도 안면마비가 와서 얼굴이 균형을 잃게되었습니다. 전 교인들과 친척 중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저 집에 무슨 죄가 저리도 많아서 겹치기로 시련을 당하고 있는가? 라고 하는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심을 믿었습니다.
집에는 항상 성경 말씀...아니면 찬송가 소리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한번은 이웃에 있는 작은 교회에서 석유를 배달해 달라고 부탁을 한 모양인데 저의 집 대문 벨을 눌러서 나가보니 여기가 교회예요? 하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찬송소리를 듣고 착각을 했던 모양...눈을 잘 못 보는 대신 소리가 크게 들려야 속이 시원한 가봐요.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었습니다.
온 시민이 다 보는 앞에서 장님의 손을 잡고 다니는 내 모습은 바로 내 교만과 아집을 깨뜨리기 위한 하나님의 교육현장이었지요.
그러는 중에도 자녀들은 다 제 갈 길을 찾아서 결혼을 했고 졸업을 하고,,, 군대도 갔다오고.. 그렇게 8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남편의 그 급하고 강한 불같은 성격은 많이 온유해 져 있었고 참을성도 생겼습니다.
남편이 마음에 안정을 얻는 것은 내가 아무리 부족해도 나를 버리고 도망가지 않는 아내가 있다는 것에 대해 친척들에게 자랑을 하곤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가 찬송가 가사와 곡을 다 외운 것이 150여장이 되었습니다.
1999년 11월 17일 그는 꿈처럼 가버렸습니다.
마지막 투석을 하는데 너무 괴롭다고 하면서 중도에 그만두었습니다. 그 다음 번에는 가서 산소호흡기를 꽂고 투석을 했는데 말짱하게 기분이 좋아져서 서울에 있는 아들딸에게 전화를 하면서 내가 천국 문 앞에까지 갔다가 왔는데 그것은 전적인 네 엄마의 공이 크고, 막내가 나를 업어서 병원에 데려다 주어서 정말 고맙게 생각한다고 하면서 웃으며 농담을 하고는 바로 그 이튿날 그는 의식이 없는 상태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는 눈을 볼 수 있었을 때는 주님의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육체에 어둠이 왔을 때 주님의 빛은 그의 온몸과 영혼에 비취기 시작했고 그로 인하여 우리 집에는 영적인 축복이 시작되었습니다.
그가 가신 후 바로 그 이듬해인 2000년 3월 ( 아들은 전도사 생활을 몇 년 한 뒤) 목사 안수를 받게되었고, 두 딸들은 목사의 아내로 내조하고 있습니다.
간증은 14년 후에나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좀 이른 감이 드네요. 지금 홀로 남아있는
제게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와 함께 있단다..." 하시는 것 같아 외롭지 않게 살고 있습니다.
더욱 감사함은 사영모 가족들이 곁에 있어서 외롭지 않습니다.
남편은 9남매의 맞이로써 동생들을 모두 교육시키고 결혼 시켜서 지금 6남매는 모두 미국에 가 있습니다.
고난을 직접 당하신 분은 물론이거니와 곁에서 함께 동참한 제가 이제사 깨닫고 보니 하나님의 광야대학을 거쳐 나온 것일 줄이야...
그 무겁던 사망의 몸을 벗고 나면 홀가분할 줄 알았는데 그 사망의 몸은 바로 나였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주님이 오라고 부르실 때까지 날마다 나를 이기며 사망의 몸을 이기며.....
주님만 바라보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1991년 8월 4일 주일 !
그 날은 세상의 모든 빛이 다 가리워진 날이었습니다.
우리 집에는 그로부터 늘 어두움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교회에서는 장로이고 지역에서는 유지이고, 약사이며 가장이신 저의 남편이 실명을 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평소에 당뇨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한번도 아프다거나 몸이 피로를 느낀 적이 없이 30년간을 약국을 경영하면서 늘 남들에게 나누어주고 베풀어주며, 교회 개척을 2곳 하면서, 우리가 살 집을 짓기 전에 교회를 먼저 세우고 난 뒤에 지금의 이 집을 짓게 되었습니다.
91년 5월 초순 어느 날, 외적으로는 아무 하자가 없어 보이는 남편이 영적으로는 왜 그리 답답한지, 진정한 부부와의 대화가 되지 않았고
심령이 통하지 않았던 터라 그날 따라 그 남편을 위해 통곡을 하며 성령 님께서 인도 하시는 대로 거의 1시간 정도 눈물로 기도를 드렸습니다.
눈이 퉁퉁 붓기까지 했는대도 남편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고 무감각하였습니다.
내가 기도를 한 그 며칠 후 남편은 한쪽 눈에 이상이 온 것 같다면서 안과에 가셨다가 온 후부터 두려움과 불안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리하여 새벽기도회를 같이 나가게되었습니다.
이유인즉 당뇨 합병증으로 망막 에 이상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한쪽은 벌써 많이 진전이 되어 있어서 손을 쓸 수가 없는 상태이고 다른 한쪽을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그것도 종합병원에 가서 방사선 치료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5월- 7월 사이 치료를 받는다고 대구 경대병원에 가서 2-3시간쯤을 기다렸다가 차례가 되면 기계가 고장이 났다고 하여 헛걸음하고 돌아온 적이 2번 있었고 2번 정도 치료를 받던 중에 실명을 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주일 아침 새벽기도회를 같이 갔다와서 당신은 더 자고있었고, 나는 그 당시 중등부 교사인터라 일찍 교회에 갔다가 모든 봉사를 마치고 오후 2시정도 되어서 집에 들어오니...이상한 광경이 벌어졌습니다..
아침에 누워있던 그 자리에 그대로 누워서 물에 빠진 사람처럼 손을 흔들며 허우적대는 시늉을 하며 나를 불러들였습니다.
이상한 기운이 감도는 것을 직감하며 곁에 앉으니... 하는 말...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듣고 놀라지 말라고... 내가 지금 아무 것도 안 보인다고... 아침에 잠을 깨서 눈을 떠보니 깜깜해서 꿈인가 하여 살을 꼬집어보니 꿈은 아니고
정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 지금까지 가만히 누워서 곰곰히 생각을 해 봤는데 이제 나는 살지는 못 할 것 같으니 당신이 정신 바짝 차리고 남은 아이들 공부 마저 시키고, 결혼시키고 이 가문을 이끌어 나가기 바란다.... 이렇게 유언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에 정말 나의 힘이 아닌 주님의 담력이 나를 사로잡았습니다.
어디에서 나온 침착성인지 내가 놀랄 정도의 잔잔함을 느끼며... 일단 그를 안정시켜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보세요, 당신! 눈이 어두운 것하고 생명의 죽고 사는 것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 이예요... 아이들 문제...걱정 말아요..
20세 이상 키워놓은 우리아이들 어디에다 내놔도 저들의 길을 다 잘 갈 수 있으니 걱정말고 내 걱정도 마세요...집 있고 점포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살펴 주실텐데 왜 못살겠오...
지금 당장 할 일은 일단 아침식사를 못하고 있는 당신이 밥을 먹는 일이고, 그리고 마음을 가라앉혀서 어떻게 하면 이 병을 치료할 수 있을까? 어떻게 수술을 해야할까... 그 문제가 급선무입니다.
차분히 그렇게 말하니까 후유...하고 한숨을 내쉬며 당신이 그렇게 생각해 주니 한결 마음이 놓이는구나... 하시며 주방으로 따라나섰습니다. 사방 전후 좌우 분별을 못 한 체 정말 언덕에서 떨어진 심정으로 우리 부부의 시련의 분투는 시작되었습니다....
그 해 9월 어느 날 서울대학 병원에 갔다가 수술 예약을 10월 중순으로 날을 잡아놓고 다시 집으로 왔습니다.
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과 중도에 실명한 사람과의 차이 점이라면 중도에 실명한 사람은 정신적인 타격 - 그 충격이 너무 커서 안 보인다는 그 자체보다 실명 그 자체를 수용하기가 정말 힘드는 것이었습니다.
10월 어느 날 병원에 입원하였을 때 제일 먼저 찾아온 이는 맏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서울에서 신학대학원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 벌써 시험을 쳐서 입학을 했어야 할 아들이 시간만 보내고 밍기적 거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 와서는 한다는 첫마디가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하나님 ! 내가 정말 신학을 해서 목사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어떤 표적을 보여주세요....라고 했는데 왜 그 표적이 하필이면 우리 아버지냐고 했습니다.
나는 그에게 한 첫 말이 네가 이래도 머뭇거리고 있을테냐? 라고 했지요.
하루아침에 완전히 뒤바뀐 삶의 패턴을 적응해 나가느라 죽을 고생을 온 가족이 모두 함께 겪어야 했습니다.
신학교 기독교 교육학과에 재학 중이던 두 딸은 휴학 계를 내어야 했고, 아들은 그 때 부터 결심하고 신학교 시험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사망의 몸이 무엇인지를 조금은 알 것 같았습니다. 산사람과 죽은 사람의 몸을 함께 얽어 매어놓은 듯한 나날의 움직임이 바로 그것이라고...
그러는 가운데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한 5년 정도의 세월이 흐른 후에 당신은 조금씩 영적으로 성숙해져 가고 있었습니다.
나는 한 마리의 잃은 양을 기르는 목자의 심정으로 날마다 그에게 꼴을 먹였습니다. 성경 테이프.. 찬송가 테이프를 들려주며, 찬송가 가사를 외워서 안보고도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내가 직접 불러서 가사를 반복하여 읽고 곡을 붙혀서 녹음하여 주면 잘 못했다고 던져버릴 때도 있었습니다- 그렇게도 아팠던 아픔의 세월이지만 그래도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6년의 세월이 흐른 후 어느 날 그는 숨쉬기가 힘들다고 하여 병원에 갔더니 신장 기능이 약해서 투석을 해야한다고 했습니다.
요즘은 기계시술이 잘 되어 있어서 혈액투석을 하면서도 그런대로 건강을 유지하며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틀에 한번씩 일주일에 세 번을 앞못보는 사람을 데리고 다니면서 혈액투석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나도 너무 과로한 이유인지는 몰라도 안면마비가 와서 얼굴이 균형을 잃게되었습니다. 전 교인들과 친척 중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저 집에 무슨 죄가 저리도 많아서 겹치기로 시련을 당하고 있는가? 라고 하는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심을 믿었습니다.
집에는 항상 성경 말씀...아니면 찬송가 소리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한번은 이웃에 있는 작은 교회에서 석유를 배달해 달라고 부탁을 한 모양인데 저의 집 대문 벨을 눌러서 나가보니 여기가 교회예요? 하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찬송소리를 듣고 착각을 했던 모양...눈을 잘 못 보는 대신 소리가 크게 들려야 속이 시원한 가봐요.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었습니다.
온 시민이 다 보는 앞에서 장님의 손을 잡고 다니는 내 모습은 바로 내 교만과 아집을 깨뜨리기 위한 하나님의 교육현장이었지요.
그러는 중에도 자녀들은 다 제 갈 길을 찾아서 결혼을 했고 졸업을 하고,,, 군대도 갔다오고.. 그렇게 8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남편의 그 급하고 강한 불같은 성격은 많이 온유해 져 있었고 참을성도 생겼습니다.
남편이 마음에 안정을 얻는 것은 내가 아무리 부족해도 나를 버리고 도망가지 않는 아내가 있다는 것에 대해 친척들에게 자랑을 하곤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가 찬송가 가사와 곡을 다 외운 것이 150여장이 되었습니다.
1999년 11월 17일 그는 꿈처럼 가버렸습니다.
마지막 투석을 하는데 너무 괴롭다고 하면서 중도에 그만두었습니다. 그 다음 번에는 가서 산소호흡기를 꽂고 투석을 했는데 말짱하게 기분이 좋아져서 서울에 있는 아들딸에게 전화를 하면서 내가 천국 문 앞에까지 갔다가 왔는데 그것은 전적인 네 엄마의 공이 크고, 막내가 나를 업어서 병원에 데려다 주어서 정말 고맙게 생각한다고 하면서 웃으며 농담을 하고는 바로 그 이튿날 그는 의식이 없는 상태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는 눈을 볼 수 있었을 때는 주님의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육체에 어둠이 왔을 때 주님의 빛은 그의 온몸과 영혼에 비취기 시작했고 그로 인하여 우리 집에는 영적인 축복이 시작되었습니다.
그가 가신 후 바로 그 이듬해인 2000년 3월 ( 아들은 전도사 생활을 몇 년 한 뒤) 목사 안수를 받게되었고, 두 딸들은 목사의 아내로 내조하고 있습니다.
간증은 14년 후에나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좀 이른 감이 드네요. 지금 홀로 남아있는
제게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와 함께 있단다..." 하시는 것 같아 외롭지 않게 살고 있습니다.
더욱 감사함은 사영모 가족들이 곁에 있어서 외롭지 않습니다.
남편은 9남매의 맞이로써 동생들을 모두 교육시키고 결혼 시켜서 지금 6남매는 모두 미국에 가 있습니다.
고난을 직접 당하신 분은 물론이거니와 곁에서 함께 동참한 제가 이제사 깨닫고 보니 하나님의 광야대학을 거쳐 나온 것일 줄이야...
그 무겁던 사망의 몸을 벗고 나면 홀가분할 줄 알았는데 그 사망의 몸은 바로 나였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주님이 오라고 부르실 때까지 날마다 나를 이기며 사망의 몸을 이기며.....
주님만 바라보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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