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2. 1. 11:22ㆍ신앙간증
성령 체험후 본격 신앙의 길로
1979년 6월6일 아침. 체중 100㎏이 넘는 28세의 거구가 하숙집에서 일어나지 못해 끝내 의정부 일신의원으로 실려갔다. “젊은 사람이 당뇨병에 걸릴 확률은 거의 없는데….”
혈당치가 450이었다. 내과의사로서 당뇨병 환자를 보는 것은 처음이라며 어떻게 치료해야 할지 난감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면서 오히려 의사가 더 걱정스럽다는 듯 연방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넘쳐나던 힘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하루에 골프공을 1000개 이상씩 날리고 시간만 나면 80㎏짜리 역기를 들어올렸던 그 힘이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 경험은 훗날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머리카락을 잘렸을 때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한 처지(삿 16:19)를 실감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줬다.
방법이 없었다. 회사에 당뇨병이란 통보를 하고 입사 1년만에 고향인 여산으로 향했다. 용산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공주를 거쳐 여산까지 7시간이 걸렸다. 차창 너머로 보이는 시골 풍경만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어느새 두 줄기 눈물이 턱 밑으로 뚝뚝 떨어져 바지를 적시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눈물인지조차 몰랐다. 살갗이 가려워 긁기를 반복하다가 나중에 알게 됐다.
고향집에는 아버지와 할머니만 계셨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시골학교 교장선생님을 역임했다. 교육자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내게 거는 기대는 사뭇 달랐다. 그런데 아무런 소식도 없다가 당뇨병에 걸려 회사를 그만두고 기진맥진해 고향으로 돌아온 내 모습을 보면서 두 분의 기대가 깡그리 무너져내렸다. 나를 앞에 두고 두 분은 할 말을 잊은 채 한참 동안 먼 산만 바라봤다.
할머니는 인근 한약방을 돌아다니면서 온갖 약초를 구해 탕재를 만들어줬다. 그리고 무당을 불러 굿을 했다. 당뇨병에 대해 아무런 지식이 없었던 할머니로서는 그것이 유일한 처방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만사가 귀찮았다. 밤마다 무당이 찾아와 알아듣지 못한 주문을 외우곤 했다. 몸은 더욱 쇠약해지고 정신은 피폐해졌다. 숟가락도 잡을 힘조차 없었다. 누워서 일어나는데 걸리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예 일어나기조차 힘들었다. 눈을 뜨고 있는 때보다 잠을 자는 시간이 더욱 괴로웠다. 잠만 자면 죽는 꿈을 꿨기 때문이었다. 가위에 눌리고 정체불명의 물체가 나를 어디론가 끌고가는 꿈은 신경쇠약과 공포감,영혼의 피폐를 불러왔다. 몸에 뼈만 남고 흉한 몰골로 변해갔다. 잠을 통한 영적 고통은 나를 죽음의 경지로 내몰았다.
“죽음은 이렇게 시작되는구나!”
그러던 어느 날,같은 마을에 사는 이선규(여산교회) 장로가 찾아왔다. 이 장로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조용히 기도만 하고 대문을 나섰다. 짧은 말 한마디를 남기고….
“이제 때가 왔구먼.”
이 장로는 다음 날 또다시 찾아왔다. 예배를 드리자며 손을 꼭 붙잡았다. 그 순간,당뇨병으로 침침하던 눈이 환하게 밝아오면서 몸이 서서히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뭔가 이상했다. 짓눌림이 사라지면서 마음에 평온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이 장로는 설교 도중 내게 성경말씀을 음미하면서 직접 봉독하라고 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 4:2)
‘치료의 광선’은 내게도 임하기 시작했다.
예배는 뜨거웠다. 이선규 장로는 온몸을 땀으로 흠뻑 적셨고 나는 얼굴이 뜨거워서 어쩔줄 몰랐다. 얼굴에 불이 붙은 것처럼 뜨거웠다. 방바닥을 굴러다녔다. 너무 이상해 손으로 얼굴을 만져봤다. 이 장로가 얼굴에 손을 대면 뜨거움이 더했다. ‘치료의 광선’이 내게 임한 것이다. 그 광선은 말씀과 이 장로의 손을 통해 강하게 전달됐다. 훗날 이것이 성령 체험이었음을 알게 됐다.
이 장로는 예배를 드린 후 이렇게 고백했다. “너희 가정을 위해 20년 동안 기도해왔다.”
당뇨병을 앓기 이전,이 장로가 주일 아침 집에 찾아오면 아버지는 주무시는 체하면서 깨워도 일어나지 않으셨다. 그 순간 이런 광경이 머릿속에서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장로는 그런 아버지와 미신에 붙잡혀 있는 할머니,그리고 장남인 나를 위해 20년 동안 기도하면서 때를 기다렸다는 것이다.
예배는 거의 매일 드려졌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할머니가 불렀던 무당이 무서워 도저히 집에 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무당은 “종화네 집에 예수신이 붙었다”면서 “그 신을 몰아내지 않으면 종화가 죽게 될지도 모른다”고 할머니를 혼란에 빠뜨렸다. 무당은 집에 오지 않고 자신의 집에서 굿을 했다. 할머니 역시 무당집에 찾아가 굿에 동참하곤 했다. 하지만 이런 혼란은 잠시뿐이었다. 서서히 기력이 회복되고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내 눈동자로부터 확인한 할머니는 “무당귀신보다 예수신이 더 강한 것 같다”면서 “예수신이 붙은 이선규 장로를 자주 집에 오게 하라”고 맘을 바꾸셨다. 그리고 무당과 관계를 끊어버리고 말았다.
누운 상태에서 손목을 돌릴 수 있게 됐고 발목도 움직였다. 전에는 숟가락을 잡으면 힘이 없어 방바닥에 떨어뜨렸으나 음식도 먹을 수 있게 됐다. 드디어 1979년 9월1일 난생 처음 당시 양교철 목사가 시무하던 전북 익산시 여산교회에 출석했다. 집에서 교회까지는 걸어서 보통 20분쯤 소요됐으나 2시간이나 걸려 도착했다. 중간에서 10번 이상 쉰 것이다.
이 장로는 교회에서 100여뻍 떨어진 곳까지 마중 나와 나를 덥석 껴안았다. 나보다 이 장로가 더 기뻐했다. 예배 내내 나도 울고 이 장로도 울었다. 흐르는 눈물이 폭포수 같았다. 휴지로 눈물을 닦아냈지만 역부족이었다. 내 얼굴에 흐르던 눈물을 닦아주던 이 장로도 더 이상 감당하지 못했다. 한 성도가 흰 수건을 가져다줬다. 수건으로도 흐르는 눈물을 다 닦아낼 수 없었다. 방법이 없어 겉옷을 벗어 얼굴을 감싸안았다. 그날 예배는 눈물로 시작해 눈물로 끝났다. 평생 흘릴 눈물을 한 번에 쏟아부은 느낌이었다.
변화의 바람은 이렇게 눈물로부터 시작됐다. 그때부터 성경을 읽고 교회 봉사활동에 참여했다. 매주 감사헌금을 드렸고 새벽제단을 쌓아갔다. 이 장로는 처음부터 철저히 신앙의 원칙을 가르쳤다. 성경 말씀이 그야말로 뼛속 깊이 사무치며 심금을 울렸다.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시 19:10)라는 시편기자의 고백이 바로 나의 고백이었다.
성경 말씀은 내 입에서 정말 송이꿀이었다. 당뇨병 증상은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에 입안이 금세 마르곤 했다. 하지만 성경을 큰소리로 읽으면 신기하게도 입안에서 침이 분비되면서 단맛을 느껴졌다. 실제로 성경 말씀이 송이꿀보다 더 달게 느껴졌던 것이다.
정리=남병곤 편집위원 nambgon@kmib.co.kr
◇이종화 대표는=빛과소금교회 장로로 스포츠의 실기와 이론을 겸비한 전문 사역가이자 CEO다. 유도 6단,태권도 5단,격기도와 합기도 및 용무도 각 7단 등 전체 무도 합계 공인 32단이다. 용인대학 유도학과를 졸업하고 경영학과 체육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한국호텔관광학회와 한국스포츠산업경영학회 및 양주시 골프협회 부회장,전주대 국제경영대학원 관광경영과 겸임교수,용인대 체육학대학 골프학과 객원교수 등 20여개의 직함을 갖고 있다. 저서도 논문을 포함,10여개에 이른다. 하루 2시간30분 기도하고 한달에 3일 금식기도하며 선교의 사명을 감당키 위해 라틴아메리카 코헨대학에서 신학박사과정을 이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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