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2. 16. 10:58ㆍ좋은 글, 이야기
잘못된 성경번역의 한계성을 넘어서 (1)
대한성서공회와 성경공회가 만든 성경을 필두로 다른 출판사에서 제작한 새 번역, 쉬운 성경, 킹 제임스 성경 등 다양하게 번역되어 나왔지만 혼란만 야기하고 있을 뿐, 한국기독교 역사에 남길 만한 성경은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현재 개역성경으로 인해 많은 영혼들이 은혜를 받고 구원을 받은 성경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올바른 전달에 있어서는 수정해야 할 곳이 공식적으로 75,000여 군데인데 이것을 개정한 개정 개역판은 원문을 제대로 검토하지 않은 상태에서 (임의로) 개정하여 문제를 더욱 야기시킨 상태이다. 오히려 올바르게 개정한 반면에 개역 성경이 제대로 번역한 것을 틀리게 번역해 놓은 구절도 수도 없이 많다.
개정감수위원회의 서기였던 김중은 교수(현 장신대 총장)와 도한호 교수(현 침신대 총장) 시간에 너무 쫓겨 원문 확인없이 개정될 우려가 있다고 제안한 바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감행해버렸다고 한다. 심지어 공회의 총무였던 민영진 목사는 ‘미흡한 부분은 장기적인 2차 개정 때(2015년, 2025년) 반영하면 된다.’고 하는 무책임하고 안일하며 위험천만한 주장을 한 바가 있는 상황에서 한국교회는 잘못된 성경번역의 한계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아무리 정확한 번역판을 내놓는다고 하더라도 성경의 본질에 입각한 개념정리가 되지 않으면 번역의 한계성에 봉착하게 된다. 따라서 지금까지 올렸던 칼럼에서 몇 가지를 정리하며 번역의 한계성을 넘어서야 할 것이다.
요한복음 1장 16절에“우리가 다 그의 充滿한 데서 받으니 恩惠 위에 恩惠러라”는 말씀이 있다. o[ti evk tou/ plhrw,matoj auvtou/ h`mei/j pa,ntej evla,bomen kai. ca,rin avnti. ca,ritoj\ 은혜 위에 은혜라는 의미는“은혜를 제대로 받게 되면 여러 방향에서 은혜가 온다”는 의미임을 깨닫게 되었다. 성경 속의 귀한 비밀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신비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은혜를 올바르게 받기 시작하면 계속 은혜가 다가온다는 의미임을 알았을 때의 기분은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634 제549호/“은혜 위에 은혜더라”는 진정한 의미는?
부흥이란 단어는 신구약 전체를 통 들어 하바국 3장 2절 뿐이다. 히브리어 원어로는 “하야후”(hey"x;)는 영어의 live 동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 “하야”의 피엘(강조) 명령 형태에 ‘야후’라고 하는 3인칭 목적격 접미대명사가 붙어서 이루어진 단어로 직역하면 “그것을 속히 이루어 주소서”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부흥과 전혀 다른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문장 전후의 문맥으로 본다면 ‘악한 자들에게 내려질 심판을 속히 내려 주실 것을 강력하게 촉구’하는 내용이다. “하나님의 진리를 배워서 얻은 깨달음과 생명을 보호해 주시는 차원에서 악인들을 심판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뜻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진 부활된 생명이 창조주 사상을 호흡하며 내면세계에서 교통할 수 있도록, 사막처럼 홀로 남겨진 자처럼 아무데도 의지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 주님과 연합하여 교통할 수 있도록 소중하게 울타리를 쳐달라는 의미로 속히 심판해 달라는 것이다. 502 제448호/“부흥케 하옵소서.”에서 부흥이란 의미는?
기독교의 위대한 덕인 아가페 사랑을 희생과 헌신을 요구하는 사랑으로 알려져 왔고 지금까지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요구했던 사랑은 그리고 지금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사랑이 희생이나 헌신을 그리고 순교를 요구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가장 순수한 사랑을 창조적인 사랑을 항상 긍정적이며 궁극적인 목표가 있는 사랑을 요구하신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오직 하나를 위한 사랑, 즉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가 되는 사랑, 주님과 연합이 되는 절대적인 사랑을 추구하시는 것이다. 이런 사랑을 영원한 사랑이라고 성경에서 표현하고 있다.
880 제580호/가장 위대한 德(덕) 아가페 사랑
마태복음 4:23절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며 저희 회당 (안)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안)에서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안)에 (있는)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치시니”라는 문장에서 (괄호) = (안)이란 단어가 반드시 들어가야 올바른 이해가 될 수 있다. 회당 안은 예수께서 가르치는 외적 장소로 이해할 수 있지만 가르침을 받는 상태가 되어진 존재를 의미하고 있다. 935 제628호 / 갈릴리에서 행하신 일에 대한 비밀
마태복음 5장 41절에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십리를 동행해 주라”는 kai. o[stij se avggareu,sei mi,lion e[n( u[page metV auvtou/ du,o)말씀이 있다.
말씀의 원래의 의미는 "길 하나를 달라고 하면 길 두개를 주라"는 뜻으로 미국은 “원(one) 마일을 가기를 원하면 투(two) 마일을 가주라”는 말씀으로 중국 성경은 “한 척을 가기를 원하면 두 척을 가주라”는 말씀으로 번역된 것을 그대로 한글성경에 적용하여 오리를 가게 하거든 십리를 동행하라는 번역으로 발전되었다.
"억지로"라는 단어가 "안가류오"라는 단어인데 "앙겔로스"(천사)라는 단어와 연결되어 있다. 천사라는 앙겔로스가 페르시아 단어에서 파생되어 "우체부"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 ‘우체부’라는 단어가 소식을 “급히, 신속하게 빠르게 전해야 한다”는 내용에서 발전된 단어였다. 그렇다면 억지로 단어가 억지로 강제로 라는 뜻도 갖고 있지만 "신속하게, 자원해서, 기쁜 마음으로, 민첩하게"라는 뜻이 숨어 있는데 ‘억지로’라는 단어에서도 의미를 줄 수 있지만 자기 스스로 진리를 달라고 한다면 기쁜 마음으로 자원해서 신속하고 민첩하게 전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토대로 한다면 "생명이 담긴 진리"(길) 하나를 달라고 한다면 두개의 진리를 주라"는 말씀이 된다. 즉 생명의 복음을 달라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하나만 주지 말고 두 개 이상을 주라는 말씀이다. 또 다른 의미는 ‘둘’이란 히브리적인 개념으로는 ‘반복하다’는 동사에서 파생된 단어로 “생명의 복음을 한번만 가르치지 말고 반복해서 가르쳐주라”는 신비로운 뜻을 담고 있다. 594 제512호 / 과연 이렇게 할 수 있을까?
마태복음 6:33에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한다는 의미는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그리고 내가 하나가 되어 이 땅에서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것이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다. 614 제530호 /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한다는 의미는
산상수훈을 접한 내용으로 본다면 심령이 가난한 상태는 오로지 그 나라와 그 의인 오직 한 가지만을 구하는 상태 하나님의 사상만을 추구하는 존재가 복이 있는 자일 것이다. 애통하는 상태는 오직 하나님의 사상이 이루어지길 원하며 사모하는 애통을 의미한다. 즉 오로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내 안에서 이뤄지기를 간절히 원하는 애통함을 의미한다. 온유한 상태는 하나님의 사상을 구하고 이루기 위해 하나님께 매달려 길들여져 있는 차원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의도하시는 긍휼하심은 하나님의 사상에 매달려 생명을 익혀 나가는 상태가 바로 하나님의 긍휼하심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하나님의 사상을 구하고 이루기 위해 항상 주리고 목마른 갈급한 상태를 의미한다. 560 제498호 /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누가복음 2:36에 “안나 선지자가 매우 늙었더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프로바이노”(προβαίνω)인데 ‘앞으로 나아가다’는 동사로 “하나님과 함께 앞에 있는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는 존재”가 선지자를 의미하며 매우 늙었다는 의미를 갖고 있으므로 단어적인 이해와 설명으로는 성경의 본질을 깨달을 수 없다.
제624호 /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살아가는 삶 (114)
마태복음 12:43~45과 누가복음 11:24~26에 보면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가서 보니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왜 귀신들은 물이 없는 곳을 찾아다닐까? 즉 물이 없는 곳을 찾는 것은 생명의 역사가 없는 곳을 찾고 있음을 의미하고 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으키시는 생명의 역사가 없는 곳을 찾아다니는 귀신들의 몸부림일 것이다.
1026 제894호 / 나중 형편이 전보다 심하게 된 것은 (200)
이렇게 한글로 된 성경이나 원문으로 된 헬라어성경과 히브리어 성경도 단어를 취사선택하여 번역했다고 할지라도 의미 분석을 위한 개념정리가 없다면 성경의 본질과 핵심은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심지어 베드로라는 이름 하나 때문에 세계 2차 대전 당시 터키를 비롯한 동방정교의 중심이 된 주변 국가에 보관된 사본을 없애기 위해 러시아 군에서 뇌물을 주면서 청탁한 일이 있다.
733 제643호 / 베드로의 이름은 반석이란 의미가 전혀 아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말씀을 곡해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것처럼 함부로 성경을 해석하는 오류를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이것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성경을 번역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반역의 죄를 범하는 것이다. 그래서 번역은 반역이란 말이 나온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한국에 제대로 된 성경이 나오도록 기도와 관심과 성원이 필요하다. 또한 이러한 내용의 성경공부가 한국교회 안에 진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말씀이 선포되어야 할 것이다.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
칼 럼 필 자 |
이종남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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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보내주실곳 |
창골산 봉서방카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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