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2. 19. 11:21ㆍ좋은 글, 이야기
잘못된 성경번역의 한계성을 넘어서 (2)
지난 번 칼럼에 이어 성경번역에 대한 한계성을 체감하면서 다시 글을 올린다. 한국교회는 정통적인 한국교리와 신학에 얽매어 주님의 역사를 제한시키고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범주 아래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제자리걸음 정도가 아니라 후퇴하고 있는 모습이 역역하다.
작년에 사해사본전시회를 개최를 위해 개신교단들의 단체와 기관들이 서명하고 광고를 내는데 일조를 한 바가 있다. 사해사본을 갖고 들어온 주최 기관과 후원단체들이 60%이상 유대교에 따른 기관들인데 어떻게 그리스도의 기원을 말할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그들의 상술에 놀아난 것을 한국교회는 알고 있는지 구제단체를 후원한다는 미명아래 개최한 그들이 신약성경을 인정하는가? 그것도 모르고 한국교회는 꼭두각시놀이를 한 것이다.
한국 성경본문연구원에 연구위원이 방문하여 당신들이 신약을 인정하고 예수를 인정하는가? 하는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하고 얼굴만 붉히고 나중에는 경찰을 부르라고 소리만 질러대는 꼬락서니가 볼만 했다.
사해사본이 히브리어 되어 있다고 해서 정통사본이 아니며 수없는 자음과 모음을 조작해 놓은 문서에 불과하다면 세계교회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히브리어 자음을 조작하고 모음을 조작하여 성경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어떻게 견디려고 하는지 궁금하다.
마태복음 1장 18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라는 문장의 문법구조가 현재진행 미래완료형으로 예수의 탄생하심이 역사적인 사건에서 일회적으로 외형상 끝났지만 지금도 사람의 내면적인 속에서 계속 탄생하고 있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현재 성탄절은 예수님의 탄생하심만 축하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아기예수가 탄생한 것을 기념하는 것이며 축하하는 것이다.
374 제359호 / 나의 성탄절(예수님은 탄생은 계속되고 있다) 704 제614호 / 예수님의 성탄은 생일날이 아니다. 1106 제969호 / 예수의 탄생이 지금도 계속 일어나고 있는 이유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나를 만지지 말라”(Mh, mou a[ptou메 무 합투)고 되어 있는데 나를 만지지 말라는 의미와는 전혀 다른 뜻으로 되어 있다. “나를 붙들고 늘어지지 마라”, “나를 붙잡아 두려고 하지 마라” 영어로는 “Don't hold yourself to me” 또는 “Don't cling to me”라고 번역되어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한다면 “마리아야! 이제 수다를 그만 떨고 있을 만큼 무덤 안에서 계속 지체할 수 없다. 아직도 부활에 대해서 잘 모르는 있는 사람이 많다. 부활의 몸인 나와 한 몸이 된 것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연합된 몸으로 된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졌음을 세상에 알리며 당당하게 살아가라”는 뜻을 담고 있다.
808 제711호 / 남자는 만지고 여자는 못 만지게 하신 것은?
다윗(dwID)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서 진리의 적용을 위하여 정해진 과정의 관문을 올바르게 통과한 믿음의 대표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다윗이 신앙의 거성으로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주변의 사람들이 필요적절하게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 중에 요나단(!t'n"Ahy>)은 다윗에게 아주 중요한 친구로 나타나 다윗이 다윗 되게 한 인물로 살펴 볼 수 있다. 요나탄(!t'n"Ahy>)으로 ‘하나님의 법(뜻, 계획)을 이루기 위한 목적을 스스로 실천하여 이룬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는 존재’를 의미한다.
성경에 나오는 이름들의 존재들은 다 하나님의 작품이란 사실을 잊지 말라. 우리는 라반(!b'l)의 이름의 뜻이 “표백하다. 희게 하다”는 뜻으로만 알고 있는데 색깔보다 야콥(bqo[]y:우리가)이 표백당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영감을 담고 있다. 라반(!b'l)도 “하나님의 법으로 세움 받은 사상으로 변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 20년 동안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사상에 의하여 표백되어진 세월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775 제681호 / 다윗과 요나단이 절친한 사이가 된 이유는?
성경에서 말하는 달란트(tavlanton(talanton)는 또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5007 tavlanton(달란톤) tla,w(틀라오 to bear 참다) 5342 fe,rw(페로오 가져오다)와 동일한 원형의 추정된 파생어의 중성 : 균형, 화폐의 단위의 뜻이 있는 한편 무게를 측정할 때 사용된 단위의 뜻도 있지만 ‘균형을 잡다’는 의미가 더욱 강하다.
하나님께로부터 달란트를 받았다는 말은 나와 다른 존재가 서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삶을 영위해 나가기 위해서 균형은 이루는 삶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균형을 잃지 말고 주님과 함께 균형을 이루어야 하며, 타인과 균형을 이루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290 제276호 / 달란트는 균형을 잡아 주는 일
마태복음 26장 31절부터 35절까지의 내용은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할 것을 예언하신 내용이다. 왜 닭의 울음소리에 베드로는 심히 통곡해야만 했는가? 그 닭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성경에 나온 ‘닭’을 다 살펴봐야 하겠지만 ‘닭’(o;rnij 오르니스)이라고 하는 단어를 추적하면 ‘산’(o;roj 오로스)이라는 단어와 근원어로 나타난다. 또한 ‘산’이란 단어를 추적하면 ‘하늘’(ouvranoj우라노스)이란 단어와 동의어 표현하고 있다. 창세기 19:24절에 보면 “하늘 곧 여호와께로부터”라는 문구가 있다. 하늘은 곧 여호와 하나님을 의미하고 있다. 시편 115:16절에 “하늘은 여호와의 하늘이라도”라는 문장을 살펴봐도 하늘은 여호와 하나님을 지칭한다. 즉 주기도문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문장도 내 안에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면 내 안이 하늘이라고 하는 상태를 의미하게 된다. 467 제423호/닭소리에 통곡한 사람들
성경에 "평강, 평안, 평화, 화목"이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1515 ei=rh,nh(에이레네)라고 한다. ei-rw(에이로) "결합하다"(to join)는 단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평화, 번영, 하나가 됨, 고요, 안식, 다시 하나가 되다"는 뜻이 있다. 군대에서 조인트를 깐다는 말이 바로 무릎 관절부분을 찬다는 뜻이다. 정강이 부분을 ‘나’라고 하고 무릎 부분을 ‘예수 그리스도’, 허벅지 부분을 ‘하나님’이라 한다면 서로 연결이 되어 잘 움직여지는 상태가 “샬롬”이라는 차원을 의미한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내가 하나가 되어 아주 부드럽게 활동하는 상태가 바로 평안, 화평을 의미하고 있다.
332 제318호 / 또 다른 뜻을 갖고 있는 평화 (34)
마태복음 8장 3절에 손을 "대시며" 15절에 손을 "만지시며"라는 단어들이 헬라어로 "하프토마이"인데 이 단어의 동의어인 "하프토" 라는 단어는 "불을 켜다, 불을 피우다, 불을 붙이다"라는 뜻으로서 서로 동의어적인 내용이 전혀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프토마이가 ‘만지다’라는 뜻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소속하다, 관계를 갖다"라는 의미를 분석해 보면 단순히 육체를 만지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만지는 것까지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599 제516호 / 마음속에 영혼의 불이 켜지는 은혜
산상수훈에 나오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요”라는 구절에서 온유한 자란 마음의 상태가 온화하거나 인격적으로나 성품적으로 부드러운 사람을 뜻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내용과 전혀 다른 내용을 원어에서 살펴 볼 수 있다. "어떤 동물이나 짐승을 길들이는 상태를 온유"라고 한다.
334 제320호 / 마음을 길들이려면 (35)
요한복음 6장 50절을 읽어보면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를 먹으면 영원히 죽지 않는 영생의 떡으로 말씀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떡을 먹고 무슨 생각이나 행동을 했기에 죽었을까? 하는 의문 속에 다시 성경을 살펴보니 로마서 8장 6절에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7절에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잡념이 생기고 설교를 듣다가 이성적인 판단, 지성적인 이해로 하나님의 뜻을 제한시켜 버리는 것을 말한다.
368 제353호 / 만나를 먹고도 죽은 사람, 609 제526호 / 만나를 먹고도 죽은 사람
말씀의 정확한 번역도 중요하지만 문장과 문장(구절과 구절)이 말하려고 하는 의미를 올바르게 파악하고 관찰하여 전달하는 앞 선 자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선지자가 앞날을 예언하고 환상이나 보고 하는 무속적인 종교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자가 선지자며 예언자임을 직시해야 한다.
한글로 된 성경마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황에서 성경을 번역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래서 책임도 지지 못하는 번역으로 인해 하나님 앞에 가서 심판받는 것은 물론이지만 한국교회 앞에 무엇이라고 변명하려는지 궁금하다. 이것을 바탕으로 설교를 하고 성경공부를 가르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교통법규를 어긴 자들이 하는 말과 똑같이 잘 몰라서 실수했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겠는가? 잘 몰라서 그랬다는 것은 하늘나라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차라리 침묵이나 하던지 벙어리가 되던지 하는 게 낫다. 이왕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대언하는 상황이라면 올바르게 알고 올바르게 전달해야 할 것이다.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
칼 럼 필 자 |
이종남목사 |
|
| ||
칼럼보내주실곳 |
창골산 봉서방카페 |
'좋은 글,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현희 마침내 입을 열다 (0) | 2009.02.19 |
---|---|
평화를 위한 기도 (0) | 2009.02.19 |
모든 조직은 하나여야 (0) | 2009.02.19 |
죄를 머물게 하지 말자 (0) | 2009.02.18 |
든든한 빽 그라운드 (0) | 2009.02.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