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의미를 안다면

2009. 6. 7. 17:54좋은 글, 이야기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의미를 안다면

 

 

  구약에 출애굽기에 나오는 인물 중에 모세를 최고로 꼽을 것이다. 모세(hv,m)라는 의미는 “물에서 끌어낸 존재”라는 개념을 갖고 있다. 그래서 과학적인 용어로 모세현상이라고 까지 불리고 있다. 모세라는 인물을 통해 그리고 그 존재를 대하면 하나님을 만나는 과정에서 나의 정체성을 발견하게 된다.

 

   사람은 배우기 위해 태어난 존재며, 일하기 위해서 배우고 삶을 얻기 위해서 일하는 존재다. 생명의 존중함을 알기 위해서 일하는 것인데 그 목적과 가치를 상실하고 다른 목적과 가치로 일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관계에서 멀어지기 일쑤다. 올바른 일을 하려면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런 존재가 바로 모세라고 할 수 있다.

 

  모세가 애급에서 왕궁생활을 했을 때 40년 동안은 나는 내 힘을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살아왔다. 그러나 미디안 광야 40년은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체념 속에 살아왔다. 그 미디안 광야 40년 동안 모세는 무엇을 했을까? “미디안”(!y"d>m)이라는 곳은 ‘재판하는 곳 즉 하나님의 법을 세워나가는 장소’를 의미하고 있다.

 

  하나님의 법이 세워지게 되면 나 자신이 생활하게 되는 과정에서 아들이 생긴다. 즉 하나님의 법 생명과 성령의 법으로 살아가면 그 법에 의해 실천하는 아들이 태어나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원치 아니하든 열매가 맺혀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마태복음 1장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라는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과 사상을 따라 법을 세우고 살아가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게 되는 아들을 낳게 된다는 귀중한 뜻을 담고 있다.

 

   하나님의 법이 세워지고 나 자신의 주변정리를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게 된다.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자기 부인을 만나고 장인 이드로를 만나는 사건은 하나님의 법으로 인해 정리정돈을 하고 그 법에 의하여 살아감에 따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부쳐주시는 것이다. 이드로(Art.y)라는 의미는 “우수하고 탁월한 이익을 남기는 존재로 목양하는 존재”를 만나 모세를 목양하는 법을 배우는 존재가 된 것이다.

 

  이로 인해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급할 수 있는 지도자로 만든 것이다. 그러나 모세에게는 중요한 결단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양 무리를 치고 있던 모세를 불러 세운다. 자신과 같은 짐승의 속성을 관리하는 상태에서 전도하는 과정 속에 있는 모세를 서편으로 인도해 낸다. 하나님께서 서편으로 인도하신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끝까지 따라가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돈하는 존재로서 하나님의 사역자로 양성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산 호렙(hb'rexo)“하나님의 생각과 의도하심이 채워진 곳으로 향하게 하는 곳”이다. 즉 ‘하나님의 빛이 들어와서 바짝 마른 상태에서 하나님의 의도대로 옮겨진 것’으로 의미하고 있다. 하나님은 모세를 호렙 산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생각과 의도하심을 확실하게 각인시키는 획기적인 사건을 만나게 한다.

 

  여호와의 사자(hA'hy> %a;l.m)는 하나님의 일을 받아 유익함을 주는 존재로서 모세를 떨기나무로 인도하신 것은 무엇일까? 자기가 의지하고 지탱해 왔던 곳으로 이끌고 와서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 속에서 끌어내어 하나님의 이념의 불을 붙여주신 것이다.

 

  내 안에 더럽고 쓸모없는 불의한 속성이 소멸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왜 모세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을 두려워했을까? 많은 분들이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는데 가만히 보면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자신의 일을 하고 있는 이들이 너무나 많다. 죄송하지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장담하는 이들이 있는데 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 일을 하려면 반드시 죽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해야지 해놓고도 자기가 죽을까봐 순종하지 않고 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고 한다면 죽을 각오가 아니라 죽어야 한다. 죽지 않으면 그 분의 뜻을 이루어낼 수가 없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는 것은 죽음을 뜻한다.

  그래서 모세도 그 분의 뜻을 할 수 없다고 반항했다. 아니 성경에 나오는 인물 대부분이 하나님을 향하여 대항하고 반항하고 그 말씀을 따를 수 없다고 항거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도 천사에게 반항했다.(눅 1:29, 34) 심지어 예수께서도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 잔을 내게서 물리쳐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한 바가 있다.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다고 하는 이들에게는 “반드시 너는 할 수 있다”고 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출 3:4) 모세는 하나님의 사자로부터 거듭되는 설득과 기적을 보게 된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마리아에게 천사는 거듭 설득하면서 마리아의 친척 엘리사벳이 늙어서 임신한 것을 예를 들며 설득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눅 1:30~33, 35~36)

 

  성령에 의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작용할 때 표적의 상태만을 추구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음성만 들으면 흥분하는데 차분해 져야 한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다고 모세는 호들갑떨지 않았다. 여기서 불(va)은 무엇을 의미할까? 단순히 우리가 보는 사물적인 불일까? 아니면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를 불러일으키는 다른 불일까?

 

  알레프(a)는 소라는 의미도 있지만 “창조주의 의도를 올바르게 배움”을 의미하고 있다. 쉰(v) 새김질한 이를 상징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서 새김질을 하는 것으로 내 정신 속에 깨달음의 불이 붙어서 배움의 열정이 일어나 내 속의 더러운 악성, 죄성을 태워버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상태가 바로 불을 받은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성령의 불을 받는답시고 뜨거운 불의 체험만 하고 있는 것은 너무나 모르고 하는 행위로서 맨날 뜨거운 불을 받는 집회만 쫓아다니고 있으니 한심하다. 머리에 항상 뜨거운 불이 임하여 고혈압환자로 내 몸이 찌릿찌릿해지기를 원하는 신경통환자가 되기를 원하는가?

 

  모세가 선 곳은 하나님의 거룩하고 구별된 땅이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지배아래 있는 땅으로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곳으로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것이다. 그리고 신발을 벗으라고 명령을 받는다. 즉 자신의 습관에서 벗어나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며 자신 속에 가리고 있는 짐승의 속성을 버리고 하나님의 불로 태움을 받아 하나님의 상태에 들어와서 다스림을 받아야 한다는 귀중한 뜻이다.

 

  그러나 모세는 출애급기 3장과 4장 사이에서 하나님과 기나긴 토론과 변론 속에 표적을 보았지만 자신의 막중한 사명을 요리조리 피하려고만 했다. 출애급기 4:10에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라고 끝까지 항변한다.

 

  이 글을 쓰는 본인도 모세처럼 항변하면서 쓸데없는 이유와 핑계를 댔던 적이 너무나 많다. “저희 부친이 장로의 직분을 받으면 신학교를 가겠다, 아니면 이렇게 해주시면 가겠다.” 등등 피할 구멍을 찾았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러면 너 같은 성질을 가졌고 너 같이 어눌한 자와 같은 그런 자를 찾아와라. 그러면 너를 죽이고 그를 사용하겠다.”고 까지 재촉했다.

이 글을 읽는 분 가운데 아직도 자신이 하나님의 사명을 피하려고 요리조리 궁리만 하고 있거나 순종하기를 거부하고자 자신의 고집을 피우고 있다면 두 손을 들고 항복하고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한다.

 

  모세처럼 이 핑계, 저 핑계를 대고 있다면 그만 두고 포기하고 하나님의 음성과 설득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이 사명이 자칫 신학교를 가거나 목회자가 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되는 상황이라면 죽음이라는 문턱에서 과감하게 죽어야 한다. 주의 말씀을 따름은 나들이나 소풍가는 것이 아니라 곧 죽음을 의미한다.

 

  그 죽음은 나 스스로 할 수 없으며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나의 정과 욕심을 가진 옛 사람이 죽어야 한다. 죽지 않고는 하나님의 말씀 그 어느 것도 받아들일 수 없으며 깨달을 수 없다. 성령과 결합되지 않으면 즉 주님과 함께 한 몸이 되지 않으면 성령 충만의 경험을 할 수 없으며 성령의 열매도 맛볼 수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당신 속에 의지하고 지탱해 왔던 떨기나무에 하나님의 불이 붙었다면 끄려고 하지마라.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면 이유막론하고 신발을 벗어라. 자신의 권리와 주장을 포기하고 자신의 습관에서 벗어나 하나님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죽음은 곧 하나님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을 향해 인도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죽음으로 마지막을 장식하게 가만 놔두지 않는다. 죽음의 건너편에 또 다른 세계를 인도하시는 하나님, 그 과정을 통과하기 위해 “나” 라는 존재에게 맡기시는 일을 시작하기 전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그 분으로부터 설득을 당해야 한다. 그런 설득을 위해 나타나는 표적이나 기적만이 신앙의 전부가 아니며 하나님의 역사의 전부도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주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죽는 것이다. 그 죽음을 무서워하지 마라. 두려워하지 마라. 주의 명령에 “예”라고 하는 것이 바로 죽음이다.사도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는 의미를 이제는 알 것 같다.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 

 

     

칼  럼  필  자

이종남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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