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6. 8. 11:03ㆍ좋은 글, 이야기
메뚜기콤플렉스
얼마 전, 한 여배우의 자살로 온 세상이 떠들썩했던 기억이 납니다. T.V에서 생중계되는 장례식! 그를 사랑한 많은 사람들의 눈물과 안타까운 몸짓을 보면서, 가족, 친구, 지인, 팬..
저토록 많은 사람들의 사랑으로도 채우지도, 씻지도 못하고 끝내 죽음에 이르는 병이된
그 절망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를 생각하다가, “세상이 온통 홍수로 물 천지인데도 마실 물이 없어 죽어간 그런 사람의 모습이 떠올렸는데..
이번엔 역사적 공인(公人)인 전임 대통령이 투신자살을 했습니다. 그래도 대한민국의 대통령이요 한시대의 지도자였습니다. 전국 309개 분향소를 다녀간 조문객수가 약 500만명이요, 64여억원의 뇌물수수건이 연루된 이번 국민장에 소요된 비용이 45억이 넘는답니다, <사회적 타살>이라 부르며 마치 우리 모두가 다 가해자인양, <정치적 타살>이라 부르며 자살의 원인과 결과가 누군가에게 있는 듯,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하면서 세상은 온통 추모의 물결입니다. 정치적 엘리트주의와 포플리즘의 진검승부(眞劍勝負)를 보는듯한 이 사건 뒤에 감추어드는 자살을 믿는 자로서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입신양명의 최권좌에 앉은 자도 삶의 번뇌와 고통 앞엔 우리와 별 다름 없는 듯. 자살이란, 존재로서 삶이 주는 고통이 무(無)의 죽음이 주는 공포를 넘어설 때 가능한 행위라 합니다. 사즉생(死卽生)이니 생사불이(生死不二)니 어떤 말로도 자살은 결단코 명예로운 공인의 죽음은 아닙니다. 불신자라해도 삶을 소홀히 여길 수는 없지만, 특히, 믿는 자의 죽음은 무(無)가 아니요, 어떤 의미에선 생명(生命)이요 소망(所望)이기 믿는 자의 자살을 금기시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죽을 용기 있다면 살 용기도 있다거나, 죄가 없다면 살아 끝가지 결백을 밝혀야하고, 죄가 있다면 떳떳이 죄 값을 치르고 반성의 삶을 살면 될게 아니냐는 생각은 정말 너무도 순진한 생각 같습니다. 무엇인가를 지키기 위해 자기 자신을 버리는 이 극단성향! 감당할 수 없는 자신과 세상을 향해 자기의 생명(生命)을 무기(武器)로 사용하는 이 아이러니 속에서
그토록 지키고자 한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정보의 초고속화를 자랑하는 이 소통(疏通)의 시대에 <본질적인 소통>은 결여되어있고,
죽을 만큼 외롭고 힘든 자들의 삶을 돌아볼 여유가 없듯, 감당할 수 없는 고통과 짐을 나눌 상대가 또한 없는 헛된 인간관계가 문제요, 이 관계의 변화와 다양성속에 깊어만 가는 소외(疏外)가 문제일 상도 싶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하나님과의 소통을 도구로, 이신칭의(以身稱義)란 관계를 화평의 선물로 받은 그리스도인은 반문화적인 삶에 익숙한 부류에 속하나, 닥친 문제가 믿음만으로는 해결을 할 수 없어 “하나님은 고통의 이 순간 어디에 계시는가?“정말 하나님이 내 문제에 개입하고 계신가? 라는 실존적인 의문에 절망하는 순간이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주님도, 다윗도 그러한 불통(不通)의 순간에 견딜 수 없는 심정을 토해 내십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막 15;34)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시 22; 1)
세상에는 움켜쥐어서 얻는 것이 있고, 움켜쥠으로써 오히려 잃는 것이 있습니다. 팔레스타인(가이사랴)에서 바울 일행을 태우고 터키(루기아)로 향하던 배가 뵈닉스 항을 향해 출발한지 얼마 못가서 광풍과 성난 파도를 만나 중심을 잃고 요동을 칩니다. 이 때 노련한 뱃사람들이 취한 행동은 살아남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린 것이었답니다. 마침내 곡물(밀)까지 버린 후에야 그들은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행 27장) 이렇듯 때에 따라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것들조차도 버려야할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버려서는 안 될 것이 있답니다. 배 안에 있던 자의 태반은 구원의 여망마저 없었으되, 바울과 그의 동료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믿었고 결국 이 믿음은 그들을 살렸습니다. 믿는 자로서 우리의 삶에 위기의 광풍이 밀어닥칠 때 과감하게 버릴 것을 버려서 삶의 무게를 줄이되 또한 믿음만은 지켜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답니다.
한번 들어가면 영영 빠져나올 수 없는 미궁 속 반인반우(半人半牛)의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치기 위해 그곳에 들어간 <테세우스>가 살아나올 수 있었던 것은 실타래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미궁에 들어갈 때 실 끝을 문설주에 묶어놓았고, 미궁을 헤매는 동안에도 끝까지 실 끝을 놓지 않았습니다. 이렇듯 우리 인생이 헤어날 수 없는 기가 막힐 웅덩이와 절망의 수렁에 빠질 때 어떤 상황에서도 모든 것을 다 버려도 믿음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광풍의 위기에서, 절망의 미로에서 빠져나올 수 있답니다.
우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걸작이요, 하나님이 자신의 목숨을 버릴 만큼 사랑하신 피조물이지만, 이성의 오만으로 신(神)을 잃어버린 이 시대, 오늘을 사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놓치고 인생의 좌표를 까먹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진정한 왕이신 아버지 하나님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미운오리새끼처럼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인생길에서 방황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대통령도 절망하여 버린 세상에 무슨 희망이 있겠느냐고도 푸념 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세상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토록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16)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 1)“자기 태에서 태어나 그 젖을 물리던 어미가 그 자식을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고(사49;14)말씀하십니다,
유행성이 강한 자살자가 많은 사회는 병든 사회랍니다. 이 병든 사회의 특징은 하나님의 공의(公義)가 상실된 사회를 말 한답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대신하는 인간의 공의가 판을 치는 사회는, 긍정의 힘과 믿음의 힘, 영성과 지성을 혼동하다 못해 같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적극적 사고방식, 신념의 마력, 마인드 컨트롤 등, 다 인간의 힘과 능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자기정진에 의한 자기완성을 추구하는 헛된 종교들은 행위(Work)를 역설하나, 그러나 우리의 복음은 은혜(Grace)를 역설합니다,
기독교신앙은 자기구원(save yourself)을 위해 우리가 무언가를 힘써 해보자(Do)가아니라, 이미 하나님이 다 해놓은 것(Done)을 믿고(belive) 감사함으로 순종하는 “자기부정(deny yourself)을 말합니다.
자신의 힘과 능을 기준하여 벅찬 문제를 해결하려다 보면, 가나안 땅을 정탐했던 열두 명의 족장 중 갈렙과 여호수아를 뺀 열 명의 족장들이 범했던 소위 현실의 높은 벽에 짓눌린 낙심과 실망의<메뚜기 콤플렉스>에 빠집니다. 세상 앞에 서면 우리는 이방인이요 나그네이나, 하나님 앞에서면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소유된 백성이기(벧전2;9) 당연히 세상과의 비교는 실패의 지름길이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성공의 지름길이 됩니다. 이렇듯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은 우리의 운명을 바꿉니다.
체념도 하나의 슬기로움인 것입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3; 6) Man's extremity is God's opertunity. 나라 안 밖으로 너 나 할 것 없이 어렵고 힘든 때입니다. 우리가 고통 중에 헤맬 때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신 게 아니라, 말없이 그 고통을 함께 나누고 계신다는 사실에 우리 모두 위로 받기를 원합니다.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
칼 럼 필 자 |
에이-맨 서울 양천구 목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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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보내주실곳 |
창골산 봉서방카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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