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3. 11. 09:33ㆍ좋은 글, 이야기
우리들도 이 세상 사람들을 보며
유명한 성 프랜시스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추운 겨울 날 프랜시스는 말을 타고 가는데 웬 거지가 추위에 벌벌 떨며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프랜시스는 말에서 내려 자기가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거지에게 입혀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거지는 벌벌 떨면서 옷을 입어도 추우니 나를 꼭 안아 주실 수 없냐고 물었습니다. 그 거지는 더러운 진물이 주르르 흐르는 문둥병환자였습니다. 프랜시스는 더럽고 또 병이 옮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그 거지를 꼭 안아 주었습니다. 그런데 사랑으로 안아 주었던 거지는 간데없고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네가 이처럼 나를 사랑하는 줄을 내가 알았다.” 이후로 프랜시스는 부잣집 아들로서의 상속도 져버리고 수도를 해서 훌륭한 성 프랜시스가 되었습니다. 프랜시스에게는 긍휼이 있었기에 자신의 추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옷을 벗어줄 수 있었으며, 자비가 있었기에 더럽고 병든 몸을 안아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가운데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피를 흘리며 거반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곳을 지나던 제사장은 그냥 지나치고 맙니다. 또 레위인이 지나가지만 그 역시 지나쳐버립니다. 그러나 그 길을 가던 어느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자를 발견하곤 기름과 포도주로 싸매주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에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주막 주인에게 그를 보살펴 달라고 부탁까지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가는 길은 약 35km 길로 내리막이면서 골짜기가 많은 험한 길이었는데 상인들을 노리는 강도의 출몰이 잦았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당시에 일어났던 실제 상황을 인용하신 것 같습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하고 묻는 질문에 대한 답을 주시기 위해 이 사건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한 사람이 강도를 만나 모든 물건들을 빼앗기고 거반 죽게 된 채로 내동댕이쳐졌습니다. 그 때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곁을 지나며 그 광경을 보게 됩니다. 제사장은 이스라엘의 예배를 보존하면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중재했던 사람으로 아론의 후손들이 그 일을 감당했습니다. 아마 그곳을 지나던 제사장은 자신의 임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해 봅니다. 그는 시체와 같은 부정한 것을 멀리해야만 하는 정결의식을 누구보다도 철저히 지키는 율법주의 자였습니다. 그의 눈에는 자신에 대한 의무만 보였지 이웃에 대한 사랑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또 레위인이 그곳을 지나가며 강도만난 자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성전에서 제사장을 보좌하고 성전의 기물들을 운반 보관하는 역할을 담당했던 레위인도 제사장과 같은 이유로 강도 만난 자를 외면하고 맙니다. 그도 자신에 대한 책임만을 보았지 타인에 대한 아픔은 보지를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되었다고 자부하는 제사장과 레위인은 하나님에 대한 경건만 강조하면서 이웃의 아픔은 철저히 외면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는 세상과는 구별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하면서 우리들을 일부러 세상의 아픔과는 담을 쌓으려하는 마치 세상은 속된 것이라고 규정하려는 위선적인 율법주의자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강도만난 자가 쓰러져 있는 그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서 공통점과 차이점을 분명하게 보여 주시면서 우리의 이웃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강도만난 자를 제사장도 보았고 레위인도 보았고 사마리아인도 똑같이 보았다고 했습니다. 이들 모두의 공통점은 보았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차이점 하나는 두 사람,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를 보고 아무 것도 느끼지 않고 지나쳐 버렸지만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눅10:31-33)
사마리아인은 비록 쓰러진 사람이 자신의 동족이 아니며 심지어는 자신을 멸시하며 조롱하는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강도만난 자를 보며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먼저 갖고 그에게 다가갔습니다. 강도만난 자를 응급조치하고 자기 짐승에 태웠습니다. 자신이 타고 가야 할 짐승에서 자신은 내려오고 그 짐승에 강도만난 사람을 태우고 주막으로 데려가 치료를 해 줍니다. 뿐만 아니라 주막 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의 비용을 주면서까지 간병까지 부탁합니다. 그리고 경비가 더 들면 자신이 돌아오는 길에 갚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자신의 시간과 물질을 투자하면서까지 곤경에 처한 이웃을 돕고자 했습니다. 분명 강도 만난 자를 불쌍히 여긴 이 선한 사마리아인은 긍휼, 즉 자비를 소유한 사람입니다.
긍휼 중에 가장 큰 긍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불쌍히 보시고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가 이 땅에 오심은 먼 위치에서, 높은 자리에서 죄인인 우리들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불쌍한 우리들을 안아 주시고 감싸 주시고 용서하여 주시기 위해 친히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렇게 오신 예수님께서는 선한 사마리아인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계십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자를 불쌍히 여겨 짐승에서 내려와 상처를 싸매어 치료하여 주고 자기 짐승에 자신을 대신하여 태운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사탄을 만나 죄악 속에서 쓰러져 신음하며 죽어가는 우리들을 불쌍히 여겨 하늘 보좌에서 내려와 우리의 아픔을 감싸 주시고 치료하여 주시어 우리들을 죄악된 자리에서 하늘 보좌로 옮기어 주셨습니다. 우리들이 달려야 할 죄악된 십자가에 예수님께서 대신 그곳에 달리심으로 우리는 죄인의 자리에서 의인의 자리로 옮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보시고 긍휼히 여기신 것처럼 우리들도 이 세상 사람들을 보며 긍휼함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죄악 가운데 있는 우리들을 불쌍히 보신 것처럼 우리들도 죄악 가운데서 지옥으로 치닫고 있는 세상 사람들을 보며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들도 하나님 나라에 갈 때까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계속적으로 받으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주옥같은 산상수훈에서 팔복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긍휼함을 갖는 자만이 그들도 하나님께로부터 긍휼함을 받을 수 있다고 분명히 선언하고 게십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5:7)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좋은 글,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성령 충만 받은 사람의 17가지 변화 (0) | 2011.03.12 |
|---|---|
|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말 (0) | 2011.03.12 |
| 여호와를 알자 (0) | 2011.03.11 |
| 갈등의 패턴 (0) | 2011.03.10 |
| 살아있는 교회 (0) | 2011.03.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