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종교생활이 은혜로 볼 것인가?

2013. 1. 9. 22:47좋은 글, 이야기

즐거운 종교생활이 은혜로 볼 것인가?

 

 

 

 

 

 

 

 

    옛날 중국의 한 황제가 전국에 걸쳐 여러 군데 절을 지어놓고 국사에게 자신의 공덕이 얼마나 되냐고 물으니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황제의 마음이 즐거우신 것 외엔 공덕이 하나도 없나이다’ 대답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 말한 국사는 그 뒤에 살아남았는지 아니면 사형에 처했는지 모르지만 얼마나 뼈아픈 직언을 한 것인가?

 

    이와 같이 오늘 날 교회생활을 즐기는 분들이 있다. 예배나 찬양, 봉사, 선교활동을 취미생활 정도로 여기며 신앙과 동떨어진 자신의 삶 속에 즐기는 것으로 착각하는 분들이 있다. 물론 예배나 찬양, 봉사, 선교활동으로 인해 얻어지는 신비로운 기쁨과 감격을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희열과 즐거움은 서로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어느 목회자는 ‘참 말하기는 곤란하지만 당신이 즐긴 것 외엔 하나님께 드린 것은 쥐뿔도 없나이다’라고 언급한 바가 있다. 자신이 하나님께 드린 것으로 착각할지 몰라도 그 기쁨을 빙자하여 성령 충만한 양, 신앙의 만끽한 존재를 여기며 자신의 안일을 위해 즐긴 것밖에 없다는 무서운 표현인 것이다.

 

   신앙생활은 살아 있는 동안 이 땅에서 즐기는 것이 아니다. 만약에 신앙생활 속에서 즐거움이 전혀 없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진정한 즐거움은 잘 숙성된 와인처럼 그렇게 쉽게 표현되고 노출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 땅에서 즐거움과 기쁨을 끌어내기 위한 신앙생활이라 할 수 없다. 그것은 자기중심의 이익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종교생활인 것이다.

 

   현대인들의 화두 속에는 즐겁게 살아가자는 쾌락본능주의가 깔려 있다. 음식으로, 등산과 여행으로, 운동과 TV로, 영화와 음악 감상으로, 쇼핑으로, 노래와 춤으로, 시나 소설을 읽고 즐긴다(즐감이라는 말을 씀), 섹스를, 심지어 마약까지 즐긴다. 즐거운 것은 뇌의 쾌감이 되기에 우선 행복한 것 같다.

 

   즐기는 종교생활로 쾌락이 교회 안에 들어 자리를 잡고 있다. 즐거운 예배, 즐거운 말씀, 즐거운 찬송, 즐거운 기도, 즐거운 전도, 즐거운 선교여행, 즐거운 봉사활동... 참으로 우리 보기에는 좋을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 우스운 짓거리일 수 있다. 거기다가 한 술 더 떠서 그것이 은혜로 여긴다.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자화자찬을 하고 있으니

 

  자신의 신앙생활을 즐기고 난 뒤 보람되고 의미가 있다고 하면서 참 은혜스러웠다고 말한다. 이것은 신앙생활이 아니라 종교생활로서 종교적인 쾌락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 민족들이 왜 하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고 징계를 받은 이유가 틈만 나면 즐기는 이방종교를 적용하고 도입했기 때문이다. 현재의 교회도 마찬가지로 도입하려고 안달이다.

 

  교회를 선택의 기준도 어느 교회에 가면 즐길 수 있는지 파악하고 난 뒤 선택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본인의 사생활을 간섭하지 않는 교회, 그 대신 나를 즐겁게 해 줄 수 있는 교회를 선택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큰 교회는 그 교회의 교인도 있지만 손님으로 온 교인들도 상당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도 이런 교인들을 충족시켜 주기 위해 즐기기 위한 프로그램과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쾌락을 충족시켜 주는 기독교는 기독교로 볼 수 없다. 그런데 많은 교인들을 비롯해서 목회자까지 즐감의 기독교에 푹 빠져 있다.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즐기면서 유쾌, 상쾌, 통쾌라는 표현까지 서슴지 않고 해대고 있다는 것이다.

 

   큰 교회는 큰 교회대로, 작은 교회는 작은 교회대로 딜레마에 빠져 있다. 어쩌면 기나긴 동굴을 빠져나가고 있는지 아니면 헤매고 있는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즐기는 이방종교가 침투되어 썩어져 있는 것도 모르고 있는 상태다. 이 땅의 즐거움과 하늘의 즐거움의 차이가 있는 것보다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이것을 분별하는 것도 영분별의 은사에 측면이라 할 수 있다. 나를 위한 즐거움인지 하나님을 위한 즐거움인지 선택하지 않으면 자기의 쾌락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을 구별하는 지혜가 사람의 판단과 생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기도와 말씀 묵상 속에서 발견해 내는 것이다.

 

   과거에는 이 땅의 즐거움을 피하려고 수도사들이 광야에서 고행의 길을 선택한 분도 있었다. 마치 불교의 고행을 감당하는 수도승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즐거움을 버리고 이 세상의 고뇌를 다 짊어지라는 것이 아니다. 진리 안에서 자유나 평강, 안식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영광 앞에 나아가는 즐거움을 찾는 것이 고행의 길이 아니다.

 

   교회가 세상의 즐거움을 좇아가는 부류에 휩쓸려는 안 된다. 그런데 어려워서 찾는 것이 아니라 즐기려고 찾는다면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교회는 거룩하고 구별된 평강, 기쁨, 즐거움, 행복을 제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유대교처럼 이방종교의 즐거움을 좇아가는 꼴이 되고 만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만약 세상의 즐거움만큼 즐겁지 않고, 기쁘지 않고, 행복하지 못하고, 고귀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구원이요, 생명이며, 소망이 되는 것이 그 분 때문인 것이다. 오직 그 분만이 내 안에 임재하고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나의 모든 즐거움이 되어야 한다.

 

   이로 인해 주변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고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긴 사도 바울처럼 살 수 없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하늘의 즐거움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누려야 할 것이다.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은 베드로처럼 할 수 없더라도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이 즐거움이 되어야 한다.

 

   고난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내게 주어진 업보가 아니다. 팔자도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 말씀을 모르는 이들에게 알려주는 그 자체가 고난이다. 주님과 함께 강한 체험을 하는 것이 고난이며 즐거움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충격적일만큼 강한 체험으로 얻어지는 평강과 즐거움이 있다.

사람들의 사상과 철학에 떠밀리고 화려하게 장식된 무대나 강대상 뒤에 마저도 계시지 않는 우리 주님은 어디계시는 것일까? 즐거움에 안달이 난 사람들의 마음을 붙잡으려고 시끄러운 소리만 가득하다. 사람들의 오감을 즐겁게 하려고 예배, 찬양, 선교 여행, 구제 활동, 장학생선발 등 내세우고 있다.

 

  과거에 이방종교의 특징은 무엇을 보여주려고 안달이 나 있다는 것을 언급한 바가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들어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들을 것인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음으로 인해 믿음을 어떻게 가질 것이며 유지해야 할 것인지 강조해야만 된다.

 

   들음에서 믿음으로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어지는 과정 속에 세상이 줄 수 없는 즐거움을 누려야 할 것이다. 그 진리 안에서 까무러치듯 고함을 칠만한 평강과 기쁨을 즐거움으로 표현해야 된다. 엔조이하는 종교생활에서 벗어나 진정한 즐거움을 추구하는 신앙생활을 마무리하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한다.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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