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4. 30. 22:55ㆍ좋은 글, 이야기
생각하는 크리스찬
기독교 사상사에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고 평가되는 11세기 캔터베리 대주교 안셀름은 이렇게 고백하였다. "오, 주님, 나는 이해하기 위해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믿기 때문에 이해하려고 합니다."
안셀름은 성서나 기독교 전승의 권위에 의지하지 않고, 이성을 사용하여 신학적 문제의 해답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신학적 주장/비밀을 발견하고 제시하기 위해 이성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더 깊이/새롭게 이해하는데 이성을 사용하고 있다. 신앙이 보다 더 깊고 풍부한 이해의 경지에 들어가 신앙의 기쁨과
풍요로움을 누리려는데 그의 신학의 목적이 있었다.
이즈음 기독교의 집단이성이 의심을 받고 있다. 의심받아 마땅할 만큼 기독교 이성은
실종된 현실이다. 특히 한국 기독교에서 이성은 발 붙일 자리가 없다.
교인들은 교회당에 들어가기 전 주차장에 세워 놓은 자신의 자동차 안에 머리를 떼어
놓고, 흥분/감동에 지극히 민감한 가슴만 가지고 들어가야 한다.
이성은 신앙의 요소가 아니라, 신앙의 방해물일 뿐이다.
머리와 가슴은 서로 독립된 것인가? 따로따로 놀아야 하는 것인가?
머리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가슴이 받아들일 수는 없다.
머리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신앙에 기독교인들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가?
이성은 우리에게 주어진 귀한 선물이다.
백번도 더 들었던 정답을 그대로 믿기 어려워 하는 사람들은 복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진리를 찾는 사람들은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예수와 같이.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더 깊이 새롭게 이해하기 위해 이성을 사용한 안셀름같이
우리도 생각하는 크리스찬이 되어야 한다. 교회가 정답이라고 제시하는 것들을 넘어서
새로운 세계를 보아야 한다. 언제까지 얕은 물 가에서 찰싹거리는 작은 파도에 마음 조리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아직 그 밑을 모르는 깊은 바다 속을 한번 헤아려 보아야되지 않겠는가?
성경공부와 더불어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이 해야 할 공부는 신학 서적 읽기라고 본다.
너무 전문적인 것이 아니라 평신도들의 신앙 지평을 넓혀 주는 책들을 같이 읽는 일이 필요하다. 불편한 진실 앞에 허둥거리게 될지도 모르지만,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되는
기쁨을 누리게 될 수도 있지 않은가?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자료/ⓒ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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