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치는 변호사 박지영 간증

2005. 7. 21. 09:07신앙간증


피아노 치는 변호사 / 박지영




사람들은 나를 ‘피아노 치는 변호사’라고 부른다. 만 5세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 예원학교와 서울예술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 음악대학에서 작곡이론을 전공하는 등 20년간 음악을 한 사람이 변호사가 됐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이 별명은 내 삶의 진통 속에서 나온 자식 같은 이름이다. 그리고 그 고통 가운데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항상 함께 계셨던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애칭이기도 하다.

나는 고교를 졸업하던 해인 만 19세에 림프암에 걸렸다. 이 세상을 다 준다고 해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지독한 항암치료를 받았다. 당시 목숨처럼 여기던 피아노를 그만두어야 했다.

초교 때부터 열심히 교회에 다녔고 하나님 앞에 열심히 살아보겠다는 꿈 하나로 살아왔건만 어린 나이에 삶과 죽음의 교차로에 서보니 그동안의 믿음은 하찮은 것이었다. 하나님을 양념 삼아 내 인생을 마음대로 요리하려는 맹목적 열심으로 채워져 있던 과거였다. 나는 끝이 보이지 않는 고난의 터널을 통과하면서 한번밖에 살지 않는 한시적인 내 인생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를 언제 불러가시든간에 ‘어제 그리도 살고 싶었던 내일’인 ‘오늘’ 하루를 의미있게 살겠다고 결심했다. 인생의 목표를 온전히 하나님 중심으로 맞췄다. 내게 허락하신 삶과 건강을 하나님의 기쁨과 이웃의 기쁨을 위해 살기로 한 것이다.

사법시험 도전도 결국 하나님의 기쁨과 이웃의 기쁨을 위해 살겠다는 결단에서 시작됐다. 음악만 좇아가던 사람이 암투병 후 턱없이 부족한 체력으로 사법시험에 합격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변호사가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에 부족하다. 그 다음이 더 중요하다. 모든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 그것만이 ‘에벤에셀의 하나님’에 대한 아주 작은 사랑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 오늘도 숨을 쉬고 있다.

현재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법과 음악의 영역에서 이웃에게 기쁨이 되는 일을 찾아가고 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는 말씀에 부합하는 삶을 살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



사람은 크게 두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다. 인생이라는 톱니바퀴에 자기 자신이 중심축이 되어 혼자 톱니바퀴를 돌리다가 톱니바퀴가 뻑뻑해져서 잘 안 돌아가게 되면 그 때 기름칠을 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유형이 있다. 다른 유형은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세상의 거대한 톱니바퀴의 기름칠이 필요한 곳에 가서 기름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다. 나는 두번째 유형의 사람이 되고 싶다.

이제부터 전개될 이야기는 왜 내가 삶의 목표를 하나님의 기쁨과 이웃의 기쁨으로 규정할 수 밖에 없었는지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 변함없이 함께 하셨던 좋으신 하나님에 관한 고백이다.

내가 기억하는 유년 시절은 피아노로 시작된다. 유치원에 먼저 들어간 언니가 피아노를 치자 나는 5살에 피아노학원에 따라가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피아노 치기는 항암치료 중 잠시 치다가 코피를 쏟고 중단해야 했던 20살 어느 봄날까지 15년간 이어졌다.

이른바 제2차 석유파동의 영향으로 1979년과 1980년 어간에 국내 중소기업이 힘없이 무너지자 아버지가 하시던 작은 사업도 점차 어려워졌다. 집안 형편이 안 좋아지자 초등학교 5학년 때 어머니의 권유에 따라 피아노를 그만두기로 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주일학교 예배 반주자가 피아노를 관뒀다는 소문이 교회에 쫙 퍼졌다.

당시 교회에 다니시던 피아노 선생님은 나의 피아노 실력을 아깝다시며 피아노를 가르쳐 주시겠다고 찾아오셨다. 영원히 포기할 것만 같았던 피아노를 꿈처럼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됐다. 선생님은 나를 ‘전에도 없고 앞으로도 있을 수 없는 최고의 제자’라시며 성심성의껏 가르쳐주셨다.

그 이후로 집안의 경제사정은 계속 안 좋아져서 아버지는 창원으로 직장을 옮기셨다. 식구들이 모두 아버지를 따라 창원으로 가야 했지만 나는 서울에 혼자 남아서 피아노를 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결국 식구들은 창원행을 포기했고 대신 아버지가 그이후 18년간 서울과 창원을 오가셨다. 나는 그 때의 나의 억지가 부모님께 너무나 죄송해서 중고교 6년 내내 악착과 오기로 공부와 피아노 치기에 매진했다.

그러나 집안 사정은 나날이 나빠졌다.
방 한칸 월세집에서 살면서 주인집 마루에 피아노를 놓고 나는 피아노를 열심히 연습했다. 어머니는 돈이 급해져서 그 피아노마저 잠시 처분하셨다가 한 열흘 후에 새 피아노를 사 주시기도 했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되자 전국에서 피아노를 잘 치는 사람이 모두 모인다는 예원학교 입시 준비를 위해 피아노 연습을 더욱 열심히 했다. 입시 과목에는 국어 산수도 있었다. 집안 형편상 이를 위해 과외를 받거나 따로 준비를 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학교에서 방과 후에 남으라고 했다. 내가 전국산수경시대회의 학교 대표로 뽑혔으니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산수특별지도를 받으라는 것이었다.

나는 저녁에 피아노 연습을 못하는 것이 걱정이 돼 집으로 도망쳐왔다. 결국 선생님의 설득과 배려로 오전에는 집에서 피아노 연습을, 저녁에는 학교에서 산수경시대회를 위한 수업을 받았다. 그러면서 예원학교 입시를 위한 산수 과외를 공짜로 받은 셈이다.

예원학교 입시날,
학교 정문 앞에서 어머니는 입고 계시던 잠바를 벗어주시며 나를 학교 안으로 들여보내셨다. 연주 순서를 정하는 번호표를 뽑고 순서가 되어 피아노 앞에 앉았다. ‘이 시험장에 이렇게 와 앉아 있는 것만도 기적이 아닌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연주를 시작했다. 열 손가락 중 성한 손가락 보다는 어제까지 반창고를 붙이고 있던 손가락이 더 많았다. 그저 정신없이 연주를 마쳤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그러나 하늘에서 별을 따는 것과 같다는 예원학교 시험에 붙고도 집안 형편상 피아노를 전공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돼 학교에 등록을 하지 않기로 했다. 시험에 떨어진 집에서 들으면 무슨 장난 같은 소리냐고 했겠지만 그것이 당시 우리 집의 팍팍한 현실이었다.



등록마감시간을 기어이 넘기고 있는데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왔다. “지영아,내가 등록했어. 걱정 마.” 평생 하나님 앞에서 두 딸 잘 기르는 것 하나만을 목표로 사셨던 아버지(박병철 집사)의 배려로 나는 피아니스트의 꿈을 계속 이어갈 수 있게 됐다.

친구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집안 형편이 어려웠던 당시 내게 가장 중요한 일은 ‘초월’하는 것이었다. 내게 있어 초월이란 ‘절대 비교하지 않는 것’ ‘내가 못나서 못해 놓고 환경 탓으로 돌리지 않는 것’ ‘잘난 것 없지만 자신감 있고 못난 것 없어도 겸손한 것’ 등의 의미였다.

그러나 그 초월이라는 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교복자율화 시절,온갖 브랜드의 패션감각을 발휘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솜씨좋은 어머니의 수제품 옷을 입고 다니는 나를 자랑스럽게 여기지 못했다. 내가 철이 없어서였다.

나는 당시 하나님 앞에 성실과 겸손으로 미래를 담보받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공부와 피아노에 모든 것을 걸었다. 나는 또래 친구들과는 달리 어릴 때부터 교수 레슨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시작이 빨랐던 것도 아니어서 친구들을 빠른 시간내에 따라잡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나는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5개년계획을 세우고 고등학교 2학년 2학기까지 나의 음악 완성도를 갖추기로 했다. 5년이 지난 후 실기시험에서 피아노과 2등이라는 믿기지 않는 성적을 받게 됐다.

그러나 잘한 때도 많았지만 못한 때도 그 못지 않게 많았다. ‘실수다’ ‘긴장했다’고 변명도 해 보았지만 사실 실수 안 하는게 실력이고 긴장하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것이 실력이다. 천 번 연습 중 한 번 삐걱거리면 무대에서는 잘했던 999번보다는 못했던 한번이 재현된다. 그것이 냉혹한 예술의 세계이다. 예술을 하면서 인간의 실수 많음과 유한함에 대해 뼈저리게 느꼈다. 이 때문에 피아노와 음악에 대해 깊이 알아가면 갈수록 하나님을 의지하게 됐다.

예원학교와 서울예술고등학교는 기독교 정신에 입각해 설립된 미션스쿨이기 때문에 매주 한번씩 정동제일교회 및 학교 강당에서 예배를 드렸다. 성경과목도 있었다. 다른 친구들은 성경과목이 내신성적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아무런 준비없이 성경시험을 치르곤 했다.

그러나 나는 성적과 무관하다고 해 성경과목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그래서 평균이 50점 밑도는 성경과목에서 나 혼자 100점 또는 1개 정도만을 틀릴 때가 많았다. 학교의 정원을 거닐면서 나중에 내가 속 깊고 실력있는 음악가가 될 수만 있다면 지금 잠시 여건이 따라주지 않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아니한다고 되뇌곤 했다.

실기시험,음악회,콩쿠르,입시 등 항상 긴장의 연속이었던 중고교시절. 지금 생각하면 무엇이 그렇게 긴장되었는지 모르겠다. 당시 나의 삶에 대한 간절함은 사실 막연하고 방향없는 것이었을지 모른다. 다만 그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서 나를 제련해 가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다.

철 모르는 나이에 아무 것도 모르고 통과한 것 같다. 음악을 하려면 ‘음악을 왜 하는가’라는 문제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분명히 정립돼야 한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 위에 음악을 하지 않으면 끝도 없는 험난한 음악의 길이 허망해질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중고교시절에 절절히 깨달아갔다.

고교 3학년이 되자 피아노 연습에 박차를 가했다. 서울대 피아노과 입시곡이 발표된 날부터 실기시험을 치르는 날까지 아침 5시에 기상,연습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그러나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10명 중 2명만 통과한 당시의 높은 경쟁률을 뚫지 못하고 낙방의 고배를 마신 것이다. ‘10명 중 8명에 들었으면 나는 지극히 정상이야. 내년에 합격하면 되지 않겠어? 어차피 평생 칠 피아노이고 해오던 공부니까.’ 그러나 마음을 아무리 다잡아도 어쩔 수 없는 재수생 신세,몸도 마음도 힘이 들었다.



몸안에 작은 풍선이 있고 그게 내 마음을 눌러서 숨쉬기를 힘들게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마음이 아픈 것과 몸이 아픈 것을 혼동하고 있는 것이겠지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1989년 5월11일.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병원을 찾았다.

이어 ‘응급A’라고 표시된 진단서를 들고 다시 큰 병원으로 향했다. 2주간의 검사 끝에 나를 괴롭히던 그 풍선이 림프샘에 생긴 종양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 시점에도 나는 ‘병원에 있는 동안 피아노 연습을 못해서 어떡하지?’라는 시답지 않은 걱정을 했다.

항암치료를 할 수 있는 의료진이 있는 다른 병원으로 옮겨졌다. 고통스런 골수검사와 한두 차례 위기상황을 넘기고 본격적인 치료에 들어갔다. 병원에서는 50%의 완치율을 이야기하며 그래도 양호한 상태라고 말했다. 하지만 언니는 하나뿐인 동생을 놓고 50% 운운한다고 펄펄 뛰었다.

항암치료가 시작됐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몸안의 장기가 모두 입으로 딸려 나올 것 같은 토악질을 10시간씩 해댔다. 물을 넘기기도 어려웠다. 침조차 써서 입에 담아 물고 있을 수 없었다. 1주일씩 화장실을 못 가는 것은 보통이었다. 눈을 떠도 아프고 감아도 아팠다. 밤새도록 병원 벽에 무릎을 찧어대면서 다리를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는 고통이 계속됐다.

주사바늘을 하도 많이 꽂아 혈관이 모두 숨어버렸다. 혈액검사를 할 때마다 여러 명의 간호사가 달려들어야 했다. 잠만 자면 가위에 눌렸다. 아무리 일어나려고 해도 발 밑에 누군가가 앉아서 나를 영원히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 같았다. 그때마다 속으로 천천히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공포를 걷어내야 겨우 가위에서 풀려나 눈을 뜰 수 있었다.

한번은 항암주사 맞는 날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얼마 안 남은 머리카락이 모두 빠지고 약해질 대로 약해진 체력 때문에 더 오래도록 토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주사 맞으러 가기가 어느 때보다 싫었다.

나는 제발 이번 주사를 맞기 전에 예수님이 오셔서 나와 모든 아픈 자들의 잃어버린 진선미를 회복해주시든지, 아니면 내가 무슨 끝장을 보든지 하여 더 이상 주사를 맞지 않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지치고 거추장스러운 몸을 내려놓고 영원히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그러나 주사 맞으러 가는 날까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나도,세상도 그대로였다.

예고 없이 눈앞에 나타나 빨려들어간 터널 속은 생각보다 어두웠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미동도 하지 못했다. ‘ 왜’라는 질문조차 던지지 못했다. 어차피 당장 답도 없는 시험문제였다.

“내일은 오늘보다는 덜 아프게 해주세요.” 그때 내가 밤마다 드린 기도 내용이었다. 더 이상은 안되겠다 싶었다. 이렇게 대책없이 사는 일은 이 정도면 족하다고 생각됐다. 이 어두운 터널을 통과해야 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다면 터널을 빠져나온 후에도 내 인생 여정이 어느 정도는 남아 있으리라는 이상한 확신이 생겼다.

혹시 이 터널 한복판에서 내 인생의 열차가 멈춘다 해도 적어도 내가 선택해서 해야 할 일은 있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암치료를 중단했다. 병원에서는 나중에 더 나빠진 후 찾아오더라도 그때는 내성이 생겨서 약이 듣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집에서 현미와 채소 등 자연식을 먹으면서 1년여 동안 암세포와 싸워나갔다. 많은 분이 우려 섞인 조언을 해주셨다. 하지만 당시 우리 가족은 그 길밖에 선택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그 이후로 감기나 타박상 등을 치료하러 병원에 간 일 외에는 림프샘 종양과 관련해 병원을 간 적이 없다. 바닥을 쳤던 내 몸의 상태가 15년 동안 매일 티끌만큼씩 좋아져서 지금은 태산만큼 건강해진 사실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나는 공식적인 투병을 끝내고 현재 하루가 48시간이어도 모자라는 변호사로서 새 삶을 살고 있다. 건강이란 병이 없는 상태,또는 역기를 번쩍 들 정도의 힘이 있는 상태가 아니라 하루하루 감사하게 스스로 할 일을 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나는 또 다른 의미의 진정한 건강을 갖고 있다.

건강은 그 건강 자체로는 의미있는 것이 아니다. 건강한 것에 감사하며 그 건강을 기반으로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 너무 아깝고 귀한 건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 그리고 건강을 결코 낭비하지 않게끔 다시 기회를 다시 주신 하나님께 너무나 감사할 따름이다.

많은 분이 암에 걸리면 병원에서 치료를 해야 하는지, 아니면 기도를 해야 하는 것인지 고민하고 궁금해 한다. 이 세상에는 원인과 결과를 알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존재한다.

하나님 앞에선 감기나 암이나 같은 것일 것이라고 믿는다. 감기는 기도 안해도 낫고 암은 기도해야 낫는다는 이분법조차 우리 몸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앞에서는온당치 않다. 암에서 완치되는 일만큼이나 하루하루 숨쉬며 살아가는 일, 사람을 만나고 사랑을 주고받는 일 자체가 기적임을 먼저 인정한다면 암이 치유되는 일이 특별히 더 기적으로 보일 이유가 없다.

죽음이란 이쪽 방에서 저쪽 방으로 옮겨가는 것과 같은 일이라고 믿는다. 나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쪽 방에 아직 머물러 있는 사람이다. 나는 감사하게도 그저 건강하게 살아남은 쪽에 서게 된 사람에 불과하다. 나는 재발에 대한 두려움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의연해질 수 있을 만큼 내공을 키웠다. 그동안 하나님과 쌓아올린 사랑탑은 그 정도는 너끈히 견뎌낼 수 있는 견고한 것이다.

이 모든 과정에 삶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신뢰로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았던 많은 시간들을 견뎌냈다는 것, 아니 그저 하나님께서 내 등 뒤에 계신 것만으로 나는 행복했었노라는 말로 수많은 물음에 대답하고 싶다. 이제라도 부득불 자랑할 수 있는 것은 기나긴 터널을 통과하는 동안 나와 함께 해주신 하나님이다.

뒹굴고 울부짖으면서 하나님과 나눈 사랑이다. 그것뿐이다. 오늘도 말씀속에서 고난의 의미를 찾아가며 지금 모습 그대로를 하나님께 감사하며 산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 5:17)

항암제 부작용에서 점점 벗어나면서 조금씩이나마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 대입시험을 준비하면서 피아노 공부를 계속할 것인지부터 결정해야 했다. 그러나 내 몸도,내 정신도,내 주위의 그 누구도 내가 피아노를 다시 시작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당시 내 신체적 여건으로는 입시를 위한 피아노 연습이 불가능했다. 또 피아노가 더 이상 내게 지고지선의 가치도,삶의 목적도 주지 않았다. 속이 많이 탔었던 것도 사실이다. 어떻게 연습해온 피아노인데 이렇게 맥없이 주저앉을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러나 내 앞에 새로이 펼쳐진 인생의 창문에서 불어 들어오는 상쾌한 공기를 생각만 해도, 까맣게 돋아나는 머리카락을 들여다보기만 해도 하나님을 향한 한없는 감사 외에 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당시 서울대 음대에만 개설돼 있던 작곡이론과에 지원하기로 했다. 오랜만에 펜을 쥐고 글을 써보았다. 힘이 없어 꼭꼭 눌러 천천히 써나가야 했다. 항암제가 뇌세포까지 파괴시키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피아노를 안 치니까 해가 떠 있는 낮에도 공부를 할 수 있어서 좋았다.

깨끗이 잊고 지내던 공부를 다시 시작하니까 한번 들은 것은 잊히지 않았다. 성적은 계속 올라갔고 전국모의고사에서 작곡이론과 지원자 중 1,2등을 놓치지 않았다. 독해가 어려웠던 영어 문제는 조금만 상상력을 동원하면 내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학원에 갔다 오면 무조건 누워 있어야 했기 때문에 따로 복습할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강의를 듣는 날에는 지하철 안에서 그날 강의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빠른 속도로 다시 읊어보았다. 가능할 것 같지 않았지만 나중에는 칠판에 쓰인 내용과 강사의 농담까지 기억나면서 강의 내용이 그대로 머리에서 재생됐다.

공부하다가 성경을 펼쳐들면 어느 한 군데도 가슴이 뛰지 않는 곳이 없었다. 어떤 찬송가를 불러도 가슴이 뜨거워졌다. 모든 것의 출발선상에서 욕심없이 바라보는 세상에는 그저 감사가 가득 차 있었다.

입시날 아침 어둑어둑한 서울대 앞은 칼바람이 불고 있었다. 나는 눈만 남기고 얼굴에 목도리를 칭칭 감고 시험장으로 향했다. 시험장 문앞에서 북받치는 마음을 어찌하지 못하고 어머니와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시험 치러 오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시험 끝나는 오후 5시10분에 건강하게 이 문으로 나오게 해주세요.”

그날 하루 서울대 정문 앞에 서서 애태우던 많은 학부모와 시험장에서 한 문제라도 더 맞히려고 용을 쓰던 수험생들의 심정에서 나는 한 걸음 비켜 있었다. 학력고사 문제가 쉬워 건성으로 치를 수 있어서가 아니었다. 누가 내 합격을 예약해놓아서 안심이 된 것도 아니었다. 손이 쪼그라들어 펴지지 않을 정도로 내게 허락된 체력을 모두 짜내서 8시간 동안 시험을 치렀다.

그러나 시험 결과에 관한 예측이나 기대, 나아가 나의 미래에 관한 그 어떤 청사진도 내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신묘막측한 계획이 합격에 있을지, 불합격에 있을지 내가 어찌 알겠는가? 따라서 세상 사람들이 흔히 원하는 결과인 합격시켜 달라는 기도는 나와 상관없었다. 그날 하루 내게 주어진 일은 시험을 열심히 치르는 것이었기 때문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꿈같은 대학 합격이었다.
암에서 나았다고 가산점을 주는 것도 아닌 대입시험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가산점으로 합격한 것이다. 나는 발걸음을 한 발자국씩 조심스럽게 옮겨가며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감사하게도 그 첫 시작을 서울대 관악캠퍼스에서 할 수 있었다.

나는 누구보다 열심히 학창시절을 보냈다. 주어진 소중한 기회를 방황하며 허송할 수 없었다. 진로를 확실히 정하지 않았지만 공부에 충실하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천년 만년 살지 않는 한번뿐인 삶이라는 사실을 가방에 항상 넣어가지고 다니며 그 묵직한 무게를 순간마다 느끼고 있었다.

결코 과거에 얽매이지 말자고 다짐했다. 당시 내 문제는 미래에 관한 것이자 실존에 관한 문제였다. 또 다시 천년 만년 살 것처럼 산다면 내가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것은 이 소중한 기회를 제공 받은 내 인생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됐다. 또 다른 레슨의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도리가 아니라고 느꼈다.

우리의 삶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한시적 삶이라는 것, 그리고 그 한정된 시간 동안 내가 분명히 할 일이 있다는 것이 그때까지 내가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이었다. 의미있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을 하며 사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음대 재학 4년 동안 농촌 오지,도시빈민,소년소녀 가장,장애우 등을 향한 구체적인 섬김을 실천하고 있는 선교단체 ‘한시미션’에서 활동했다. 한정된 삶,한정된 시간을 정해 봉사하고 섬기자는 의미로 ‘한시’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귀한 단체였다. 나는 한시라는 말만 듣고도 너무 반갑고 고마워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한시라는 두 글자는 바로 내 존재의 정의였다.

나는 한시미션의 대표 조병호 목사님을 만나면서 다양한 일에 동참하게 됐다. 일단 뜻을 같이 한 사람들이 먼저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내가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실험적 시도를 할 수 있는 용기를 주기에 충분했다. 고민만 하면서 아무것도 안하고 있는 우를 범하지 않게 해줄 거라는 확신이 나를 무척 신나게 했다.

나는 한시미션의 선교봉사활동을 통해 어느새 내 인생의 목표를 ‘하나님의 기쁨과 이웃의 기쁨을 실천하는 일’로 정리할 수 있었다. 어쩌면 이 목표는 내가 처음 교회에 나가던 초교 1학년 때부터 막연하고 형식적으로 설정돼 있던 것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벌겋게 타버릴 것 같은 내 가슴으로 받아들인 실질적인 목표로 재정립됐다. 인생의 목표가 정해지고 그 목표를 위해 일하고 있으면 하루를 살다가 죽더라도 억울하지 않다.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이 인생의 목표이면 피아니스트가 되기 전에 죽거나 피아니스트가 되지 못하게 되면 인생의 의미가 없어진다. 정말로 불쌍한 인생이다. 나도 불쌍한 인생이 될 뻔하지 않았던가!

감사하게도 터널을 통과하며 귀한 보석상자를 얻은 까닭에 너무나 신나는 인생 목표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만을 위해 사는 인생이라면 그리 애써 살고 싶지 않았다. 목표가 정해지고 나면 혹시 과거 내가 목표 달성을 위한 적정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내 손에 주어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깊고 넓은 섭리 속에 더 아름다운 수단으로 목표를 이루도록 하실 것이기 때문에 낙망할 필요가 없다. 내 인생의 판이 새로 짜여지는 희열이 아닐 수 없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빌 1:6)
하나님의 기쁨,이웃의 기쁨’이라는 내 삶의 목표가 정해졌다고 해서 모든 일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목표가 정해지면서 오히려 모든 일이 새로 시작되어야 했다.

사람들이 대학이나 직장 등을 세상적인 목표로 정해놓고 그 목표에 이르기 위해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하는지 모르는 바가 아니다. 적어도 나의 목표가 그들의 그것보다 가치가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목표 달성을 위한 나의 준비가 그들보다 소홀하면 안될 일이었다. 따라서 무엇이 그 목표 달성에 적합한 수단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나의 멘토이신 조병호 하이기쁨교회 목사님은 아직 사회경험이 일천하여 그 수단이 무엇인지 갈피를 못 잡고 있는 내게 꿈같은 말씀을 하셨다.



“지영아,사법시험에 도전해보면 어떻겠니?
건강만 받쳐주면 정말 좋겠는데 그건 함께 기도해보면서 말이야.”

사법시험의 세계에 문자 그대로 ‘맨땅에 헤딩’하는 마음으로 수험생활을 시작했다. 음대를 졸업하던 해인 1995년 여름 신림동 산자락 여자고시원에 자리를 잡았다. 20년 동안 음악만 한 나로서는 수험정보를 선별하는 데 남들보다 곱절의 시간이 필요했다. 공부한 것을 친구들과 말로 풀어보면서 기억하고 잘못 입력된 지식을 수정할 수 있는 기회를 거의 제공받지 못했다.

같은 길을 앞서 간 사람이 툭툭 던지는 말 한 마디에서 묻어나오는 엄청난 내공과 통찰을 접할 수가 없었다. 또한 사람들은 내가 음대를 나왔다고 하면 ‘전국 대학이 고시생 양성소가 된다더니 급기야는 음대생까지 뛰어들었구나’식으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열병과 불면의 숱한 시간들을 보내면서 감사하게도 실력이 향상되고 있었다. 물론 공부만 잘돼 간다 싶으면 번번이 발목을 잡는 체력의 한계를 경험해야 했다. 또한 정보 부재에 의한 과목 선택의 오류 등으로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맛본 적도 있었다. 2차시험의 두 번의 기회를 모두 잃고 다시 1차시험으로 돌아갈 때에는 하늘과 땅이 달라붙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때 아주 넘어지지 아니하였던 것은 그럴수록 더 오롯하게 내 눈앞에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을 향한 꿈 때문이었다. ‘실력으로 따지면 아직 합격에 못 미칠지 몰라도 시험에 붙어야 하는 이유로 따지면 나는 수석감이다’며 내 스스로를 격려했다.

하나님만은 내가 사법시험에 도전하는 이유를 아시기 때문에 언젠가 반드시 합격시켜 주실 것이라고 믿었다. 나는 사법시험 준비기간 중에도 선교?와 봉사활동을 거르지 않았었다. 그러나 1차시험과 시간적으로 근접해 있을 때에는 전적으로 봉사할 수 없었다. 그것이 나를 무척 힘들게 했던 부분이다.

선교와 봉사를 제대로 해보겠다고 시험공부를 시작해놓고 그것 때문에 선교와 봉사를 못하고 있으니 내 꼴이 우습다는 생각도 많이 했다. 그때마다 빨리 시험에 붙어 사람노릇 제대로 하며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해보리라고 다짐했다. 평생 목적과 수단이 뒤바뀌고 본말이 전도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하나님 앞에 몇 번이고 다짐했다.

종일 방안에서 책장을 넘기는 일상을 반복하는 고시생이었던 내게 꾸준하게 봉사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던 것은 크나큰 축복이었다. 서울에 올라온 농촌 어린이들과 이부자리 위에서라도 잠시나마 손을 잡고 눈을 마주칠 수 있었던 것들은 특권이었다. 섬김의 대상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평범하고도 소중한 진리는 내가 사법시험을 준비하며 받은 수많은 선물 중 하나였다.

1998년 1차 시험에 처음으로 합격하고 같은 시기에 서울대 법과대학 3학년에 학사편입을 했다. 2000년 12월 법대 졸업반 기말시험 마지막날 2차시험을 응시하고 발표를 기다리고 있던 때였다. 사시 2차 합격자 명단이 법대에 나돌기 시작했다.
합격이었다.



도서관에서 태연한 체하며 가방을 챙기고 있는데 눈물이 뺨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1996년부터 사법고시를 준비했으니 5년만의 합격이었다.
‘하나님은 정말로 묘한 분이시구나!
평생 이 일을 어찌해야 다 갚으며 살 수 있을꼬.’

나는 합격이라는 두 글자를 징검다리 삼아 새털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꿈을 향한 내 인생의 다음 장을 기대해보는 길목에 서게 됐다. 나는 현재 법무법인 로고스의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변호사 30명,직원 50명이 모두 기독교인인 기독로펌이다. 나는 변호사로서 직업적 소명과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나의 삶의 궁극적 소명을 분리하지 아니한다. 세상 한복판에서 사랑을 외치신 예수님을 닮고자 내가 속한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기 위해 애쓰고 있다.

아울러 한시미션에서 선교활동을 15년째 계속해오고 있다. 매년 8월 둘째주가 되면 오지를 찾아가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그분들께 다가가 서투른 솜씨일지라도 함께 일하며 말벗이 돼드리고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분들께나 내게나 신나는 일이다.

매년 겨울에는 오지에 사는 청소년들을 서울로 초대해 서로 손을 잡고 서울 구경을 하고 한 이불 속에서 지내왔다. 도시의 화려함에 위축될지도 모를 그들을 위해 버스에 플래카드조차 달지 않고 귀한 친구 한 명마다 봉사하는 사람 한 명이 전담하는 비경제적 1대1 방식을 택하고 있다. 봉사활동을 통해 나는 겸손과 배려에 대해,갚을 능력 없는 자들에게 먼저 주고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이 진정한 섬김이라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봉사활동에 대해서 매일 찾아가지 않으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오히려 폐가 되는 것 아니냐고 꺼리는 사람들을 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해보지 않아서 하는 말이다. 나는 병원에서 심심해 몸서리를 쳤던 때가 많았다. 병원 복도에 누군가 와서 기타 등 악기를 연주하며 찬양이라도 할라치면 링거병을 들 힘도 없으면서 손등에 주사바늘을 꽂고 다른 손으로 링거병을 들고 나가 구경했었다.

조건없이 자신의 시간과 비용을 들여 찾아와서 잠시나마 고통을 잊게 해준 그들이 말할 수 없이 고맙고 좋았다. 음악에 관해서는 냉정한 프로였지만 그들의 연주가 서투르다고 타박해본 적이 없다. 다시 찾아오지 않는다고 미워한 적도 없다. 헌신은 그 정도를 불문하고 진행형일 때 의미가 있다. 예전에 했었다는 자랑도,앞으로 할 예정이라는 장담도 의미가 없다.

매년 말씀을 전해들은 농촌 오지 학생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쑥쑥 성장하고 있다. 어느새 대학생과 직장인들이 되어 함께 봉사활동을 하는 친구들도 있다. 세상을 향해 진정한 사랑과 섬김을 행하는 것은 내게는 과람한 일로 도전을 주는 기회이다.

봉사하지 않는 나머지 시간은 봉사의 시간이 샘플이 되어 더 잘해보려고 몸부림치는 시간들이 된다. 진정으로 복음을 듣기 원하는 이들을 찾아가는 일은 앞으로도 변함없이 하고 싶다.



현재의 모습은 감사의 제목이기는 하나 안주의 근거가 될 수 없다. 나는 지금까지 하루도 잊지 않고 유한한 나의 삶을 인정하고 있다. 언제라도 하나님께서 이제 이 정도면 되었다.
그 정도면 족하다는 사인을 보내시면 모든 것을 깨끗이 내려놓 수 있을 것 같다. 그때까지는 한시적 삶속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가장 중요한 일, 가장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싶다.

아팠던 내 경험은 누가 빼앗아 갈 수도 없고 경제정책에 따라 그 가격이 등락하거나 그 가치가 증감,변동하지도 않는다. 내가 곱씹고 이를 통해 성숙해져가는 소중한 내 재산이다. 조금 돌아왔지만 결과적으로는 시간을 많이 절약했다.

남들이 사법시험을 준비해 변호사 자격증 하나를 딸 시간에 다른 이들을 위로할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을 했다. 질병은 징계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나아가 모든 인과응보적 사고방식이 얼마나 불행한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인생의 우선순위에 대해 헷갈리거나 방황하며 휘청거리는 일은 겪지 않고 지나갔다. 이것은 아팠던 경험의 유용함이며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너무나 귀한 선물이다.

피아노를 가장 잘 치는 변호사가 되어서 고난이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피아노 치는 변호사는 고난 없이도 될 수 있다. 부요와 건강으로 귀결되었기 때문에 과거 고난이 의미 있다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병석에 누워 있는 사람에게 언젠가 당신은 건강하게 일어날 테니 조금만 참으라고 하는 것은 위로가 아니다. 그것은 시쳇말로 아픈 사람을 두 번 죽이는 것이다.

끝내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해도 병석에 누워 있는 과정 자체로 귀하고 의미가 있다. 고난이 건강과 부를 얻기 위한 과정이라서 의미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고난의 의미를 축소,왜곡시키는 것이다.

이 땅의 많은 사람이 고난이 닥쳤을 때 삶의 의미를 몰라 방황한다. 예기치 않은 불행이나 죽음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 아차 싶어 허겁지겁 허망한 것을 찾는다. 크고작은 고난 앞에 일희일비하며 흔들리지 아니하고 이 아름다운 세상에 이렇게 좋은 육신의 장막을 입고 짧든 길든 건강하든 약하든 살아가고 있다는 이 사실 하나만으로 늘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고 싶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잘 소개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장 잘 변론하는 변호사가 되고 싶다. 내가 받은 예수님의 사랑을 법과 음악을 통해 잘 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하나님은 부족한 내게 삶과 죽음,음악과 법이라는 큰 틀을 경험하는 기회를 주셨다.

이것은 특권인 동시에 내가 하나님과 이웃 앞에 다시 되갚아야 할 사명이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위로로 더 많은 이들을 격려할 수 있는 위로자격증을 주셨으니 그 주신 분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야 할 터이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4)

피아노 연주를 시작하면 끝날 때까지 연주를 포기해서는 안된다. 내가 포기하고 그만두는 순간 연주는 끝나고 음악은 멈추게 된다.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끝까지 붙들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나의 다음 노래를 하나님 앞에 더 멋지게 올릴 수 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실 묵직한 계획과 소명 앞에 시도때도 없이 가슴이 뛴다.

◇박지영 / 약력=△1970년 서울 출생 △서울대 음악대 졸업(작곡이론 전공) △서울대 법과대 졸업 △서울대 법과대 석사과정(민법 전공) 수료 △사법시험 42회 합격 및사법연수원 32기 수료 △법무법인 로고스 변호사,동아방송대 출강(음악이론) 및 문화공간 ‘다해원’ 원장 △서울대 캠퍼스 성경통독 모임 인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