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최고 희극인 이순주의 `순종의 삶`

2005. 12. 15. 10:04신앙간증

"웃으면 복이와요"∼"믿으면 천국가요"
 [2005-11-23 오후 2:01:08]
 

큰 것을 잃어버렸을 때는 작은 진실부터 살려가십시오. 큰 강물이 말라갈 때는 작은 물길부터 살펴주십시오. 꽃과 열매를 보려거든 먼저 흙과 뿌리를 보살펴 주십시오. 오늘 비록 앞이 안 보이다고 그저 손 놓고 흘러가지 마십시오. 현실을 긍정하고 세상을 배우면서 세상을 닮지 마십시오. 세상을 따르지 마십시오. 작은 일 작은 옳음 작은 차이 작은 진보를 소중히 여기십시오. 작은 것 속에 이미 큰길로 나가는 빛이 있고 큰 것은 작은 것들을 비추는 방편일 뿐입니다. 현실 속에 생활 속에 이미 와 있는 좋은 세상을 앞서 사는 희망이 되십시오.”

박노해 시인의 ‘길 잃은 날의 지혜’처럼 60, 70년대 코미디언 구봉서, 배삼룡, 송해, 박시명과 함께 국내 최고의 여자 코미디언으로 이름을 날렸던 이순주씨가 길을 잃었을 때 만났던 진리를 가지고 20여년 만에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어려서부터 불교 가정에서 자라 기독교는 제 인생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러나 끝없는 실패를 통해 주님은 살아계시고 실재하신다는 것을 저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이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 주님은 모질게 힘든 시련을 주셨나 봅니다.”

어렸을 때 부모님들과 즐겨 봤던 MBC 간판 코미디 프로그램인 ‘웃으면 복이와요’에서 국내 유일의 여자 코미디언으로 많은 사람에게 웃음과 기쁨을 줬던 이순주씨. MBC 라디오의 인기 프로그램 ‘강석·김혜영의 싱글벙글쇼’의 첫번째 MC로 사랑을 독차지 했던 이순주씨. 그당시 겹치기 출연을 할 정도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이순주가 하나님 앞에 모든 인기와 명예와 물질을 내려놓고 주님의 종으로 살기까지의 가게 된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일노일로(一怒一老), 일소일소(一笑一少)’라 했다. 웃음은 만복의 근원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늘 웃으면서 살기가 어디 그리 쉬운가. 인기인에서 하나님의 종이 되기까지 겪었던 이순주의 삶은 웃으면서 살기에 너무나 비참했다.

“인기는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갑자기 나타나는 구름과 같습니다. 잘나갈 때 떠나고 싶어서 80년대 초에 한국 일을 정리하고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러나 미국 생활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영주권문제는 순조롭게 해결됐지만 몇 번의 사업실패는 생활을 어렵게 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국내에서 프로를 맡아달라는 제안이 왔죠. ‘돌아온 이 여사’라는 프로그램을 맡아 진행했는데 제가 영주권자라는 이유 때문에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미련 없이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뉴욕에서 나이트클럽을 운영했지만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시카고로 옮겨 또다시 나이트클럽을 운영했지만 그것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이순주 씨는 버지니아, 뉴욕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나이트클럽을 운영했지만 어느 곳에서도 성공을 이루지 못했다. 이런 소식을 들은 동료들은 이순주씨에게 국내에서 나이트클럽을 운영할 것을 제안했다.

“1992년이었습니다. 국내에서 사업가로 재기하고 싶어 영주권도 포기하고 국내에 들어왔습니다. 나이트클럽을 운영했는데 사업이 정말로 잘 됐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습니다. 갑자기 정부가 유흥업소의 영업시간을 12시까지로 제한함에 따라 사업은 힘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1년 만에 부도를 냈지요.”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이순주씨는 도망가듯이 캐나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캐나다를 경유하여 미국으로 다시 돌아갈 생각이었다.

“캐나다에서 비자를 받아 미국으로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캐나다에서 인터뷰를 받아야 했는데 자꾸만 제 앞에서 끊기는 것이었어요. 4일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인터뷰를 위해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외웠는데, 믿음이 있어서 외웠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날은 좀 이상했습니다. 갑자기 저도 모르게 ‘나를 도와주시면 하나님의 일을 꼭 하겠습니다’라고 중얼 거렸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맑은 하늘에 소나기가 내렸습니다. 온몸이 젖었지요. 불쌍하게 보였나 봅니다. 그날 인터뷰를 받고 6개월짜리 관광 비자를 받게 되었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이순주씨에게 미국 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아무리 힘들어도 청소, 세탁업, 식당 종업원으로는 살 수가 없었다. 또다시 돈을 끌어 모아 조그만 경양식 식당을 운영했다.

“먹고 살만큼 운영이 되었습니다. 더 돈을 벌어야 한다는 욕심 때문에 여자를 고용하여 술을 팔기 시작했습니다. 호황을 누렸습니다. 참 이상하지요. 갑자기 큰 트레일러가 우리 가게를 덮쳤어요. 날벼락이죠. 이 운전수가 술을 먹고 옆집 가게를 덮치려고 했는데 저의 가게를 쓸어 버렸습니다. 정말로 온전한 커피잔 하나가 없을 정도로 가게가 망가져 버렸습니다. 큰 빚더미에 주저앉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한 사람을 철저하게 몰아붙이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철저히 성공과 거리가 먼 삶을 사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이제는 밑바닥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던 이순주. 청소부와 식당 잡일, 세탁업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 찾아온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너는 나의 사랑하는 딸’이다. 뜻하지 않은 만남은 이순주를 조금씩 바꿔놓기 시작했다. 보통 병들었을 때나 역경이 닥쳤을 때 인간의 심성은 나약해지고 절대자에게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하나님을 찾지만 이순주에게는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셨다.

그러나 삶은 여전히 힘들었다. 평생 불효를 하다가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강가에 묻었다는 청개구리의 이야기는 효도에 대한 긴 여운을 남긴다. 이순주는 부모님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다. 부모님의 이야기가 나오자 눈가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하더니 끝내 눈물을 흘린 이순주.

“돈이 없어서 올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3개월만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두 손을 꼭 쥐고 돌아가셨는데 그것을 펴보니까 한손에는 십자를, 한 손에는 저의 사진이 쥐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천국에 가면 ‘죄송하다’고 꼭 사죄하려고 합니다.”

인기를 누릴 때 안마사가 없으면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편안한 삶을 살았던 이순주는 이렇게 철저히 낮아짐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아무 것도 없는데 하나님을 좀 더 알고 싶어졌습니다. 아는 분을 통해 아틀란타성경대학에 입학하여 공부하고 임마누엘신학대학에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배웠습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주님 보다는 ‘관세음보살’이 먼저 나왔던 이순주씨는 전도사의 삶을 선택했다.

“하나님은 저로부터 물질과 인기를 가져 가셨지만 그 대신 사랑과 건강을 주셨습니다. 그동안 지병인 위장병이 사라지고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자주했던 쇼핑병도 없애 주셨습니다. 불쌍한 사람을 보면 도와주고 싶은 넉넉한 마음을 주셨습니다. 도와 달라고 하면 돼지 저금통까지 털어서 도와줄 수 있는 끝없는 사랑을 주셨습니다. 단 하나 저 때문에 오랫동안 어렵게 살면서 원망하지 않은 형제들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고 싶습니다.”

여자 코미디언으로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까지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이순주씨는 이렇게 하나님의 종으로 순종의 삶을 배우고 있었다. 철저히 훈련시켜 순종을 가르쳤던 모세처럼 하나님은 이순주전도사를 순종의 종으로 사용하기를 원했던가보다. 지금은 조지아기독교방송국 부국장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하나님과 만남은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행복을 깨닫게 해줬다고 말하는 이순주전도사를 통해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체험해 본다.

송영락 기자 (ysong@igoodnew.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