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가수 윤형주
2005. 3. 21. 14:03ㆍ신앙간증
성명 / 윤형주
직업 / (전)대중가수
제목 / 가수가 말하는 왜 예수님을 믿어야 하나?
지금 이시간에도 나를 위해 중보기도하는 분이 여럿 있는데 그 중에 한분이 바로 내가 어렸을 때 찬송가를 가르쳐주신 어머니 김귀순 권사님이시다. 6.25 피난시절 어머님은 자신이 사랑하던 찬송가를 불러주셨다. 내가 즐겨부르는 찬송은 "저 장미꽃 위에 이슬"이다. 멜로디가 참 아름답고 가사가 참 좋다. 국민학교 시절 KBS '누가누가 잘하나'라는 경연대회 1차 예선에 낙선한 나는 항상 소심하고 말이 없는 아이였다. 그러나 친구 어머님이 교회 성가대로 나를 보냈고 이곳에서 찬양을 부르면서 나의 내성적이고 두려워하는 성격이 치유되기 시작했다. 그때 만났던 성가대 선배 중의 하나가 조영남씨였다. 고등학교 시절 '예수 나를 위하여'를 불러 성전 안에 있는 4백여명의 사람들로 하여금 은혜의 눈물로 손수건을 적시게했던 일도 있었다. 연세대 의대에 합격한 후 아버지로부터 그토록 갖고 싶었던 기타를 선물받았다. 종로음악학원에 등록했지만 프로그램이 맘에 들지 않아 직접 기타 교본을 펴놓고 혼자서 연습했다. 친구들 앞에서 그리고 주말에 이화여대 학생들과의 미팅에서 나의 기타실력과 팝송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나는 대학가에서 유명인사가 됐다. 미팅, 카니발, 페스티발에 불려 다녔다. 말하자면 캠퍼스 가수가 된 것이다. '의대생 가수 탄생, 의대생 스타 탄생' 매스컴에 크게 보도됐고 기자들과 프로듀서들이 학교로 나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나는 친구들의 동경과 선망의 대상이었다. 당시 통기타 문화를 주도하던 트윈 폴리오에서 활동하면서 소녀들의 '오빠 부대'를 처음 창출하기도 했다. 1968년 12월 20일 남산 드라마 센터에서 트윈 폴리오의 첫 공연은 그야말로 대성황이었다. 인기인은 돈을 벌게 된다. 이 돈은 처음에는 사람에게 자신감을 준다. 자신이라는 존재가 크게 느껴진다. 조금씩 남이 자신을 알아주는 것을 의식하게 되고 거드름과 오만의 냄새, 돈 냄새가 풍긴다. 돈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사용하는 사람들의 잘못된 관념 때문이다. 돈은 나를 변질시켰다. 경기 고등학교와 연대 의대생, 인기 가수였던 나는 부지불식간에 물질의 노예로 전락했다. 신앙 때문에 전 친척이 함경도에서 북간도로 이주할 정도로 신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고 윤동주 시인이 친척 형 중 제일 큰 형이었다. 이런 집안 배경까지도 나를 자만케했다. 나는 1975년 12월 한국의 2백여명의 연예인들이 구속되는 대마초 사건 1호로 구속됐다. 2호로 후배 이종룡, 3호로 친구 이장희가 차례차례 구속됐다. 열광적인 박수를 받던 한 가수가 수갑이 채워진 채 서대문 구치소로 옮겨졌다는 것은 죽음이었고 지옥이었다. 박수를 치던 손으로 모두 손가락질을 했다. 이 충격을 견디느니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라는 유혹이 나를 괴롭혔다. 어느날 어머님이 면회를 와 성경책을 내 방안에 들여놓으셨다. 나는 어머님 얼굴도 쳐다 보지 않았다. '지금이 성경책을 읽을 때입니까?' 성경책을 집어 던져버렸다. 성경은 감옥 방안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어느 햇살 밝은 아침, 그 성경책 위로 밝고 환한 햇살이 비추었다. 그 햇살은 성경을 비추기 위해 내려온 것만 같았다. 성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읽고 싶은 마음이 조금 들었다. 사실 나는 어려서부터 성경책 속에서 자라왔다. 아버지가 국제기도협회 이사였기에 성경보급을 위해 성경 수백권이 집안에 쌓여 있지만 그 성경책들은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감옥방안에서 내 손에 들린 그 성경책은 달랐다. 첫장을 열어 창세기부터 읽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나의 두꺼운 죄악의 껍질을 벗겨냈다. 양파 껍질 벗기듯이 내 영혼의 껍질이 얇아져갔다. 성경을 읽어가는 동안 뚜렷한 한가지 사실은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리고 계셨는가'라는 사실이었다. 나를 참아주셨다.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리고 기다리셨다. 용서하시고 참아주시고 용납하시고 포기하지 않으셨다. 나는 끊어진 관계라고 생각했는데 그분은 나를 놓지않고 계셨다. 서대문 구치소의 고통스러운 자리가 축복의 자리가 된 것이다. 하나님은 나를 감옥 안에서 만나주셨다. 텔레비젼이나 카메라 앞에서 만나 주지 않으셨다. 모든것이 깨지고 끝났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나를 만나주셨다. 그때 지은 찬양이 '너는 내것이라'이다. 나와 함께 고생하던 후배 이종룡은 하나님의 종, 목사가 되었고 이장희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 라디오 코리아 방송을 통해 미주지역에 복음 방송을 내보내고 있다. 하나님은 나를 동역자로 불러주셨다. 교회가 영적으로 깨어나 무너졌던 가정 제단이 다시 일어나고 떠났던 찬양이 돌아오고 자녀들의 입에서 기도가 시작되도록 나를 사용하신다. 그후 나를 원하는 모든 집회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달려간다. 또 교도소에도 자주 간다. 갇혀 본 사람만이 갇힌 사람의 심정을 더 잘 알기 때문이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분의 사랑 때문이다. 그 사랑이 나를 헌신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나를 만나주신 하나님, 찬양 속에 거하시는 능력의 하나님, 그분을 찬양으로 전하는 나는 참으로 행복하고 감사하다. 주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이 사명 감당하길 간절히 고백한다.
직업 / (전)대중가수
제목 / 가수가 말하는 왜 예수님을 믿어야 하나?
지금 이시간에도 나를 위해 중보기도하는 분이 여럿 있는데 그 중에 한분이 바로 내가 어렸을 때 찬송가를 가르쳐주신 어머니 김귀순 권사님이시다. 6.25 피난시절 어머님은 자신이 사랑하던 찬송가를 불러주셨다. 내가 즐겨부르는 찬송은 "저 장미꽃 위에 이슬"이다. 멜로디가 참 아름답고 가사가 참 좋다. 국민학교 시절 KBS '누가누가 잘하나'라는 경연대회 1차 예선에 낙선한 나는 항상 소심하고 말이 없는 아이였다. 그러나 친구 어머님이 교회 성가대로 나를 보냈고 이곳에서 찬양을 부르면서 나의 내성적이고 두려워하는 성격이 치유되기 시작했다. 그때 만났던 성가대 선배 중의 하나가 조영남씨였다. 고등학교 시절 '예수 나를 위하여'를 불러 성전 안에 있는 4백여명의 사람들로 하여금 은혜의 눈물로 손수건을 적시게했던 일도 있었다. 연세대 의대에 합격한 후 아버지로부터 그토록 갖고 싶었던 기타를 선물받았다. 종로음악학원에 등록했지만 프로그램이 맘에 들지 않아 직접 기타 교본을 펴놓고 혼자서 연습했다. 친구들 앞에서 그리고 주말에 이화여대 학생들과의 미팅에서 나의 기타실력과 팝송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나는 대학가에서 유명인사가 됐다. 미팅, 카니발, 페스티발에 불려 다녔다. 말하자면 캠퍼스 가수가 된 것이다. '의대생 가수 탄생, 의대생 스타 탄생' 매스컴에 크게 보도됐고 기자들과 프로듀서들이 학교로 나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나는 친구들의 동경과 선망의 대상이었다. 당시 통기타 문화를 주도하던 트윈 폴리오에서 활동하면서 소녀들의 '오빠 부대'를 처음 창출하기도 했다. 1968년 12월 20일 남산 드라마 센터에서 트윈 폴리오의 첫 공연은 그야말로 대성황이었다. 인기인은 돈을 벌게 된다. 이 돈은 처음에는 사람에게 자신감을 준다. 자신이라는 존재가 크게 느껴진다. 조금씩 남이 자신을 알아주는 것을 의식하게 되고 거드름과 오만의 냄새, 돈 냄새가 풍긴다. 돈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사용하는 사람들의 잘못된 관념 때문이다. 돈은 나를 변질시켰다. 경기 고등학교와 연대 의대생, 인기 가수였던 나는 부지불식간에 물질의 노예로 전락했다. 신앙 때문에 전 친척이 함경도에서 북간도로 이주할 정도로 신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고 윤동주 시인이 친척 형 중 제일 큰 형이었다. 이런 집안 배경까지도 나를 자만케했다. 나는 1975년 12월 한국의 2백여명의 연예인들이 구속되는 대마초 사건 1호로 구속됐다. 2호로 후배 이종룡, 3호로 친구 이장희가 차례차례 구속됐다. 열광적인 박수를 받던 한 가수가 수갑이 채워진 채 서대문 구치소로 옮겨졌다는 것은 죽음이었고 지옥이었다. 박수를 치던 손으로 모두 손가락질을 했다. 이 충격을 견디느니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라는 유혹이 나를 괴롭혔다. 어느날 어머님이 면회를 와 성경책을 내 방안에 들여놓으셨다. 나는 어머님 얼굴도 쳐다 보지 않았다. '지금이 성경책을 읽을 때입니까?' 성경책을 집어 던져버렸다. 성경은 감옥 방안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어느 햇살 밝은 아침, 그 성경책 위로 밝고 환한 햇살이 비추었다. 그 햇살은 성경을 비추기 위해 내려온 것만 같았다. 성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읽고 싶은 마음이 조금 들었다. 사실 나는 어려서부터 성경책 속에서 자라왔다. 아버지가 국제기도협회 이사였기에 성경보급을 위해 성경 수백권이 집안에 쌓여 있지만 그 성경책들은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감옥방안에서 내 손에 들린 그 성경책은 달랐다. 첫장을 열어 창세기부터 읽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나의 두꺼운 죄악의 껍질을 벗겨냈다. 양파 껍질 벗기듯이 내 영혼의 껍질이 얇아져갔다. 성경을 읽어가는 동안 뚜렷한 한가지 사실은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리고 계셨는가'라는 사실이었다. 나를 참아주셨다.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리고 기다리셨다. 용서하시고 참아주시고 용납하시고 포기하지 않으셨다. 나는 끊어진 관계라고 생각했는데 그분은 나를 놓지않고 계셨다. 서대문 구치소의 고통스러운 자리가 축복의 자리가 된 것이다. 하나님은 나를 감옥 안에서 만나주셨다. 텔레비젼이나 카메라 앞에서 만나 주지 않으셨다. 모든것이 깨지고 끝났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나를 만나주셨다. 그때 지은 찬양이 '너는 내것이라'이다. 나와 함께 고생하던 후배 이종룡은 하나님의 종, 목사가 되었고 이장희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 라디오 코리아 방송을 통해 미주지역에 복음 방송을 내보내고 있다. 하나님은 나를 동역자로 불러주셨다. 교회가 영적으로 깨어나 무너졌던 가정 제단이 다시 일어나고 떠났던 찬양이 돌아오고 자녀들의 입에서 기도가 시작되도록 나를 사용하신다. 그후 나를 원하는 모든 집회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달려간다. 또 교도소에도 자주 간다. 갇혀 본 사람만이 갇힌 사람의 심정을 더 잘 알기 때문이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분의 사랑 때문이다. 그 사랑이 나를 헌신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나를 만나주신 하나님, 찬양 속에 거하시는 능력의 하나님, 그분을 찬양으로 전하는 나는 참으로 행복하고 감사하다. 주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이 사명 감당하길 간절히 고백한다.
출처 : 명성교회 엘리사 남선교회
글쓴이 : 윤정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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