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 간증
2008. 2. 25. 10:55ㆍ신앙간증
CBS <새롭게하소서> 李 당선인 신앙간증 특집 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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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번 방송에는 포항 현지 취재를 통해 담아낸 그의 어린 시절이 생생하게 그려지며, 이 당선인의 교회학교 시절 교우들과 어머니 故 채태원 집사의 신앙 동료 인터뷰 등 다채로운 내용이 포함된다.
"많은 사람들의 기도가 있기에 대한민국의 미래는 밝을 것!"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 돌입 직전이었던 지난해 4월 29일 전주순복음교회에서 공개 신앙 간증을 했던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 당시 그는 간증을 통해 "어려웠던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어머니의 기도로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고 말하며 "어머니의 기도가 결국 이뤄졌듯, 북핵문제와 국민 분열 등 어려운 문제가 산적한 상황이지만, 나라와 사회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많은 우리 대한민국의 미래는 밝을 것"이라고 기대감을 표시했다.
"하나님의 섭리로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30대에 국내 굴지의 건설회사 사장이 되며 샐러리맨의 신화를 쓴 후 국회의원과 서울시장을 거쳐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오른 이 당선인. 그러나 그는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것처럼 보였지만 화려한 이력 뒤엔 가난과 시련에 맞서 싸워온 어린 시절이 있었다"고 어려웠던 어린 세월을 회상했다.
그는 "단칸방에서 일곱 식구가 살 정도로 가난했기에 어머니를 도와 국화빵 장사, 뻥튀기 장사, 과일 장사 등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였다"고 말하며 "이런 가난한 형편 때문에 애초에 고등학교 진학은 꿈도 꾸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바로, 그 '꿈도 꾸지 못했던' 고등학교 진학을 가능케 한 하나님의 섭리를 간증했다.
"담임선생님 등 저를 잘 알던 선생님들은 집안 형편을 알기에 고등학교 진학을 권유할 수 없었죠. 그러나 저를 유독 괴롭혔던 한 선생님이 제 집에 찾아와 야간 상업고등학교 진학을 권유했습니다. 그리고 '전교 1등을 유지해 장학금을 타며 학교를 다니겠다'고 어머니를 설득한 후 동지상고에 진학하게 됐습니다. 실제로 3년간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고요. 이처럼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던 것은 저와 친하지 않았던 선생님을 저희 집으로 보낸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 때문이었습니다."
"지금은 힘들지만 언젠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은 "지금은 힘들지만 언젠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는 어머니 故 채태원 집사의 말이 살아오며 가장 큰 힘이 됐다"며 자신의 지금을 있게 한 어머니의 신앙을 소개했다.
"어머니의 기도는 항상 순서가 정해져 있었습니다. 나라와 사회를 위한 기도가 첫 번째였고, 그 다음이 불신자를 위한 기도, 마지막으로 자식들을 위한 기도를 하셨죠. 기도를 마친 후에는 새벽예배를 드리러 갔고, 모든 기도를 마친 후에야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셨죠."
항상 남을 위한 기도를 먼저 했던 故 채태원 집사는 후덕한 인품으로 인해 평소 주변 사람들에게 칭송이 자자했다. 그런 그녀의 인품과 신용이 가장 빛을 발했던 때는 바로 이 당선인이 대학교에 입학할 무렵.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달동네에서 주경야독을 하며 홀로 준비해 고려대학교에 합격했습니다. 그러나 대학 입학금이 없어 대학 진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죠. 그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어머니가 생선 좌판을 하던 이태원 시장 상인들이 제가 환경미화원으로 일하는 조건으로 입학금을 마련해준 것입니다. 일정한 주소도 없고 신원도 조회가 안 되는 저를 위해 상인들이 발 벗고 도와주는 기적은 바로 어머니때문이었죠. 어머니는 시장에서 가장 가난했지만, 몸소 시장 뒷정리까지 도맡아 하는 등 그곳에서 가장 존경받는 분이셨습니다. 그런 어머니의 신용을 보고 상인들이 도와주게 된 것이죠."
이 당선인은 당시 일을 회상하며 "수천마디 말보다 덕이 되는 행실로 사람들에게 믿음을 보여주었던 어머니야말로 행함이 있는 믿음을 보이셨던 분이었다"고 말했다.
"못사는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주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은 "야간 상업고등학교 출신에 시장 청소로 학비를 벌던 상황이었고, 입학식 때 입었던 옷을 대학 내내 입으며 유명세를 탈 정도였다"고 가난했던 고려대학교 재학 시절을 돌이켰다. 그러나 그는 이에 주눅 들지 않고 고려대 경영대 학생회장에 출마해 당선되었고, 굴욕적인 한일협상에 반대하는 6.3 학생운동에 가담하여 6개월간 복역하게 된다. 그리고 구치소 안에서 그의 진로는 바뀌게 된다.
"저와 제 가족처럼 못사는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주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학생운동을 했던 많은 사람들과는 달리 취업을 준비하게 됐죠."
그러나 그에게 취업의 문은 높았다. 이 당선인은 "학생운동권 출신은 정부의 압력으로 일반 기업체 입사에 많은 제약을 받았다"고 당시의 분위기를 설명했다.
故 정주영 회장과 함께 일군 신화!
이 당선인은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의 만남, 그리고 샐러리맨의 신화를 쓴 현대건설 재직 시의 에피소드를 소개하는 데에도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수감경력으로 인해 대기업에는 취직이 안 되던 시절, 당시 종업원 98명의 작은 회사였던 현대건설 구인광고를 보게 됐습니다. 지원을 하고 면접을 보러 가니 첫 대졸 지원자가 왔다고 정주영 회장 등 모든 사람이 당황하더라고요. 정 회장의 질문은 딱 두개였습니다. '이군, 합격하면 우리 회사 틀림없이 올 건가?'와 '이군, 건설이 뭐라고 생각하나'였죠. 물론 더 좋은 회사에 입사하기 전까지만 다닐 생각이었지만 '건설은 창조입니다'라는 한 마디를 남겼더니 정주영 회장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며 바로 합격시켰습니다. 그 때부터 함께 신화를 만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후 37세에 현대건설 사장에 오른 이 당선인은 그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까지 방송될 정도로 '신화적인 샐러리맨'으로 인정받았다. 그리고 현대건설은 그가 퇴사할 무렵 17만 명에 가까운 직원을 거느릴 정도로 성장했다. '못사는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주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구치소 안의 꿈이 이뤄진 것이었다.
"장로 시장을 어떻게 볼지 가장 두려웠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이 당선인의 특별한 관심은 2002년 서울시장이 된 후에도 이어졌다. 시장이 된 뒤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젊은 시절 독학을 하며 기거했던 달동네를 방문하는 일이었다. 그곳에서 치매노인이 방치되어 있는 참혹한 현장을 목격하게 된 그는 '하나님이 이런 것을 구제하라고 시장으로 일하게 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고 고백했다.
또한 그는 "교회의 장로인 자신이 어떻게 비춰지는 가에 따라 하나님을 욕되게도 하고, 영광 돌리게도 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괴로운 시간들을 가졌다"고 털어놓았다.
특집 새롭게하소서 - 제17대 대한민국 대통령 당선인 이명박 장로 편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이명박 장로'가 전하는 생생한 지난 삶과 감동적인 신앙 고백은 오는 24일과 25일 CBS TV의 최장수 간증프로그램 '새롭게하소서'에서 2부작으로 방송된다. 특히 취임식이 진행되는 25일(月) 오전에는 1부 간증 재방송(오전 9시 10분)과 제17대 대통령 취임식 생중계(오전 10시~오후 1시)가 연이어 방송될 예정이다.
■ 방송일정
- CBS TV (Skylife 412번/각 지역 케이블TV)
1부 (본방) 2월 24일(日) 저녁 10시
(재방) 2월 25일(月) 새벽 4시
(삼방) 2월 25일(月) 오전 9시 10분 (CBS TV 제17대 대통령 취임식 생중계 직전)
2부 (본방) 2월 25일(月) 저녁 10시
(재방) 2월 26일(火) 새벽 4시
(삼방) 2월 26일(火) 오전 9시 50분
- CBS 표준FM (서울/수도권 98.1Mhz)
1부 - 2월 24일(日) 저녁 10시 10분
2부 - 2월 25일(月) 저녁 10시 10분
■ [첨부] CBS 새롭게하소서 '이명박 당선인 편' 간증 전문
특집 새롭게하소서 - 제17대 대한민국 대통령 당선인 이명박 장로 편(1부)
제가 신앙을 간증하기엔 하나님이 보시기에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저희 어머님이 일생동안 나라와 사회, 가족,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를 많이 하셨습니다. 정말 가난한 시대에 가난하게 살았던 어머니의 기도가 이뤄지는 것을 생전에 봤기에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돌아가시며 다른 어떤 유산도 없었지만 하나님을 만나게 해준 어머니의 신앙에 큰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시골에서 매우 가난하게 자랐습니다. 6형제가 단칸방에 사니깐 저희 어머님이 모든 형제를 초등학교 중학교밖에 못 보내니 집안에 희망이 없다며 자식 한명만 고등학교와 대학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막내인 저는 중학교를 졸업하니 이제 돈을 벌어 형님을 도우라고 했기에 길거리에서 장사를 했던 저에게 고등학교 갈 기회를 하나님께서 뜻밖에 주셨습니다. 제가 중학교에 다닐 때 저를 매우 괴롭히던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아침밥을 어머님이 밥으로 못해주고 양조장에서 나온 술 찌꺼기로 죽을 끓여주셨는데 그걸 먹으면 눈알이 빨개지고 입에서 냄새가 났어요.
그럴 때마다 선생님이 제 사정도 모르시고 절보고 뭘 먹었냐면서 야단을 치셨습니다. 그럴 때 제 사정을 얘기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고 있으면, 교무실로 데리고 가서 여러 선생님 앞에서 하는 말이 "이 어린놈이 아침부터 이상한 것을 마시고 왔다. 얼굴 좀 봐라" 고 하셨습니다. 제가 그 선생을 정말 보기 싫었지만, 선생님께서 야단치면 이유도 설명하지 않고 눈과 입을 딱 다물고 있던 제 잘못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학교 졸업하고 길에서 그 선생님을 만났는데 "명박이 아니냐? 네가 왜 지경이냐?" 며 깜짝 놀라셨어요. 대답도 안하고 뒤돌아섰는데 며칠 후 선생님께서 저희 단칸방에 찾아오셨습니다. 어머님이 행상하시고 밤늦게 돌아오셔서 선생님을 뵈니 선생님께서 크게 사과하셨어요. 이런 상황인지 몰라서 미안하시 다며 고등학교를 어떻게든 보내주겠다고 했어요. 어머님이 대답을 안 하시자 선생님이 집안 형편을 돌아보고 돌아가셨고 그 후 그 선생님이 계속 찾아오셨어요.
마지막으로 하시는 말이 야간상업고등학교라도 나오면 세상 사는데 도움 될 것이라며 강력하게 권유하셨어요. 그때야 어머님이 처음으로 하는 말씀이 야간고등학교는 등록금이 없냐고 물었습니다..선생님께서 낮에 벌고 밤에 공부하면 된다고 말씀하시니 어머니께선 낮에 버는 돈은 다른 곳에 써야 한다고 하셨어요. 선생님께서 기막혀 하시면서 야간학교 시험 쳐서 1등으로 입학하면 등록금 면제되고, 계속 1등하면 학비 면제되니 시험이나 치게 하자고 하셨어요. 어머님이 그걸 뿌리치지 못하고 "시험은 치르는데 운이 좋아서 1등하면 학교 들어가는데. 들어가서 2등하면 학교 못 다니게 돼요.." 하셨어요.
어머니와 선생님의 그런 대화 끝에 결국 시험보고 들어가게 됐고, 3년 전교수석으로 졸업하게 됐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악질 같은 선생님을 통해 저를 학교에 보내셨는지 모르겠어요. 저를 아껴주셨던 선생님들은 제 사정을 아셨기에 고등학교 못갈 거란 것을 당연히 알았는데 이 선생님은 제 사정을 모르셨기에 뜻밖의 상황이 펼쳐졌던 것이었죠.
고백할게 있는데요, 제가 고등학교 3년 전교수석이었다고 하면 사람들이 제 머리가 좋다고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 학교에 대학을 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공부하는 학생도 없고 선생님도 열심히 가르치지 않았어요. 그 졸업장으로 취직할 수 있는 데가 없으니 목표도 희망도 없었던 거죠. 유일하게 목표가 있었던 사람은 1등해야 학교를 다닐 수 있었던 저였습니다.
야간고등학교를 다닐 때 어머님이 행상을 하시다가 시골 사거리 길가에서 국화빵 굽는 일을 시작했어요. 아침 일찍 반죽한 것을 가져와서 어머니와 빵을 굽다가 학교에 가고 수업이 마치면 어머니를 돕다가 집으로 왔어요. 어느 날 학교에 갔다 오니 어머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함께해서 수입이 적으니 너는 별도로 하라" 1주일 뒤에 어머님이 빵 굽는 기계 옆에다가 뻥튀기 기계를 놓으시면서 뻥튀기 장사가 수입이 낫다고 들었다면서 학교 다녀오면 매일 연습을 하라고 하셨어요.
요즘은 기계가 자동인데 그땐 수동이라 드는 속도를 잘 맞춰야 뻥튀기가 예쁘게 나왔어요. 학교 다녀와서 1시간씩 굽는 일을 했는데 연습을 열흘쯤 했더니 됐다면서 내일부터 이 일을 하라며 장사할 장소도 물색해주셨어요.
그 다음날 새벽부터 어머님과 제가 따로 각자의 일자리로 갔습니다. 일을 시작하려고 하니 하필이면 그 자리가 시골 여자중학교 들어가는 입구 코너였어요. 불을 열심히 피우고 시작했는데 여학생이 들어오더라구요. 비록 남루한 교복을 입고 있었지만 여학생이 오니 창피해서 뒤에 가게에 숨어있었죠. 그런데 아침엔 1시간씩 숨으면 되겠는데 오후엔 학생들이 시도 때도 없이 나오니 일을 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고민을 하다가 시골이 해변가라 밀짚모자가 많았는데, 밀짚모자 챙이 큰 것을 주문해서 여학생들이 지나가면 썼습니다. 어깨와 앞이 가려지니 그걸 쓰고 있다가 여학생들이 가면 다시 벗는 식으로 했어요.
어느 날 아침 누가 밀짚모자 위를 주먹으로 박아서 고개를 드니 어머님이셨어요. 막내아들이 장사를 시작한지 한참 됐으니 지금쯤 자리를 잡았는지 보러 오신 것이었죠. 자기가 왔는데도 알아보지 못하니 어머님이 부드럽게 하시는 말씀이 "장사를 하려면 물건을 파는 사람과 손님과 눈이 마주쳐야 팔린단다. 손님이 왔는지 갔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장사를 하니?" 그러더니 갑자기 손으로 제 가슴을 탁 치며 "왜 부끄러워하니? 네가 살기 위해서 남을 속이니? 동정을 구하니? 너는 살기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왜 부끄러워 하니? 당당해라."
저는 그 때 어머니의 말씀이 옳은지 그른지는 고사하고 누가 들을까봐 두리번거렸어요. 속이 부글부글 끓으며 어머님을 원망하며 어머님이 많이 못 배우셔서 나를 이해못한다고 생각했어요. 저희 어머님이 많이 못 배우고 힘들게 사셨지만 정직하고 당당하게 사셨고, 저희 자식들한테 훌륭한 삶의 모습을 보이셨어요.
중학교 3학년 때 학교를 다녀와서 어머니 행상을 도우러 다니는데 어머니께서 하시는 말씀이 남자가 이정도 자랐으면 남의 일을 도와야 한다고 하셨어요. 부잣집 딸이 시집가는데 손이 모자르니 가서 도우라고 하셨는데, 처음에 그 얘기를 들었을 땐 가서 밥 얻어먹고 오라는 말씀인줄 알았죠. 그런데 어머니께선 "남의 일하려면 열심히 해라. 그 집에서 일하는 동안 물 한모금도 얻어먹지 말라."
일을 도와주러 갔지만 주인이 거지가 온 줄 알고 들어오지도 못하게 했어요. 일찍 들어온 저에게 어머님은 아무 말도 안하시고 다음에 또 어느 집에 가서 도우라고 하셨어요. 그 집에서 열심히 일했는데 주인이 웬 거지같은 애가 일하니 자꾸 감시하더라구요. 열심히 일하고 오후에 슬그머니 나가려고 했는데 감시하던 주인이 절 부르더니 "얘야, 네가 어떻게 남의 일을 열심히 하니? 일하는 걸 보니 음식에 손도 안 대더라. 여기서 기다려라." 고 하더니 음식을 싸가지고 오는데 거지한테 주는 것 같이 안주고 귀하게 싸주면서 가족들과 나눠 먹으라고 했어요. 하지만 어머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사양하고 나왔어요.
늘 남으로 도움을 받고 싶은 심정으로 살았는데, 나보다 몇 배 잘사는 부잣집에 열심히 일해주고 아무 대가 없이 나오니 느낌이 다르더라구요. 그 다음에 일 도와주러 갔을 땐 일 도와주러 왔다고 당당히 말했고, 물 한모금 안 먹고 일 끝내고 간다고 인사도 하고 나왔어요. 놀라운 변화가 있었던 것이죠.
저희 어머님은 왜 그래야 하는지 이유를 설명 안하셨지만 먼 훗날 어른이 돼서 스스로 깨달았어요. 남에게 도움 받고 싶은 마음으로 일생 산다면 먼 훗날 세상일 안 될 때 남만 탓하며 원망하게 됩니다. 그렇게 거지가 도와주고 봉사하며 당당해질 수 있었습니다
저희 어머님은 저희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셨어요. 새벽 4시가 되면 가족들을 깨워 엎드리게 했는데 기도를 알아듣지 못하는 아기도 엎드리게 했어요.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하셨는데 어머니의 기도는 항상 감사해하면서 첫 대목이 나라와 사회가 불안하니 안정시켜 달라는 것이었어요. 형님과 저는 기도하다가 속으로 지금 급한 게 많은데 무슨 나라와 사회냐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의 이름을 대며 기도했고, 점치고 굿하는 사촌 형수와 형님을 위해 특별히 기도했고, 마지막으로 자식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서울 가서 공부하는 형님 기도를 길게 하셨고 그 다음엔 객지에 돈 벌러 가서 소식 없는 형님을 위해 길게 했고, 어릴 때부터 어머니를 도우며 행상하고 뻥튀기 장사하고 밤에는 사과장사 했던 저를 위한 기도는 형편없게 짧았지요. 건강하고 예수 잘 믿게 해달라는 정도였어요. 제 밑에 여동생이 있었는데 걔를 위해선 했는지 안했는지도 기억이 없어요. 어머님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기도했기에 객지에 있는 형제들도 새벽 4시가 되면 지금쯤 어머님이 기도하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어머니는 기도를 마치고 새벽예배를 드리러 가셨고 돌아와서 일을 하러 나가셨습니다.
어머님은 우리 형제를 키울 때 남이 잘못해서 싸워도 우리에게 참으라고 하셨어요.
"얘야, 지금은 어렵?嗤? 언젠간 하나님이 복을 주실 거야."
자신이 해주겠다고 안하시고 늘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서 말씀하셨는데, 하루에 몇 번씩 그런 얘기를 들으며 자랐어요.
야간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서울로 갔는데 큰 도시에서는 무엇을 하든지 먹고 살기에 창피하지 않을 것 같았어요. 갈 곳이 없어 무허가 판자촌 달동네에 살았는데 지방에서 일자리 없는 사람들이 올라와서 방 하나에 몇 명씩 살았어요. 새벽이면 인력시장에 나가 줄을 섰는데 일을 할 때도 있고, 공칠 때도 있었어요. 새벽에 나가면 오늘은 일할 수 있을지 공칠지 그런 불안감으로 살았지요. 저는 그럴 때 하나님께 기도하는 제목이 있었어요. 월급이 적어도 좋으니 아무리 힘들더라도 한 달 일하고 월급 받는 일자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어요. 무허가 집은 시골에서 올라오는 사람이 많으니 방값이 계속 올라 6개월마다 집을 옮겨 다녔어요. 똑같은 월세를 갖고 2-3년 한자리에서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지만 이뤄지지 않았어요.
나중에 어떤 분께서 하시는 말이 "네 학력으로 월급 받는 일자리에 취직 할 수 없으니 대학 시험을 쳐라." 고 하셨어요. 대학에서 중퇴해도 그 학력으로 일자리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하셨기에 그 말을 듣고 청계천에 고물상 헌책 파는 곳에서 입시책을 구했어요. 헌책방 주인이 이과냐 문과냐 물어보는데 상과대학 경영대학을 간다고 했더니 "야 임마, 그게 문과다" 라며 책을 골라주셨어요. 그런데 헌 책 사는 돈이 모자르니 주인이 고물책 값도 못내는 놈이 무슨 대학을 가냐고 하셨어요. 그 주인에게 말대꾸하고 싸우다가 보니 주인의 맘이 바뀌어서 있는 돈만 내고 가라고 했어요.
그 책을 갖고 공부하는데 이걸 가지고 대학을 합격할 수 있을지, 합격하면 입학금을 어디서 구할지 희망이 없어 포기하다가 다시하고 포기하고를 반복했어요. 만일 제가 하나님을 안 믿었다면 모든 것을 포기했을 거에요. 그리고 제가 살던 곳은 살기 힘드니 사람들이 조폭이나 사기꾼도 따라가고 쉽게 사는 길을 택했어요. 그래도 저는 제 길을 바르게 갈 수 있었던 것은 어릴 적 힘들 때마다 어머님이 "얘야 지금은 힘들지만 언젠간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 이 말을 수 천 번 듣고 자랐기에 포기하고 편한 길 따라 살고 싶은 마음 들 때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신 다는데 어디까지 왔는지 다 왔는지..그런 생각으로 참을 수 있었어요. 전적으로 어머님 덕분이었어요.
고려대 경영학과를 목표로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했는데 나중엔 병들어서 시험도 칠 수 없을 정도였어요. 평소 동네 부잣집 할머니가 산책하다가 합숙소를 가끔 열어보며 고향사람이라며 봐주곤 했는데 어느 날 입학시험 앞두고 쓰러진 제 모습을 보더니 "시험은 무슨 시험이냐? 사람이 살고 봐야 한다." 며 관두라고 하셨어요, 제가 합격해도 다닐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그런데 놀랍게도 시험 치기 전에 할머니께서 주전자와 약봉지를 들고 나타나 그렇게도 원했으니 죽을 때 죽더라도 시험은 쳐보라고 하셨어요. 어디 아픈지도 모르고 가져온 약을 먹고 시험을 쳐서 놀랍게도 합격을 했습니다.
제겐 기적 같은 일이었어요. 과외한번 안 받고 헌책으로 공부해서 합격했어요. 그런데 합격을 해도 입학금이 없어 대학교에 갈 수 없게 되자 하나님께 처음으로 원망을 하게 됐어요. 처음부터 시작하게 말지 왜 이렇게 고생시키고 못 다니게 하냐면서 포기했어요.
그 때 마침 저희 부모님이 6개월 전에 서울에 올라와서 변두리 이태원에 단칸방 얻어 여동생과 살고 있었어요. 방이 좁아 저는 다른 곳에서 살고 있었는데 저희 어머님이 동네 재래시장 생선가게 앞에서 조그만 바구니에 생선 몇 개를 놓고 장사를 하고 있었어요. 한 달에 한 번씩 가끔 가면 좌판 하는 어머니와 노동자인 아들이 마주치는 게 창피해서 멀리서 서로 보고 고개를 끄덕거리며 서로 잘 있다는 신호를 전했어요.
대학 포기하고 하나님께 원망했지만 대학 합격한 걸 어머님께 알리고 자랑하고 싶어, 쏜살같이 어머님께 달려가 귀에다 대고 대학에 합격했다고 말씀 드리니 남의 얘기인줄 알고 고개를 끄덕거리셨어요.
제가 합격했다고 자꾸 얘기하니 니가 대학에 합격했냐고 놀라셨어요. 고려대학교에 합격했다고 말씀드렸더니 얼굴이 환해지며 기쁜 표정을 지으셨는데 다시 얼굴이 쪼글쪼글해지면서 "니가 어떻게 하려고 그런 일을 저질렀노?" 입학금 생각에 어머님의 가슴이 철렁하셨던 것이었어요. 수십 년이 지났지만 그때의 어머님의 표정을 잊지 못하고, 앞으로도 잊지 못할 것 같아요.
어머니를 거꾸로 위로하며 제가 대학 다닐게 아니라 시험만 쳐봤다고 한 뒤 쏜살같이 달동네 합숙소로 돌아왔는데 그 때부터 일을 해도, 일을 공쳐도 힘이 없었어요.
그런데 한 열흘 후에 어머님이 저를 찾으셔서, 어머니가 편찮으신 줄 알고 찾아가니 어머니의 표정이 밝으셨어요. 시장 사람들이 새벽에 일찍 나와 시장을 청소하는 환경미화원으로 일해 주는 조건으로 입학금을 미리 주겠다고 했다는 것이었어요. 어머님이 믿겨지지 않는지 너무 좋아하시면서 그 말을 몇 번 이나 되풀이하셨어요. 시장 사람들이 현금을 모아 보자기에 싸서 입학금을 줘서 학교에 가서 내고 나니깐 그때서야 실감이 나고 정신이 났어요.
'일정한 주소도 없고, 신원도 조회가 안 되고 계약서도 없는데 시장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나에게 이런 특혜를 줬을까?' 그런데 이태원 시장에서 준비하면서 그 이유를 알게 됐어요.
특집 새롭게하소서 - 제17대 대한민국 대통령 당선인 이명박 장로 편(2부)
그 가난한 재래시장에서 가장 가난한 저희 어머님이 그 곳에서 가장 존경받는 분이셨던 것이죠. 어머니는 바구니에 생선 몇 토막을 놓고 파셨는데, 적은 양이 파니 일찍 다 팔려도 그 뒤의 가게들이 다 팔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가게 앞을 청소하셨어요. 가게 앞을 내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그렇게 전했던 것이었어요.
일요일은 장사하러 안 나가니 상인들이 하루 벌어 하루 사는데 일요일에 왜 안하냐고 물으셨는데 예수 믿어서 교회 간다는 말은 안하고 주일이어서 그렇다고 대답하셨고, 상인들끼리 싸움나면 어머님께 물어보며 어머님의 의견을 존중하고 신뢰 하셨대요. 그런 어머니의 아들이 대학에 합격했는데 돈이 없어 못 간다니깐 어머니의 신용으로 입학금을 주셨던 것이죠. 어머니는 그 시장에서 예수를 믿는다고 떠들지 않았어요. 존경하고 신뢰하는 어머니가 알고 보니 예수를 믿고, 그래서 일요일에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시장 사람들이 알게 하시고 행함으로 믿음을 보여주셨던 것이죠.
저는 야고보서 2장 14-18절 말씀을 믿어요.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겠냐고 성경은 말합니다.
어머니는 시장에서 가장 가난했지만 행동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그의 믿음을 시장사람들에게 보여주셨어요. 그리고 저희 어머니 때문에 대학을 중퇴가 아니라 졸업까지 했어요. 일 잘하니 계속 하라고 해주셨고, 돈이 모자라면 시장사람들이 조금씩 더 보태줘서 4년간 대학을 다니게 됐어요. 새벽 4시에 나가서 일하고 학교에 가도 친구들에겐 제가 새벽에 그렇게 일한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어요. 점심엔 다른 약속이 있다고 나와 버렸어요.
그러나 몸이 병들어 쓰러져도 병원에 갈 돈이 없어서 군대 가서 치료받으려고 자원해서 군대에 갔어요.
군대에 갔더니 죽을병 걸렸는데 무슨 군대냐고 쫓아내서 돌아왔는데, 구청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료 치료하는 입원증을 주며 시립병원에 보내줬어요. 거길 가니 들어갈 때부터 불친절하고 의사들이 무료 환자들에겐 환자취급도 안했어요. 간호사들도 불친절하고 어디가 아픈지 언제 낫는지 알려주지도 않았어요. 속이 상해서 병원을 나와 버리고 그 다음에 가톨릭 병원에 들어갔는데 수녀간호사가 얼마나 친절하게 해주는지 절 좋아하는 줄 알았어요. 알고 보니 모든 사람에게 친절했던 것이었어요. 그때 깨달은 것이 가난한 사람에겐 친절하게만 해도 병이 반은 낫는다는 것이었죠.
제가 서울 시장 된 후 산하 8개 병원의 병원장, 수간호사, 원무과 과장을 소집해서 회의했어요. 평생 시장을 못 봤던 분들이 시장이 소집하니 어리둥절하셨어요. 시립병원은 나랏돈으로 하니 들어오는 수위실부터 원무과 간호사 의사까지 없는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하고, 환자에게 병이 어떻게 언제쯤 치료가 되는지 알게 해주라고 했어요. 그렇게 하면 환자가 50프로 이상 낫을 것이라고 했어요. 지금은 가장 친절한 병원이 서울시립병원이에요.
대학 3학년 2학기 때 학생회장에 출마했어요. 먹고 살기 힘든 청소부가 출마했고 당선됐어요. 야간학교 나와서 대학 간 사람이 나 딱 혼자였는데 처음엔 친구들이 장난인 줄 알았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저랑 같은 3학년이 절 찍은 사람이 없고 1, 2학년 후배들이 절 뽑았대요. 그 형은 뭔가 다르다. 이랬는데 제가 다른 게 있다면 입학할 때 입은 옷을 똑같이 입어 유명했던 것이었죠.
학생회장에 당선될 때가 쿠데타 일어난 정권이 일본에게 몇 푼 받고 수교를 맺어서 학생들이 울분할 때 였어요. 정식적으로 사과도 안 받고 굴욕적인 외교를 한다고 반대했어요. 전국의 학생회장이 모여 정부에 건의하자고 반대시위 했는데 그게 6.3 사태였어요. 너무 크게 해서 도망 다니다 군사재판 받았는데 국가내란선동죄로 징역 5년이 나왔어요. 물론 나중에 민간재판으로 넘어와서 감옥에서 6개월 살다가 집행유예로 나왔지요.
그 당시 학생회장은 감옥 다녀오면 훈장인 줄 알고 정치한다고 했어요. 제가 감옥 가니 어머님이 충격으로 달동네에서 누워계셨어요. 딱 한번 면회 오셨는데 앞에 앉으셔서 절 한참 쳐다보더니 "너 기도하니? 성경 읽니? 공부하니? " 라고 물어보신 뒤 "얘야 내가 널 위해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네가 장차 이 사회를 위해 크게 일할 것이라고 응답받았으니 너는 정직하고 하나님을 잘 공경하며 살아라." 다시는 못 볼 것처럼 그렇게 말씀하고 가셨어요. 기도하니? 성경 읽니? 공부하니? 내가 기도해서 응답받았다. 나 간다.
면회시간이 3분인데 10초도 안 걸렸어요. 보통 어머니들은 "얘야 네가 고생하지? 힘들지? 밥은 제대로 먹니?" 이러면서 할 말도 제대로 못하고 쫓겨나는데 우리 어머니가 그러시니깐 간수가 이런 일을 처음 봤는지 "어머니 시간 더 있어요." 라고 했는데 우리 어머니는 돌아보지도 않으시고 "일 다 끝났어요" 하며 나가셨어요. 간수는 우리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저는 이해했어요. 우리 어머니는 자식을 키우며 수없이 눈물 흘릴 일이 많았지만 자식들 앞에서 눈물 흘리지 않았고 당당했어요. 그러나 우리 자식들은 어머니가 남몰래 눈물 흘리셨단 걸 알았어요. 어머님이 눈물보이기 전에 물어볼 것만 물어보고 나가셨던 것이었죠. 아마 교도소 나가자마자 우셨을 거에요.
감방에 돌아와서 어머니 말씀이 깨달아졌어요.
너 기도하니? 는 기도해라, 성경 읽니? 는 성경 읽어라, 공부하니? 는 공부해라. 그리고 나서 생각을 바꾸었어요. 대학을 졸업하고 정치가 뭐냐? 내가 원하는 월급 받는 직장 가서 나같이 일자리 없는 사람 일자리 만들어주고 우리 부모같이 못사는 사람에게도 일자리 주는 세상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학생운동권 학생이라고 해서, 감옥 다녀왔다고 해서 무슨 정치냐? 이걸 깨닫게 된 거죠. 더 배우고 더 넓은 세상에 나가 배워서 부모와 같이 가난했던 사람들에게 일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내가 할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때부터 기도하고 성경 읽고 공부했어요.
감옥에 나올 때 어머니는 이미 병석에 누워서 일어설 수 없으셨고, 나와서 불과 한 달 보름 만에 돌아가셨어요. 장례를 치를 힘도 없어서 다니던 조그만 교회에서 소개해서 이웃교회를 빌려 임시 매장했어요. 그러고 나서 시험을 쳤는데 나라에서 운동권 학생들에게 일자리를 못주게 했어요. 7-8개월 동안 취업도 못하고 앉아서 내가 정치를 가야 하는가, 시험을 봐야 하는가, 고민하는 그런 상황에서 현대건설주식회사가 조그맣게 광고했어요. 종업원 98명이고 이제 막 크려고 하는 조그만 회사인데 주인이 정주영 회장이었어요.
광고를 보는 순간 '내가 이 회사를 시험치고 다시 투쟁해야지' 그런 생각으로 시험을 치고 합격했어요. 정주영 회장을 처음 만났는데 초등학교밖에 나오고 노동자 생활하다가 대학 나온 사람을 처음 뽑는 면접이었어요. 대학 나온 사람을 면접하니 초등학교 나온 회장님이 쫌 얼떨떨해하셨어요. 묻는 말이 "이군, 합격하면 우리 회사 틀림없이 올 건가?" 이게 면접이었어요. 제가 재빠르게 열심히 하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속으론 '1-2년쯤 여기 있다가 정부에서 나를 풀어주면 더 좋은데 가야지' 라고 생각했어요.
한참 있다 회장님이 하나 더 묻는데 "이군 건설이 뭐라고 생각하나?" 사실 건설회사에 대해 알고 온 게이 아니고 광고 보고 온 거라 생각이 안 나는데 제가 하나님을 믿으니깐 느닷없이 나온 말이 "네 건설은 창조입니다" 생각도 안 해보고 즉석으로 나온 말이었는데 정주영 회장이 그 얘기를 듣고 표정이 밝아지면서 좋아서 어쩔 줄 모르셨어요. 건설은 힘들고 고생스러운 것 인줄 알았는데 신입이 건설은 창조라니깐 좋았던 것이죠.
그 말을 얼마나 좋아하셨는지를 증명 하는 게 뭐냐면 현대 건설이 자동차 생기고 울산조선 생기고 세계기업 되고 대한민국 대표 기업이 되서 연설 다닐 때 꼭 빼놓지 않고 하시는 말이 "여러분, 건설은 창조입니다" 그 때 들었던 이야기가 30년 가까이 지나도 머릿속에 남아있던 것이었어요.
제가 35살 때 사장이 됐는데. 대한민국 기록이었어요. 임시로 들어간 회사였는데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그렇게 원하는 회사였고 중소기업치고 월급도 많이 주고 점심도 주고 계절마다 옷도 주면서 현장 다니면서 입으라고 했어요. 월급이 적더라도 한 달에 월급 받는 일자리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었는데... 임시로 들어간 회사가 얼마나 좋고 감사한지 몰랐어요. 감사한 마음으로 열심히 일하니 피곤한 줄 모르고 일했어요. 계급이 자꾸 올라가서 입사동기가 과장일 때 전 사장이 됐어요. 12년 만의 일이었죠.
온 세계를 다니면서 일하게 되고 세계 기업 만나고 아프리카 유럽 중동으로 다녔어요.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제가 들어갈 때 90여명이었던 회사가 그만둘 땐 16만 8천명이 됐어요. 일자리가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그리고 중동 다녀온 근로자에게 정부에 건의해서 아파트 한 개씩 그냥 계약하도록 만들었어요. 노동자가 집 가지는 것이 제 소원이었기 때문이죠.
제가 서울 시장이 됐을 때 가장 괴로웠던 건 장로가 시장이 됐기에 사람들이 어떻게 볼 것인가? 이었어요. 어머님은 조그만 재래시장에서도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그 자리에서 존경받을 수 있었는데 장로인 나는 더 배우고 더 갖췄는데 어떻게 보여질 수 있을 것인가가 고민됐어요.
청계천 복원, 세계적 교통계획 등..없는 사람들이 버스 한 번 타면 세 번 네 번 탈 수 있고, 지하철 타고 버스탈 수 있도록 계획했어요. 세계적으로 알려져서 모스크바 등에서도 그 계획을 가져갔다.
그렇지만 제가 시장이 돼서 가장 먼저 간 곳은 옛날에 살던 동네였어요. 기사만 데리고 갔는데 시장된 사람이 온다니깐 산비탈에 할아버지 할머니가 나오고 나중에 소식 듣고 구청장 동장이 쫓아왔어요. 옛날 같은 단칸방이 그대로 있고 뒤에 있던 화장실을 앞에 새로 지은 것만 달라져 있었어요. 화장실 뒤에 있는 걸 옮겼냐고 물으니깐 할아버지가 시장이 그걸 어떻게 아냐고 놀라더라구요.
그 단칸방에 열쇠가 채워져 있는데 사람 소리가 나서 따보니 치매노인이 있었어요. 젊은 부부는 이사 온지 얼마 안됐는데 일하러 갔고 방문 걸어놓고 어머니를 두고 간 것이었어요. 밥이 쏟아져있고 할머니가 뒹굴고 있었는데 딱 보는 순간 하나님이 이런 걸 구제하라고 나를 시장시키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시장이 된 후에도 스케줄이 많은데 왜 갑자기 생각나서 여길 와서 치매노인을 발견하게 됐는지...
서울시 전체를 조사하니 매일 저녁 어머님이 죽었으면 좋겠다, 오늘도 살아있네 이런 심정으로 치매 노인을 모시고 있는 노동자 가정들이 1320세대가 나왔어요. 제가 시장이 되자마자 병원과 요양소를 같이 짓기 시작했는데 시장 사임 2달 전에 마지막 150세대를 짓고 옮겨서 1320여명을 최고의 시설에 모시게 됐어요. 만일 제가 청계천으로 유명해진 시장이 됐다고 하더라도 그 일을 못했다면 하나님과의 약속을 안 지켰다는 부담감으로 살았을 것인데 다행히 마지막 분까지 옮기고 갔어요.
서울에 있을 때 어느 교장 선생님이 하는 말이 서울시의 고등학생 중 1년에 5000여명의 학생들이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서 밖으로 나온다고 했어요. 그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라 서울시 고등학교 교장을 전부 모셔다가 각 학교에 형편이 안 좋아서 고등학교 못 다니게 된 학생들을 교장선생님이 이름만 서울시와 구청장에 통보하면 졸업할 때까지 아무도 모르게 비용을 대줘서 졸업을 시키기로 결정했어요. 그래서 서울엔 돈 없어서 고등학교 못가는 학생은 없어요.
교장선생님 이름만 대면 다 대주는데 5000명에서 7000명 정도에요. 제가 중학교밖에 못 나왔을 때 선생님이 야간 고등학교라도 억지로 보내줘서 오늘날 제가 있게 됐는데 그렇게 된 시장이 시민들의 상황을 모른 척 할 수 없었어요. 공무원들이 반대를 하며 법률도 안 되고, 뭐도 안 된다고 했지만 여학생 3-4000명이 길거리에 나와서 할 수 있는게 뭐가 있겠어요? 이건 장학금이 아니라 사회범죄 예방하고 사회 안전망을 구축하는 것이라고 결국 관철했다
첫 장학금이 나가게 됐을 때 숫자가 많아서 8000명 가까이 됐는데, 행정 국장이 3일후에 실내 체육관에 가수 부르고 시장이 장학금 주는 행사를 한다고 보고했어요. 그 보고를 듣고 깜짝 놀랐어요. 이건 주는 사람입장에서 생색내는 행사였어요. 그 행사를 취소하고 편지를 친필로 썼어요. "학생 행사는 취소됐으니 안와도 좋다. 앞으로 주는 장학금은 거저 주는 것이 아니라 빌려주는 것이다. 니가 20-30년 후 형편 되면 후배들에게 돌려주면 좋겠다. 이것이 조건이다." 라고 쓴 뒤 당일 들어가는 속달로 편지를 전부 보냈어요.
저는 왜 그랬을까요? 왜 그 아이들의 심정을 알까요? 극장 앞에서 과일장사하고 리어카 끌고 뻥튀기 장사 했을 때 어른들이 지나가다가 하는 말이 "부모는 뭐하지?"그런 말 들으면 가슴이 철렁해요. 내 부모가 뭐한다고 당당하게 말할 형편 되면 자식이 길에 나오겠어요? 학교 다닐 때 부모직업란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상업이라고 썼어요. 근데 어떤 선생님들은 눈치도 없이 구체적으로 쓰라고 해요. 길가는 어른들은 나에게 이름 학년 물어봤지만 돌아서면 잊어버릴 텐데, 왜 물어봐요? "가난하지만 열심히 공부해 그런 성공할 수 있어" 라며 본인은 나에게 덕담을 해주고 용기를 줬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당사자인 나는 수모와 창피를 당했다고 생각이 들었어요.
오늘날 우리 사회가 봉사하면서 상대방의 심정을 알고 말 한마디 행동 표정을 지어야 해요. 어떤 어른은 와서 하는 말이 "그 앞에 있는 거 다 봉투에 넣어줘" 잔돈 주려면 "나 바뻐, 잔돈 됐으니 ?「? 줘." 그런 어른 만나면 천사 같아요. 장학금 준다고... 특히 여학생 불러 봐요. 그 까짓것 돈 받느니 밖에서 나쁜 짓하고 말겠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어요. 그러니깐 그 아이들의 심정을 봤고 교장선생님이 통보만 하면 그 부모와 아이만 알고 학교를 다닐 수 있도록 만든 것이죠. 이것이 봉사라고 생각했어요.
저희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기도가 많이 이뤄졌어요. 어머님이 기도하신 분들이 예수 믿게 되고 미아리에서 점치고 굿하고 돈 많이 벌던 분들도 예수 믿게 됐어요. 저희 형제들도 전부 장로 권사가 됐어요. 초등학교밖에 못나온 여동생이 서울에 올라와 대학까지 갔는데 여동생을 보면 저는 늘 가슴 아팠어요.
어느 날 제가 현대회장 하고 있을때 생전 전화 안 오던 애가 전화했어요. 졸업식이니깐 오라고 했는데 그때 30대 후반이라 무슨 졸업이냐고 물었더니 신학대학 졸업한다고 했어요. 이제 선교사가 되서 다니는데 개척교회 목사님을 섬기고 있어요. 한 달에 한 번씩 저를 찾아왔는데 제가 바쁘니 밤 12시까지 꾸벅꾸벅 졸며 기다리더라구요. 만나면 동생이 옛날 얘기를 하는데 전 어릴 때 얘기를 하면 기가 죽어요. 제가 기가 죽은 표정이면 동생이 핸드백을 열고 종이를 꺼내며 "오빠 이거 이달에 교회에서 필요한 거야"하면서 놓고 가요. 그거 보고 차에 실어서 교회에 보내주면 한 달 지난 뒤 또 와서 옛날 얘기를 해요.
우리 여동생은 전도사까지 됐고 그 딸은 목사안수까지 받았어요. 부모님 돌아간 뒤 저희 형제들이 추도예배를 하는데 어느 날 점치고 굿하던 사촌형제가 나타나서 자기가 추도예배를 주도하겠다고 했어요. 유명한 점쟁이였는데 알고 보니 목사가 되서 나타난 것이었어요. 사촌형은 이해하겠는데 굿하고 흔들었던 형수가 사모라니깐 믿어지지 않아 계속 쳐다봤어요. 저희 어머님이 기도하던 분들이 다 예수 믿게 되고, 형제들도 늦게나마 공부하고 다 자기자리를 찾게 됐어요.
어머님이 저에게 바라는 바가 있을 것이에요. 제가 돌아다니며 많은 일을 당하지만 하나님께서 당하지 않게 해줄 것이라고 믿고 있어요. 기도안하고 이렇게 될 수 없거든요.
대한민국이 참 어려워요. 서민들은 말이 아니에요. 일자리도 없고 걱정이 태산이고 동족이 남북으로 갈라지고 핵폭탄 만들고, 우리가 신경이 무뎌져서 그렇지 굉장히 불안하고 어려운 상황이에요. 그래도 전 걱정을 덜해요.
어머님이 간절히 기도하던 것들이 이뤄지는 것들을 봐왔기에 대한민국을 위해 기도하는 분들이 얼마나 많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는 것을 하나님이 안 들어주시겠어요? 저는 들어주시리라 확신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미래는 밝을 것이에요. 우리 어머니의 혼자의 기도도 들어주셨던 하나님께서 이 많은 사람이 나라, 북한, 사회를 위하는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저는 이 나라의 미래를 밝게 봅니다.
그래서 우리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고, 기도하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면 좋은 나라가 될 것이라 믿습니다. 저도 기도하겠습니다. 여러분께서 기도를 많이 해주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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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새롭게하소서 - 제17대 대통령 이명박 장로 편] 은 이 당선인이 지난해 4월 29일 전북 전주순복음교회에서 간증한 내용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CBS TV 반태경 PD banpd@cbs.co.kr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에 믿음의 지도자를 택하신거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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