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기부왕` 김장훈과 어머니 김성애 목사의 母傳子傳

2010. 10. 4. 15:34신앙간증

'기부왕' 김장훈과 어머니 김성애 목사의 母傳子傳

 

 


 

 

 

[미션라이프] “예전에 우리 집은 장독대에도 쌀독이 있었어요. 담을 넘는 이웃들을 위한 배려였지요.”

 

나눔도 유전되는 것일까. ‘연예계 기부왕’ 김장훈(43·가수)씨는 어머니 김성애(73) 목사로부터 자선의 유전자를 받았다. 김 목사는 그의 어머니에게서 ‘아낌없이 주라’는 교훈을 배웠다. 그 가르침이 3대를 이어가고 있다.

 

7일 오후 경기도 고양시 대화동 성저공원 맞은편에 있는 십대교회에서 김 목사를 만났다. 쉰이 넘어 신학을 한 김 목사는 칠순을 훌쩍 넘겼지만 목회 열정은 20대 못잖았다. “간증이나 인터뷰 싫어해요. 개인적인 이야기가 떠도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아서죠. 물론, 우리 장훈이도 마찬가지죠. 그러나 ‘목요일에 만나는 이웃’이라는 타이틀이 맘에 들어요. 사생활은 가급적 노출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시원시원하면서도 다정다감했다. 김 목사는 1937년 북한의 평남 진남포에서 태어났다. 그래서인지 평안도 억양이 살짝 묻어났다. 해방 이듬해 가족과 함께 배를 타고 월남했다. 군산과 청주를 거쳐 서울 서교동, 잠실 등에서 살았다. 그는 3남매를 뒀다. 장훈씨가 위로 누나가 둘이다.

 

그는 유년시절 귓속에 딱지가 생길 정도로 단단히 교육받은 내용을 소개했다. “자기만을 위해 먹고 싸고 자는 사람은 버러지나 다를 바 없다. 사람은 생각하면서 살아야 한다. 옆집이 굶고 있는데 우리만 배 채우면 안 된다. 내가 입을 수 없는 옷을 남에게 주지 말고, 내가 먹을 수 없을 정도의 음식도 남에게 줘서는 안 된다. 늘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면서 살아야 한다.”

 

장훈씨의 외할머니는 배고파 동냥을 온 이들에게도 툇마루까지 올라오게 했다. 식은 밥일지라도 상을 차렸다. 장독대 항아리엔 늘 쌀을 채웠다. 역시 딸도 어머니를 닮았다. 김 목사는 젊을 땐 전남 곡성에서 큰 광산을 운영했다. 무역업 등 굵직한 사업도 했었다. 한창 땐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으로부터 법명과 감사패를 받을 정도였다. 무릎이 까질 정도로 3000배를 올리던 열성 신자였다.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잘나갔다. 한데 ‘엄마 말이 곧 법’이었던 아들이 고등학교에 들어갈 무렵부터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다. 김 목사는 음악을 하겠다는 아들의 생각을 묵살해 버렸다.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노래를 불러서 밥을 먹을 수 없다는 것과 기관지 천식이 심해 공부를 못할 정도였는데 노래를 하겠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들은 당돌하게도 어머니의 반대 이유를 수용하지 않았다. 가출을 밥 먹듯 했다. 공부엔 담을 쌓고, 방문은 항상 열려있었다.

 

수십 년 공든 탑도 한 순간이었다. 사업 실패로 50년간 쌓아온 것들이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졌다. 다시 일어선 적이 여러 번이지만 이번은 달랐다. 절에 가는 것도 싫었고 햇빛도 싫었다. 새벽이 될 때까지 잠을 못 이루다 밖이 밝아질 때에야 잠이 들었다. 모든 것이 허망했다. 목숨을 유지하는 것이 의미가 없었다. 그만 세상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도 수천 번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천지개벽의 순간을 맞았다. 서울 잠실주공아파트에 딸들과 함께 살 때였다. 새벽 2시쯤 화장실을 가려고 문을 여는 순간이었다. 둘째 딸이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를 하고 있었다. “우리 엄마, 살려주세요….”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 숨이 턱 멎는 듯 했다. 딸이 눈치 채지 않도록 방문을 살며시 닫고 마음속으로 통곡을 했다. 천사 같은 딸을 두고 세상을 버릴 생각을 한 자신이 한 없이 미웠다. “그래, 딸의 행복을 위해 교회에 나가자.” 그러나 그 생각은 머리 속에서만 맴돌았다.

 

쉰 고개를 넘으면서 인생이 180도로 달라졌다. 마지막 보루라 여겼던 잠실의 작은 아파트마저 내주고 나서도 한동안 염주를 내려놓지 못했다. 문간방 신세로 전락했다. 하지만 행복한 나날이었다. 버겁거나 슬퍼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집 거실에서 새 나오는 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이끌려 가정예배에 동석하게 됐다.

 

그해 어느 주일날 어른이 돼 처음으로 동네 교회에 갔다.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되도록 울고 울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나니, 비록 가난한 처지로 전락했지만 세상은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고 했다.

 

90년대 초반 군에 갔던 아들이 제대했다. 서울 돈암동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는 아들을 보고 마침내 마음을 돌렸다. 아들이 노래하는 것을 허락했다. 대신 교회를 다닐 것과 대학에 들어갈 것을 권했다. 장훈씨는 4∼5개월 정도 공부하더니 마침내 대학에 들어갔다.

 

김 목사는 교회 다닌 지 3년 만에 고양 원당순복음교회 교회학교 교사가 됐다. 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치기 위해 쉰 넷에 신학을 시작했다. 이후 중국에서 5년 동안 내지 선교 활동을 한 후 2001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기적은 한 순간에 찾아왔다. 마치 준비라도 해놓은 것처럼 아들은 엄마의 소원을 들어줬다. “엄마, 교회 세우는데 얼마면 돼요?” 2001년엔 아들이 거금을 내밀었다. 김 목사가 평생 바라던 청소년들을 위한 교회를 세울 수 있게 된 것이다. 청소년들을 위한 ‘십대교회’는 이렇게 탄생했다.

 

십대교회는 말 그대로 청소년이 주인이다. 2006년부터 청소년 도우미 버스 ‘꾸미루미’(꿈 이룸이)를 운행한다. 25인승 버스도 아들이 후원했다. 매주 화, 목요일에 일산 롯데백화점 건너편 미관광장 앞 진입로 한쪽에 대형 텐트를 치고 청소년들에게 쉼터를 제공한다. 휴대전화기도 충전할 수 있다. 직접적인 전도를 하는 게 아니다. 학생들이면 누구나 와서 쉬고 갈 수 있다. 하교시간 허기진 아이들은 컵라면과 과자, 음료수를 먹으면서 맘껏 쉰다. 뭔가 고민거리가 있는 학생은 한 눈에 들어온다. 김 목사는 사랑으로 그 학생의 마음속으로 들어간다. 지난 학기에만 1500여명의 학생들이 꾸미루미를 다녀갔다. 학생들은 김 목사를 ‘때장’(대장)이라 부른다.

 

김 목사는 이제 더 이상 아들 걱정은 하지 않는다. 한 때는 좋은 신부감이 있으니 결혼하지 않겠느냐고 권했다가 무뚝뚝한 대답만 들었다고 했다.

 

“아니, 목사님이 왜 이러시나요. 아들이 장가 안가서, 손자 못 봐서 그러세요?”

“네가 너무 외로울까봐 그래, 갈채가 얼마나 외롭고 쓸쓸한 것인 줄 알잖니?”

“저 외로울 시간이 없어요. 적당히 외롭지 않으면 무대에 못서거든요.”

 

그러나 김 목사는 항상 기도한다. 아들이 알면 좋아하지 않겠지만 ‘훈이에게 딱 맞는 짝을 달라’는 간절한 소망을 잊지 않는다고 했다. 김 목사는 기부를 해 본 사람은 받는 기쁨보다 주는 기쁨이 크다는 것을 안다고 했다. “줄 때 아낌없이 다 줘야지, 빵 한 조각 떼어 주는 것처럼 하면 안 됩니다. 받는 사람이 다 알아요. 그러면 주고도 좋은 소리 못 들어요.”

 

아들도 역시 어머니를 닮았다. 아직도 전세방에서 살면서 수십억 원을 기부하며 절망 끝에선 사람들을 위해 희망의 노래를 부른다. 어머니는 십대교회를 이끌며 아들에게 못해준 사랑을 거리의 청소년에게 쏟고 있다. 김 목사는 꿈이 있는 사람은 늙지 않는다고 했다. 어린이재단처럼 청소년재단을 세우는 것이 그의 꿈이다. 어머니와 아들은 청소년의 꿈을 피워주는 사랑을 말씀과 노래로 퍼뜨리고 있다.

 

국민일보 미션라이프 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 

출처 : 주님을 기다리는 신부들
글쓴이 : 보배로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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