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2. 24. 15:05ㆍ좋은 글, 이야기
십계명의 재해석 ;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호주 시드니에서 온 이 백 열 여덟 번째 편지
십계명에 대한 재해석을 보면서 혹자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십계명과는 조금 다르다고 의아심을 갖는 분들이 있습니다. 물론 십계명에서 계명이 모두 열 개라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습니다. 하지만 십계명을 열 개의 계명으로 분류하는 과정에서는 전통에 따라 조금씩 다릅니다.
유대인 전통에서는 우리가 지금까지 보았던 첫 번째 계명이 두 번 째 계명으로 미뤄지고 그대신 우리가 말하는 서문인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알러 가라사대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는 것을 첫 번째 계명으로 분류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말하는 첫 번째 계명인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는 계명과 함께 두 번째 계명인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을 제 이 계명으로 함께 분류를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 계명인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것은 우리와 사용하는 십계명과 동일 합니다.
반면 가톨릭에서는 유대교 전통처럼 십계명 서론과 함께 우리가 보는 첫 번째 계명을 제 일 계명으로 삼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보고 있는 두 번 째 계명인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계명도 제 일 계명으로 봅니다. 그리고 세 번째 계명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것을 제 이 계명으로 합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하나의 계명의 빠지게 되고 모두 아홉 개의 계명으로만 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분류하는 열 번째 계명을 둘로 나누어 제 구 계명으로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제 십 계명으로 “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로 분류합니다. 가톨릭 뿐만 아니라 루터 교회에서도 가톨릭에서 사용하는 십계명과 동일한 십계명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개신교회와 그리스정교회 전통은 우리가 쓰고 있는 십계명과 비슷합니다. 다만 정교회는 십계명 서론을 첫 번째 계명에 포함시킨다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어쨌든 우리는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를 열 번째 계명으로 봅니다. 그런데 이 계명은 또 다른 문제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를 탐내지 말라고 하는 것은 이미 앞의 계명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일곱 번째 계명인 간음하지 말라는 것은 이웃의 아내를 탐내는 것과 관련이 있고 여덟 번째 계명인 도둑질하지 말라는 것은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열 번째 계명은 앞의 계명들을 한 번 더 강조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앞의 계명인 제 일곱 번째, 여덟 번째 계명은 행위에 관한 것이고 열 번째 계명은 행위의 바탕이 되는 마음에 관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열 번째 계명에서 탐내지 말라는 것을 두 번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는데 탐낸다는 것은 탐심을 말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의 열 번째 계명이자 마지막 계명에서 탐내지 말라는 명령을 거듭해서 말씀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것은 탐내는 것, 즉 탐심에서부터 죄악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 동산에 있는 것 모두를 허락하시면서 단 하나,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만 하와는 뱀의 유혹을 받는 순간 그의 눈에 들어온 그 실과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웠습니다. 하와는 자신의 것이 아닌 것에 대한 탐심이 생겨나게 되었고 결국 그 탐심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게 되었고 결국 그녀의 탐심이 죄악을 불러 오게 되었습니다. 탐심에 대한 죄악성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열 번째 계명을 주시며 탐심에 대해 경계해야 한다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루는 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간청을 합니다. 자신의 형에게 말씀하셔서 아버지의 유업을 나누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그 사람에게 자신은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가 아니라고 말씀하시면서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아버지의 유업을 정당하게 분배하지 않는 이 사람의 형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부탁을 한 사람의 마음 속 깊은 곳까지 살피셨습니다. 억울한 것을 호소하면서 그 자신의 마음 밑 바탕에 깔려 있는 탐심이라는 문제의 뿌리를 보신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고 말씀하시면서 연이어 한 어리석은 부자 농부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한 부자 농부가 밭에 소출이 풍성하자 내가 곡식을 쌓아둘 곳이 없으니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지어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어야 하겠다고 했습니다.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 하자고 합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누구 것이 되겠느냐. 이는 자기를 위하여 부를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탐심이라는 죄악의 정체를 규명하시면서 십계명 중 열 번째 계명을 재해석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열 번째 계명에서 남의 것을 탐내는 것 만이 탐심이 아니라 남이야 먹든 말든, 남이야 죽든 말든 나만 잘살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병적 이기주의인 자기 중심의 욕심도 탐심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자기를 위한 것이 죄악이라고 만은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만을 위한 것은 죄악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자기만을 위한 탐심이 자리 잡을 때 이웃은 자기 눈에 보이지 않으며 심지어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까지 보이지 않게 됩니다. 결국 이 탐심이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내가 자리잡고 마치 자기 자신이 신이 되어 첫 번째 계명을 어기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두 번째 계명에 반하며 자신의 것들이 우상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탐심이 곧 우상숭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3:5)
뿐만 아니라 자기 중심의 탐심에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 대신 교묘하게 자신의 이름을 들이밀며 그것에 기쁨을 누립니다. 하나님의 날들을 거룩하게 지키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날들을 즐기려 합니다. 부모나 어른 공경은 안중에 없고 오직 자신을 위해 더 치중합니다. 자신이 직접 살인하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들의 죽음에 수 많은 원인을 제공하고, 간음과 도적질 그리고 거짓 증거에도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렇게 탐심은 열 가지 모든 계명을 거역하는 단초를 제공하며 아담과 하와에게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게 만듭니다.
십계명은 약 삼 천 오백 년 전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으로 향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오늘 날 이 땅에서 나그네의 삶을 사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서 나아가는 모든 성도들에게 주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이 명령에 순종하면서 저 천국을 향해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나아가는 것입니다.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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