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면을 중요시 하면서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있다면

2013. 5. 10. 11:03좋은 글, 이야기

체면을 중요시 하면서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있다면

 

 

 

 

 

 

 

 

 

 

 

 

 

호주에 처음 왔을 때 호주 사람들에게 말을 걸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언어장벽 때문에 쉽게 접근하여 말을 붙이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용기를 내어 나이가 몇이냐?, 결혼은 했느냐?, 어디에 사느냐?라고 물어 봅니다. 사실 이 정도 영어는 쉽게 할 수 있는 영어이기에 부담 갖지 않고 물어 봅니다. 그러나 상대방은 이러한 질문을 받으면 당황해 하면서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은 표정을 짖습니다. 호주 사회에서는 이러한 질문들을 잘 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질문은 사생활 침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는 그러한 개인적인 질문들을 해도 그것을 이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그 사람과 친해지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하고 개인적인 사소한 것들을 물어 봅니다. 그러나 이 질문 이면에는 체면이라는 내면성이 숨겨져 있습니다. 저 사람이 나와 비슷한 수준인지, 내가 저 사람과 사귀어도 괜찮은지를 머리 속으로 따져 봅니다.

 

   한때 한국에서 강남 사람들은 강북에 산다고 하면 맞선도 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 만은 그 자체만을 생각해 볼 때 내 체면이 있지 어떻게 다른 수준의 사람들과 선을 볼 수 있냐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강남에 산다고 같은 강남이 아니라고 합니다. 강남에서도 어느 지역에 사느냐, 심지어는 같은 아파트라도 몇 평에 사느냐에 따라 달라 진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부모들은 시시콜콜 이런 것들을 따져가

면서 자식들에게 누구 누구와는 놀지 말라고 까지 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지금 한국의 현실입니다.

 

   체면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나라가 한국입니다. 그래서 체면유지비라는 말까지도 나옵니다. 이것은 오랫동안 한국인의 정신을 지배해 온 유교사상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양반은 굶어 죽을지언정 구걸하지 않고, 양반은 냉수 먹고도 이빨을 쑤셔댔던 체면 문화와 일맥상통합니다. 그래서 한국은 유행에 가장 민감합니다. 유행에 뒤쳐진 옷을 입으면 자신의 체면이 말이 아니라고 스스로 생각하며 움츠려 듭니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내가 어렸을 때만해도 한국에서는 부모가 청소를 하면 자식들은 그것들을 숨깁니다. 물론 부모도 그것을 숨기려 합니다. 길거리에서 청소하는 부모를 만나도 자녀들은 모른 체 지나갑니다. 물론 안 그러는 사람도 있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호주에서는 그것들을 숨길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직업의 귀천이 없기 때문입니다.

'

  청소원이나 사장이나 똑 같습니다. 상사라고 해서 부하 직원에게 차 심부름을 시키지 않습니다. 자기가 마시고 싶으면 자기가 갖다 마십니다. 그래도 내가 사장인데 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호주에서는 유행이라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내가 편하게 입으면 되지 굳이 다른 사람을 따라 할 필요가 없습니다.

 

   호주라는 나라는 체면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마 225년 전에 호주에 처음 온 영국인들이 죄수들이어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다같이 죄수로 왔는데 굳이 체면을 차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죄수들은 계급이라는 것 자체에 거부감을 드러냅니다. 그 죄수의 후손들이 현재 호주인들며 그러한 정신 세계가 200년 넘게 호주를 이끌어 왔기 때문에 호주 사람들에게는 모두가 친구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모르는 사람을 만나도 그 자리에서 친구가 됩니다. 격식을 차릴 필요가 없고 또 서로가 그럴 이유도 느끼지 못합니다. 심지어는 지나가는 사람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서로 눈 인사를 건네고 말 한마디를 건넵니다.

 

   한국인 기독교인들도 이러한 체면 의식에 사로 잡혀 살아가고 있지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교회를 오래 다녔는데 내 체면에 장로가 되어야 하고, 권사가 되어야 하고, 집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장로가 안되고, 권사가 안되고, 안수 집사가 안 되면 마음에 상처를 받았다고 교회를 떠나는 경우도 혹 있습니다. 또 내 체면이 있지 교회가 내게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냐고 말하며 교회를 등지는 사람도 혹 있습니다. 그렇게 교회에서 체면을 중시하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들의 자신을 돌아보아야겠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 다윗은 왕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춤을 추었습니다. 다윗은 왕인 자신의 체면을 생각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언약궤가 돌아온다는 기쁨의 감격에 젖어 백성들 앞에서 춤을 추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아내인 사울의 딸인 미갈은 하나님의 법궤를 중요시 여기지도 않았고 또 법궤의 의미도 제대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왕의 체면을 무시한 체 백성들 앞에서 춤을 추고 있는 다윗의 모습을 보고 미갈은 왕이 어떻게 백성들 앞에서 저렇게 주책없이 춤을 추냐고 다윗 왕을 업신여겼습니다.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 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그를 업신여기니라.”(삼하1:16) 이 일로 인해 미갈은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아 죽을 때까지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그에게 자식이 없으니라”(삼하6:23)

 

   다윗 왕처럼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의 체면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전지하신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모르는 목사의 체면이, 지도자의 체면이 뭐 그리 대단합니까? 모든 것을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장로의 체면이, 권사의 체면이, 집사의 체면이 뭐 그리 소중합니까?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해 다 주시며 모든 체면을 내려 놓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 앞에서 우리들이 내세우는 아무 보잘것없는 그 하찮은 체면이 뭐 그리 중요합니까?

 

    사울 왕이 자신이 범죄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내가 죄를 지었지만 백성들과 장로들 앞에서 자신의 체면을 세워 달라고 사무엘에게 요청합니다.(삼상15:30) 그러자 사무엘은 죽는 날까지 사울을 보지 않았고 하나님께서는 사울로 이스라엘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였습니다.(삼상15:35) 그까짓 왕의 체면이 뭐라고.

 

  교회 안에서도 한국적인 사고로 체면을 중요시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주님께서 그들을 향해 그래도 내가 하나님의 아들인데 내 체면이 있지 내가 어떻게 인간인 너희들, 그것도 죄인인 너희를 상대할 수 있느냐고 말씀하시면서 등을 돌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김해찬 / 시드니하나교회목사)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