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5. 29. 18:49ㆍ좋은 글, 이야기
오병이어 사건은 지금도 일어나야만 한다.
오병이어 사건은 마태 14:17~21, 마가 6:38~44, 누가 9:12~17, 요한 6:9~13 사복음서에 모두 다 언급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마치 전설 따라 삼천리처럼 설화에 가까운 기적의 묘사는 들으면 들을수록 신기하다. 오늘날 기독교 안에서 이것을 믿을 수 있는 비슷한 사건이 일어나고 있을까? 하는 의문마저 들 때도 있다.
오병이어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세례 요한의 머리가 잘려나간 사건이 있다. 서로 간에 비슷하거나 아니면 어떤 연계성을 가질 수 있는 내용은 전혀 없다. 그런데 왜 이렇게 배치가 되었는지 그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 세례 요한의 머리가 잘려나가듯 사람 속에 거해서는 안 되는 혼돈과 공허와 무지를 담은 머리를 잘라내야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오병이어의 사건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옆집에 불난 것을 구경하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아무리 그럴싸하게 설명해도 그와 흡사한 사건이 실제로 일어나도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미 마음속에 혼돈과 공허와 무지 세 가지 요소가 가득 차 있는 상태에서는 성경에 어떤 사건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아멘이라고 발설을 해도 믿었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죽음이란 육체적인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육의 속성이 깨어지는 것이며 부활의 그리스도로 새 옷을 입는 순간을 의미한다. 창 1:2에 나오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무저갱의 속성을 깨뜨리고 죽어야 하나님의 생명으로 부활되어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옛 사람의 머리가 잘려나가고 새 사람의 머리로 교환되어져야 한다. 이것이 저녁이 되는 사건이며 십일조를 바치는 사건이다.
세례 요한의 머리가 잘려나간 것처럼 아무 것도 없는 상태가 되어야만 오병이어의 사건을 접할 수 있는 것이다. 오병이어 사건을 일으키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빈들로 가신 것은 육의 속성인 혼돈과 공허와 무지를 담은 무저갱의 마음 땅에 폐허가 되도록 황폐된 땅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머리가 부활되어 일어서는 곳을 향하여 들어가셨다는 뜻이다.
좀 더 표현하지면 무저갱의 속성인 혼돈과 공허와 무지를 죽이기 위하신 사건이며 장면이다. 죽음은 목숨이 죽는 죽음의 개념으로만 성경을 보게 된다면 말씀의 육신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현재 삶 속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충하게 다스려질 수도 없다.
결국에 목숨이 죽는 죽음으로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만 기대하면 육적인 이스라엘 백성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 내면에 숨겨진 짐승의 속성을 죽이는 작업을 하기 위해서 광야 40년을 방황하게 만드신 것이다. 세례 요한처럼 목이 잘려나가지 않으면 오병이어의 기적은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좇아간지라.”는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하나로 결합하여 삶 속에서 배우고 적용하며 익히고 실천하고자 좇는 무리를 의미하고 있다. 육신의 상태로 이해하는 자는 귀가 열려도 듣지 못한다. 들을 귀가 있는 존재는 말씀을 실천하는 존재로 말씀을 실천하는 자만이 눈과 귀가 열려 있으며 생명의 말을 전하는 입이 열려 터지게 되어 있다.
육신의 배가 고파서 빵을 얻으려고 좇았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배우고 삶 속에 적용하고 익히며 실천하지 못해 갈급해 있는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 말씀을 배우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말씀을 통과하여 걸어가면서 육의 속성을 죽이고 하늘의 생명으로 채워져서 부활의 생명으로 구원을 이루게 하심이 목적이다.
말씀을 지식으로 갖고 있는 바리새인 서기관 사두개인들은 생명의 말씀을 통과할 수도 없으며 육의 속성을 죽일 수도 없는 상태로 되어 있기에 구원받을 수 없다. 이들은 그리스도 예수의 생명이 없으며 부족한 자들로서 문둥병자, 중풍병자, 혈루증 앓는 여인, 벙어리, 소경, 절름발이들이다.
여러 고을은 말씀을 실천하는 장소로서 성령의 열매를 삶의 현장에서 적용하며 사역하는 곳이다. 자신들의 내면의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부끄러움을 보는 곳으로 말씀을 적용해가며 깨달은 것부터 예수님의 발자취를 좇아서 적용하고 익히며 걸어갔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게 좁은 길이며 좁은 문이다.
여기서 병든 자들은 예수의 생명을 익히지 못한 존재를 의미하는데 내면의 병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말씀을 배우고 기름부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와 함께 이루어지는 과정을 올바르게 익히고 적용해서 삶 속에서 실현하지 못함으로 예수의 생명이 이루어지지 아니한 존재를 의미한다.
이러한 존재들이 간음하기 쉬운데 간음이란 상태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바꾸는 행위를 의미한다. 육적인 간음도 원래 정상적인 성행위를 하지 않고 비정상적인 행위를 함에 따라 간음이란 상황이 이뤄지는 것처럼 하나님의 원칙과 진리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면 간음을 한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 많은 무리들이 따라간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결합해서 좇아가야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익히지 못한 상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어 갈급해하는 무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간 시점이 저녁이 된 상태인데 기프노트 에레브는 단어로 ‘교환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사람의 마음 바탕에 본래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혼돈과 공허와 무지는 점점 소멸되어 가고 생명의 빛으로 교환되어 바꾸는 과정이다.
즉 비진리가 진리로 교환되는 시점이 바로 저녁이 되는 것이다. 창세기에 천지창조를 하면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었다는 의미가 바로 이런 뜻을 갖고 있다. 24시간의 변화가 아니다. 그런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창세기 기록목적이 아닌 것이다. 진리가 깨닫게 되면 침묵의 상태가 되어 있다가 선포하고 사역하는 상태인 아침이 되는 것이다.
사람이 인식하고 분별해나가는 과정을 통과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하고 익히는 고난의 훈련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과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대답으로 받아야 하며 삶 속에서 주의 얼굴을 적용하고 익혀서 주님의 얼굴로 바꾸어서 대답으로 내놓는 것이 예배의 본질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얼굴을 익히는 것은 생명의 빛으로 익히는 것으로 너희는 세상의 빛이 되라는 것은 반사적인 의미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된 상태에서 빛을 발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혼돈과 공허와 무지가 깨뜨려져서 생명의 빛으로 교환되어졌다는 뜻이다. 말씀을 접하면서 우리가 교환되어져야 할 부분이 너무나 많다.
왜 도시가 되면 안 되고 빈들이 되어야 하는가? 도시는 이미 질서가 잡혀서 자리를 잡을 수없는 곳이다. 빈들은 자신의 내면에 거하면 안 될 혼돈과 공허와 무지인 육의 속성을 사막과 같이 황폐시켜 생명을 부활시키는 장소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서 자신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무저갱의 3요소(혼돈과 공허와 무지)를 깨뜨려 나가는 시점을‘때’라고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과하지 않으면 사람을 말씀을 익히고 적용하는 시기도 없으며 생명으로 채워지는 날도 없게 된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 성령님께서 사람의 내면에서 일하고 계시는 시기를 날이라고 의미하고 있다. 따라서 때가 저물었다는 뜻은 하나님의 말씀이 삶 속에 적용되어 진행되어가는 상태를 의미한다.
요단강가로 몰려든 것은 사람의 내면에 교만으로 자리 잡고 있는 무저갱의 3요소(혼돈, 공허, 주미)는 점점 내려가고 그 반대로 영혼이 점점 상승되는 상태를 갖고 있다. 광야를 지나서 요단강을 건너가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요단강을 건너간다는 의미보다 내려가고 또 내려가는 차원으로 여겨야 한다.
마을에 들어가 사먹게 하소서라는 의미는‘마을’(카파르)은 말씀과 성령으로 인한 열매를 적용하며 사역하는 장소,‘먹을 것’을(오켈)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익히며 적용하는 양식, 사먹게 하소서(카나)는 하나님의 지혜의 지식을 사서 생명으로 올바르게 세워지게 하여 달라는 뜻이다.
오병이어 사건이 있기 전 무리들은 얼마나 배가 고팠을까? 원치도 않는 금식을 했다. 생명의 양식을 얻기 위하여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인 양식을 금하고 깨뜨려 소멸시키는 것이 진정한 금식이다. 좇는 무리들에게 배운 것을 익히고 적용하는 양식을 사서 생명으로 올바르게 세워지게 하기 위하여 열매를 적용하는 사역을 할 수 있게 하여 달라는 요청이며 간구다.
예수님께서“갈 것이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는 말씀은 아칼은 먹는다. 불사르다, 소멸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주님과 함께 통과해 걸어가면서 사람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혼돈과 공허와 무지인 무저갱의 속성들을 깨뜨리고 불태워 마치 음식이 우리 몸속에서 열량으로 태워지는 것처럼 소멸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 보리떡 다섯 개는 생명의 사역을 익혀서 영혼의 열매를 맺고 많아지고 충만해지도록 살이 찌게 된 떡을 의미한다. 물고기 두 마리는 물고기는 물(水)에 거(去)하는 존재로 진리의 법(法)대로 사는 존재를 의미한다. 그래서 양반 집이나 불교사찰 처마 밑에 물고기를 달아맨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오라는 것은 나에게 이루어진 것을 가져오라는 것이다. 한낱 동화 같은 얘기가 아니라 나에게 반드시 적용해야 되는 말씀이다. 나에게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주님 앞에 가져갈 수 없다. 십일조나 헌금마저도 나에게 이루어진 것을 내놓는 것이 십일조며 헌금인 것이다.
다 배불리 먹었다는 말씀은 먹고 열매를 맺어 많아져서 충만해야 영혼이 살찌게 된 상태를 뜻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로 준비되어 진 것이 남은 조각이며 열두 광주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로 완전히 바꾸어지도록 머리를 반복하여 향해 나감으로 육의 속성을 담은 머리가 잘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머리로 완전히 정착되었다는 뜻이다.
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 명이라는 의미는 생명의 머리로 입을 열지 못하는 자들을 여자와 어린 아이로 지칭하며 장정이 오천 명이란 뜻은 생명의 머리로 입을 여는 자들을 의미한다. 교인들이 수천 명이 모여 있지만 그리스도의 생명을 입으로 열지 못하면 꿀 먹은 벙어리들만 모인 것이다. 죄송하지만 자랑하지 말라. 아무 쓸모 짝이 없다.
장황하게 설명을 늘어놨지만 오병이어는 예수님 당시에만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들에게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사건이며 일어나야만 되는 중요한 사역이다. 하나님의 법인 말씀을 기름 부으심으로 배우게 하시고 그 배운 말씀을 삶 속에서 적용하고 익혀나감으로 그 말씀과 하나로 결합된 인격이 이루어지게 하시고 사람의 얼굴이 그리스도 예수의 얼굴로 바꾸어지게 하시는 사건이 오병이어의 사건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의 삶 속에서 반드시 일어나야 하며 계속 일어나야 하는 사건이다. 오늘도 주님과 함께 연합하여 말씀을 적용하며 익히며 열매 맺어 나가야 하는 과정인 오병이어 사건을 일어나기를 염원하면서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좋은 글,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0) | 2013.05.30 |
|---|---|
| 속도에 묻힌 삶의 가치 (0) | 2013.05.29 |
| 예수쟁이로 산다는것은 (0) | 2013.05.29 |
| 사무엘의 양심 선언 (0) | 2013.05.28 |
| 응답 받기를 원하는가? 믿음으로 구하라 (0) | 2013.05.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