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 교회 김삼환 목사 머슴 목회 25년

2005. 9. 20. 20:59신앙간증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 ⓒ명성교회
적막감마저 감도는 시골교회의 새벽. 한 소년은 마을에 새벽기도를 알리는 종을 치고 교회 귀퉁이에 앉는다. 소년의 간절히 기도가 이어진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제 소원은 주님 사랑하는 거예요. 주님 사랑하고 살게 해주세요. 제 소원은 그것 밖에 없습니다”

새벽녘에 그토록 주님의 사랑을 갈망하던 영성의 열매였을까. 눈물어린 기도를 드렸던 소년은 어느덧 60의 나이가 됐고 한국교회와 전세계 교회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부흥된 새벽을 자랑하는 교회를 성공적으로 이끌게 된다.

어린시절 새벽 종지기 역할을 자청해 봉사하고 날마다 기도했던 그가 바로 지금 ‘한국의 새벽을 깨우는 교회’ 명성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김삼환 목사(60)다.

명성교회는 1980년 7월6일 명일동에서 34평 되는 상가건물 전세방을 얻어 창립예배를 드리게 된다. 창립예배에는 20명이 모였는데 모두 교회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나는 교인들이 대부분이었다. 당시 목회자들이 도심선교를 위해 중짐지를 선택할 때 김삼환 목사는 소외된 자를 돌보기로 마음먹고 버스종점인 명일동을 개척했던 것이다.

그러나 종점이었던 땅 주변에는 아파트 단지가 하나둘씩 들어서고 25년이 흐른 지금 명성교회는 주일예배에 총 4만5천명이 참석하는 대형교회로 성장했다. 현재 등록교인만도 7만명을 웃돈다.

명성교회는 지난 3일과 5일 교회창립 25주년을 맞아 감사예배와 창립기념음악회를 개최하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다. 감사예배가 열린 3일에는 특별히 주일낮예배 설교자로 조성기 목사(총회 사무총장), 이상현 목사(프린스턴신대교수), 윌리암 폴 로빈슨 목사(Whitworth대학 총장), 윤승구 목사(맥코믹신대교수), 김병철 목사(뉴브룬스윅 신대교수)를 초빙했다. 주일 저녁예배로 드린 창립 감사예배에는 평소 김삼환 목사와 절친한 한완석 목사(광주제일교회 원로목사)를 설교자로 모셨다.

명성교회의 성장은 여타 한국의 대형교회들과 같이 목회자의 카리스마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지금도 많은 교회성장학자들은 명성교회의 부흥원인을 연구하고 있다. 물론 아파트단지가 들어서는 황금땅에 우연히 닻을 내린 것도 한 요인이었겠으나 단지 터를 잘 잡았다고 수만 명이 모일리는 만무하다. 명성교회 이외에도 명일동 아파트단지 주변에는 많은 교회들이 자리잡고 있다.

교회성장학자들이 명성교회 성장의 가장 핵심적인 요인으로 구별된 새벽기도회와 담임목회자의 머슴목회론을 꼽는다. ‘새벽기도’를 통해 거룩함을 체험해야 한다는 김삼환 목사의 목회철학과 김삼환 목사를 비롯한 교역자들의 섬김의 철학이 명성교회의 발전을 이루는 두 축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명성교회의 성장은 새벽기도의 부흥과 함께 발걸음을 해왔다. 특히 25주년을 앞두고 열린 새벽기도회에는 하루 참석자 수 4만2천명이라는 전무한 기록을 남겼다. 주일예배 참석자수가 4만5천명인 것을 감안하면 집과의 거리문제 등 피치 못할 사정들을 제외하고 교인 100% 출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명성교회가 ‘새벽’을 강조하는 데에는 김삼환 목사의 깊은 신앙적 체험이 깔려있다. 김삼환 목사는 본인 스스로 새벽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영접하고 신앙이 깊어졌음을 고백하고 있다. 김삼환 목사는 설교마다 새벽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과거를 회상한다.

“일찍이 새벽기도 나가서 종치고 울고 기도했어요. 주님 나를 불쌍하게 여겨 달라고요. 기도했는데 주님이 저를 만나 주신 거예요. 기독교는 새벽의 종교예요. 새벽에 나오면 반드시 주님을 만나요. 네 소원이 뭐냐 물으시기에 네 저는요. 주님 사랑하는 거예요. 주님 사랑하고 살게 해주세요”

세계도 놀란 새벽기도회 성장

▲김삼환 목사가 시골교회에서 종지기때 쳤던 종을 명성교회 예배당에서 다시 치고 있다. 명성교회의 새벽기도는 김삼환 목사의 이같은 삶의 체험이 바탕이 되었다. ⓒ 명성교회
명성교회가 1980년 7월 개척 이후 25년이라는 기간 동안 이토록 성장한 것은 새벽기도의 힘이라 할 수 있다. 명성교회에는 매일 새벽 5000여명의 성도들이 성전에 나와 교회와 가정 그리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간구한다.

특히 3월과 9월 특별새벽집회는 명성교회 뿐만 아니라 서울과 나라 안팎을 깨우는 새벽기도 모임이 됐다. 1980년 교회 창립 직후 첫 9월 특별새벽집회에 20명이 참석한 것을 시작으로 매년 출석교인이 갑절씩 늘어 1988년에는 출석 교인 5000명을 돌파했다.

이후 계속된 성장으로 새벽기도회도 몇 부로 나눠 진행하는데 1992년 3월 특별새벽집회는 4부로 열렸으며 1995년 9월 특별새벽집회는 5부 진행됨과 동시에 처음으로 하루 2만여명 이상이 참석하는 기록을 세웠다. 2002년 3월 특별새벽집회에는 매일 2만5천~2만5천명이 모여 대성황을 이뤘다.

새벽기도 부흥의 놀라운 역사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2004년 9월 특별새벽집회때는 하루 4만명 참석했고 이러한 첫날의 은혜는 마지막 토요일에까지 이어져 특별히 마지막 날에는 잠실실내체육관에 온 성도들이 한 자리에 모여 나라와 민족을 위해 새벽을 깨우며 기도했다. 가장 최근 집회인 2005년 3월 집회에서는 최고 하루 4만2천명이 모였다.

목동, 과천, 의정부, 상계동, 일산에 사는 성도들은 편의를 위해 1995년에는 목동, 상계동, 일산에, 1997년에는 분당에 명성기도실을 마련해 특별새벽집회와 새벽기도회를 드리고 있다. 또 1995년 11월부터는 이 기도실에 주일낮예배(목동, 일산), 주일 찬양예배, 삼일기도회의 예배 실황이 위성으로 중계되어 동시에 예배를 드리고 있다.

이같은 명성교회의 새벽기도 부흥은 이미 해외교회에 널리 알려져 2000년부터 뉴욕, 중국, 말레이시아, 대만, 싱가포르 등의 현지 목회자들이 새벽기도를 배우기 위해 단체로 참석하고 있다.

명성교회의 이러한 새벽기도 부흥과 함께 교회성장도 나날이 기록을 거듭했다. 교회를 세운지 3년 만인 1983년 출석교인이 1500명으로 늘었고 이 때 처음으로 연건평 627평의 교회를 완공했다. 4년 후인 1987년에는 교인 수가 4500명으로 늘어 다시 교회를 신축, 2년 뒤인 89년에 연건평 2684평에 지하 2층 지상 6층, 교회 본당 좌석수 4000석의 지금의 건물을 완공했다.

“목회자는 종일 뿐”...25년간 머슴목회 한길만

▲명성교회 예배당 입구 옆에 세워져 있는 돌비에는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라고 새겨져 있다. ⓒ 김대원 기자
김삼환 목사는 외모나 행동에서나 카리스마를 찾을 수 없다. 그렇다고 말로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는 어휘의 마술사나 불치병을 고치는 큰 능력과도 거리가 멀다. 그러나 김삼환 목사는 약한 듯하면서도 사람을 끄는 강함이 있다. 온화한 표정은 늘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고 목소리는 부드럽다. 명성교회 교인들은 이를 ‘머슴목회의 힘’이라고 입을 모은다.

김삼환 목사는 교인들 앞에서 권위주의를 내세우지 않는다. 부목사를 비롯한 당회 회의에서 늘 강조하는 것도 “목사는 하나님의 종일 뿐”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모습이 카리스마 목회자들이 교인들로부터 일방적으로 ‘추앙’(?)받을 때 교인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비결이라고 교인들은 전한다.

김삼환 목사의 머슴목회는 고난을 삶으로 체험하며 이미 뼈 속에 깊이 박혔다. 대형교회 목회자면 으레 교인들로부터의 존경으로 고급 아파트나 고급 승용차를 대접받기도 한다. 그러나 김삼환 목사는 농촌 목회자가 도움을 요청할 경우, 아파트 평수를 줄여 거처를 몇 차례나 옮겨 다니면서까지 농어촌교회를 도왔다.

또 국내외 부흥회에서 받는 사례금으로는 주변의 어려운 교회를 돕거나 헌금한다. 초기 교회가 성장할 무렵, 김삼환 목사는 폐결핵으로 하루하루가 최후의 만찬과 같았던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김삼환 목사는 섬김의 목회를 포기하지 않고 그 명맥을 이어나갔다.

명성교회가 한해 선교비 40% 원칙을 철저히 고수해나가고 있는 이유는 이같은 김삼환 목사의 머슴목회 철학과도 일맥상통한다. 대형교회는 교회 유지보수에도 상당한 비용이 든다. 서울의 한 대형교회가 1년 예산 중 90%를 자체적인 관리를 위해 사용하는 예는 명성교회의 섬김목회의 가치를 더욱 강조해 준다.

명성교회에서 1년간 선교비로 지출되는 금액은 90억원을 넘는데 명성교회는 현재 831개 농어촌교회를 지원하고 있으며 45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다. 이밖에 봉사선교 45개 기관, 학원선교 9개 기관, 병원선교 11개 기관, 교정선교 7개 기관, 장애인선교 55개 기관에 관여하고 2000년 부활절에 시작한 디아스포라 미션은 2005년 현재 6개 언어로 (중국, 필리핀, 태국, 인도네시아, 러시아,몽골) 약 350여 명이 매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다.

1909년 미국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가 세운 안동성소병원 인수건은 섬김의 목회를 위한 명성교회의 집념이 드러난 사례다. 1994년 모든 목회자들이 병원 매각에 찬성할 때 김삼환 목사 혼자만 반대했던 것이다. 명성교회 창립 25주년 감사예배에 참석한 한완석 목사는 당시를 회상하며 김삼환 목사를 ‘바보 목사’라고 비판(?)했다.

“안동에서 예배 드릴때 내가 여기 바보 하나 앉아 있다고 했다. 어떤 바보냐. 김삼환 바보다. 영남 사람들이 총 동원해서 안동성소병원을 매각하려는데 서울에 있는 명성교회 하나가 그 110억이나 되는 부채를 안으면서 그것을 살려달라고 하더라”

안동성소병원은 신부전증 환자들에게 평생 혈액투석 치료를 무료로 해주고 있다. 해외에서 들어온 병원들이 문을 닫을 때에도 안동성소병원은 지금도 환자가 끊이지 않고 있으니 이는 김삼환 목사의 신앙심에서 비롯된 '선견지명'이라 할 수 있다.

김삼환 목사의 머슴목회는 그의 출생과 자란 환경과도 무관하지 않다. 김삼환 목사는 경북 영양의 유교집안에서 1남8녀 중 막내로 태어나 부친의 극심한 기독교 반대에도 모친을 통해 신앙을 알게 됐다. 17살에 시골교회 종지기를 자원하면서 새벽기도가 곧 삶의 기본이 됐고 이후 지방 고등학교와 경서신학교를 졸업하고 흥구교회, 월전교회, 풍북교회, 해양교회 등의 지방교회를 개척한다.

김삼환 목사는 이같은 지방목회 경험을 바탕으로 서울의 대형교회들은 농어촌교회를 섬겨야 한다는 목회철학을 갖게 된 것이다. 한완석 목사는 감사예배에서 명성교회 성장의 또 다른 원인을 분석했다. 바로 농어촌교회 돕기와 같은 ‘어려움 가운데 나눔’이 교회성장의 축복으로 이어졌다는 해석이다.

“남의 셋방에서 20여명이 창립예배를 드렸던 곳이 한달도 못되어서 자리가 다 찼다. 이것은 정상적인 교회성장이 아니다. 이 교회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키운 것을 감사해야 한다. 그런데 어떤 능력이냐 나눔의 능력이다. 명성교회는 창립 5년이 지난 후에 교회사정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농촌교회를 도왔다. ‘주는 자가 복이 있다’는 진리를 실천했던 것이다. 명성교회는 어려운 가운데서 어려운 교회를 도와서 성장했다”
크리스천투데이  김대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