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웨슬레의 구원 간증
2005. 11. 24. 12:17ㆍ신앙간증
영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인물의 한 사람으로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를 들 수 있다.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거듭난 날에 대해서 얘기했는데, 자신의 생의 결정적인 전환점이 된 그 날의 시간과 분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은 1738년 5월 24일 저녁 8시 45분의 일이었다. 요한 웨슬레는 증조부로부터 3대째 목사를 이어온 집안에서 모태 교인으로 태어났다. 요한은 열 아홉 남매 중 열 다섯 번째 아이였다. 그가 하나님의 손길을 처음 느꼈던 것은 아직 어렸던 6세때로, 집에 불이 났는데 마지막 순간에 간신히 구출 받았던 때이다.
훗날에 그는 가끔 자기를 가리켜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스가랴3;2)와 같다고 말하곤 했다. 웨슬레는 소년 시절에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모든 계명만 잘 지키면 구원받는 줄 알았고, 또 그렇게 가르침을 받았다. 청년이 되어서도 그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했다. 그가 자기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한 것은 남보다 경건하고 모범적인 신앙 생활을 했고, 온갖 선행에 힘썼기 때문이었다.
"난 매일 한두 시간씩 꼭꼭 성경을 읽고 기도하기를 힘써 지켰고, 매주 성찬식에 참석하였다. 말에나 행실에나 단 한 번도 실수가 있을까 하여 언제나 조심하였다. 그러나 웨슬레가 구원의 근거로 열거한 조목 가운데 과연 그리스도가 언급되어 있는가? 모든 것이 자신의 경건, 자신의 노력, 자신의 기도와 성결뿐이었다.
나이가 들자 웨슬레는 교역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명문 옥스퍼드 대학에 들어갔다. 거기서 신학도가 되었고, 여전히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했다. "난 옥 중에 있는 죄수들을 찾아보았고, 빈민굴에 가서 가난한 사람과 병든 사람을 돌봐 주었고, 최선을 다했다. 또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부지런히 자신을 경계했다."
몇 년 뒤 웨슬레는 병들어 죽음의 문턱에까지 다다른 적이 있었다. 그런 온갖 선행에도 불구하고, 죽음이 그 앞에 서 있었다. 그런데 웨슬레의 마음은 평안이 없었다. 이대로 죽으면 하나님이 자기를 받아주시질 않을 것 같았다. 도저히 확신이 없었다. 안심하고 소망을 걸어볼 데라곤 어디도 없었다.
마침내 웨슬레는 옥스퍼드 대학의 전과정을 수료하고 성직자로 임명되었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의심을 없애기 위해 더욱 경건한 생활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대학의 추천으로 아메리카로 향했다. 대서양을 건너는 그 지루한 항해 중에도 종교 생활을 방심하지 않았다.
4시부터 5시까지 명상과 기도
5시부터 7시까지 성경 연구
8시부터 9시까지 기도회
9시부터 12시까지 성경 연구
12시부터 1시까지 간증 시간
2시부터 4시까지 전도
4시부터 5시까지 저녁 기도회
5시부터 6시까지 명상과 기도
6시부터 7시까지 성경 연구
7시부터 8시까지 저녁 예배
8시부터 9시까지 설교
매 시간을 오직 자기의 신념에 충실하게 생활하려 한 것이다. 그는 전도를 하고 세례를 주고, 성찬식을 베풀었다 그는 참으로 신심이 두터운 종교가였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죄사함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거기서 오는 기쁨과 평강이 없었다. 그에게 있어서 종교는 하나의 무거운 짐이었다.
항해 도중 그들의 탄 배는 무서운 폭풍우를 만났다. 웨슬레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부인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같은 배에 탄 25명의 모라비아 교인들은 한 사람도 두려워 하는 기색이 없었다. 웨슬레는 그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7시에 모라비아교의 집회에 참석했다. 그들의 생활 속엔 깊은 경건이 스며 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들의 겸손은 배에 탄 다른 사람들을 솔선수범해서 돌보고 있었다. 어쩌면 그렇게 아무 보수 없이 남을 돌보고 있나요?하고 물으면, 사랑하시는 주님은 그들을 위해서 더한 일도 하셨는데요. 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온유했다. 그들의 입에서는 불만 불평이 나오질 않았다.
돛이 산산 조각이 나고, 배엔 모두 물바다가 되었다. 아수라장인 가운데 그들은 조용히 찬송을 부르고 있었다. 그는 그들 중 한사람을 붙들고 물었다. "무섭지 않습니까?" "참말 하나님께 감사한 일이죠, 무섭지 않습니다". 웨슬레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자신과는 너무나 먼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이었다. 이때서야, 비로소 구원을 받고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무리와 처음 접하게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가운데 미국에 도착해서 구원받은 그 무리인 선교사 아우구스트 슈팡겐베르크 목사를 알게 되었다. 웨슬레는 그 선교사에게 여러 가지들을 묻고 싶었다. 그 선교사는 조용히 웨슬레에게 말했다. "당신은 자신에 대해서 알고 있나요? 당신 속에 그 증거가 있나요? 하나님의 영이 당신의 영과 더불어 하나님의 자녀인 증거가 있나요?(로마서 8장 16절)
웨슬레는 예상치 못한 그의 질문에 매우 당황했다. 그런 모습을 보고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십니까? 웨슬레는 궁리 끝에 "나는 그분이 세상에 구주이신 줄 알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야 그렇죠. 그러나 그분이 당신을 이미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소?" 웨슬레는 "나는 그가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돌아가셨기를 바랍니다. 라고 말했다. 그 후 슈팡겐베르크는 "당신은 자기 자신은 알고 있소?" 라는 말 한 마디만 덧붙이고 대화를 끝내 버렸다. 그때 웨슬레는 잘 알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을 했지만 그 대답이 확신이 없는 것이어서 내심 불안했다.
웨슬레는 2년동안 자기의 선교 임무를 성실이 수행하려 했으나, 그의 뜻대로 되질 않았다. 미국 선교 여행은 그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그의 일기장에도 기록된 것처럼 자기 영혼의 구원의 필요성에 대해서 절실히 깨달았던 것이다.
"인디안들을 건지기 위해 나는 미국으로 왔다. 아~~그러나 나는 누가 건질까. 이 믿지 않는 마음에서 나를 건져 줄자가 누구냐!! 나의 종교는 한 여름날의 종교다, 내 생명을 위협하는 것만 없으면 나는 자신이 있고 거칠게 없다. 그러나 죽음이 나의 면전에 나타나 내 심령에 풍파가 이는구나! 나 자신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그들이 철학을 공부했는가? 나도 했다. 그들이 신학을 아는가? 나는 여러 해 연구했다. "그들이 영적인 것을 유창하게 말할 수 있는가? 나도 그리 할 수 있다.
보라! 난 내 소유의 전체를 바쳐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다, 또 먹였다. 넘치게 수고하고 고난도 달게 받았다. 난 나의 부귀와 명예를 버리고, 안락과 명성을 버리고, 내 생명을 걸고 더위에 그을리고 피곤에 지쳤으며, 힘이 들었지만 하나님이 주신 일이라 생각하고 기쁨으로 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가? 하나님 보시기에 내가 과연 자녀인가? 또 의로운가? 앞으로도 내가 계속 이 마음을 끌고 갈 수 있는가? 과거는 그렇다 치고, 지금도 그렇다 치고 미래를 내가 책임 질 수 있는가? 결코 아니다! 나에게는 그리스도의 공로가 나의 죄를 사하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어 있질 않다. 하나님에 대해 신뢰가 없다."
이런 고백 속에는 그가 얼마나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는지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영국에 도착한 그는 바로 구원 받은 목사를 만나게 되었다. 페터 뵐러라는 이름의 목사였다. 그와 내적인 문제를 주고 받은 결과, 웨슬레는 자기에게 구원 받은 믿음이 전혀 없음을 고백했다.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를 마침내 시인한 것이다.
결국 목사도 아니요, 선교사도 아니요, 그리스도인도 아니요, 다만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은 한 죄인의 위치로 되돌아 온 것이다. 얼마나 간절히 믿음을 추구해 왔던가! 그러나 자기가 죄인인 것을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구원 얻는 믿음에 대해서 납득이 가지 않았다. 이젠 다시 설교하지 말아야겠다. 자기 자신도 분명히 모르면서 어떻게 남을 가르칠 수 있겠는가? 그 후 웨슬레는 율법적인 행위는 그만두었지만, 그의 불안은 더욱 더 깊어져만 갔다.
그때 하나님은 페터 뵐러를 통해서 편지를 보내주셨다. "나는 진정으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자주 당신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창세 전부터 주신 연민의 정이 이미 십자가에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야말로 당신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사랑하십니다. 그가 당신 속에 들어와 사시는 것을 느끼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불신앙의 죄에서 풀려 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 아들이 하신 일을 믿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신앙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그를 믿으십시오"
죽음을 앞둔 한 죄인이 감옥에 갇혀 있다. 선행을 쌓고,자기의 공로를 쳐다본다는 것은 이 죄인에겐 불가능하다. 마땅히 죽어야 할 몸이고, 사형을 면할 도리는 전혀 없다. 완전히 무력한 꼼짝달싹 할 수 없는 바로 이 죄인에게 유일한 희망은 무엇인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 그 구원만이---
이제는 웨슬레도 구원이 인간의 공로에 있지 않고 믿음에 있다는 것은 알았는데 그것이 단번에 된다는 사실이 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어떻게 그것이 순식간에 이루어 질 수 있지? 당장 사람이 어두움에서 빛으로, 죄와 육의 비참한 처지에서 의(義) 가운데로 그리고 성령의 기쁨 가운데 들어 갈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성경의 모든 사실이 모두 순간적으로 구원 얻은 그것만을 기록한 것이다. 그의 이성으로 납득이 되질 않았다. 그렇게 가르침을 받질 않았다. 이전 같으면 모두 `이단`이라고 당장 일갈해 버릴 수 있었지만, 그의 맘은 이미 갈등하고 있었다. 주일 날 그는 구원받은 무리들의 간증을 듣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말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아들의 보혈을 믿는 순간에 주신 것과 어두움에서 빛으로, 죄와 공포에서 성결과 평안으로 이르게 하신 일들을 간증하였다.
오직 나의 부르짖음은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는것 뿐이었다. 웨슬레는 새로 발견한 이 믿음을 자기 교단에서 두려움 없이 전파하기 시작했다. 자기 자신은 그러한 믿음을 발견하지도 못했으면서, 누구든지 믿는 순간에 구원이 단번에 이루어 짐을 거리낌 없이 외쳤다.
그러나 반응은 냉담했다. 교회는 하나 둘씩 그에게서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마침내는 어느 교회에서도 그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진리를 가르쳤건만 진리와 그 전파자는 배척되었다. 웨슬레는 1738년 5월 24일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경험을 했다. 구원받은 모임이 있어 가보았다. 페인트공인 홀런드씨가 인도하고 있었다. 그는 루터의 로마서 강해 서문을 읽고 있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일으키시는 변화에 대하여 그 사람이 말할 때 이상하게 그의 마음에 감동이 왔다. 그는 그의 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오직 그리스도만을 신뢰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나의 죄를, 바로 내 죄를 제하시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확신이 생겼다.
그리고 거기 있는 모든 사람에게 공개적으로 그가 처음으로 마음속에 일어난 사실을 간증했다. 요한 웨슬레는 산 믿음의 열매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쉼과 평강 이었다 그것은 죄에서부터 해방된 자만이 느낄 수 있는 평강 그것이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로마서 10:3)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일, 십자가에서 세상 모든 죄를 해결하신 것을 믿는 그것이 믿음이다. 그 믿음 후에 즉 죄사함 후에 마음에 성령이 계셔서, 평강과 쉼 뿐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사도행전 2:38)
웨슬레는 그때부터 많은 사람들로부터의 따돌림이나 핍박이 문제 되지 않았다. 마음 안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쉼이 그를 지키고 있었다. 마음 안에 주님이 일을 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구원 받은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평안, 바로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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