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편은 나와 결혼하면서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전적으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남편은 결혼 이후 모든 것이 바뀌자 큰 혼란을 겪었다.
그 중에서도 남편은 7년동안 부모와 남처럼 지내는 것을 못견뎌 했다. 남편의 권유에 못 이겨 명절이나 집안 행사 때 딸 ‘두리’와 함께 어렵게 시댁에 찾아가면 우리 가족은 큰 상처를 입었다. 남편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는 매일 술에 절어 살았다. 처음 술을 마시기 시작했을 때는 그래도 어떡하든 그의 생활태도를 개선해보려고 노력했다. ‘왕궁같은 집에서 호의호식하며 살던 사람이야. 결혼하면서 모든 게 뒤죽박죽이 됐어. 부모와 단절해 사는데 그 아픔이 오죽하겠어. 이해하자.내가 좀더 잘해주자.’
몇번을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를 부르며 성경 구절을 벽에 붙여놓고 혼자 가정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남편은 술을 마시고 급기야 3일,1주일,1개월씩 외박을 했다. 회사에서도 난리가 났다. 혹시 사고가 난 것은 아닌가. 그러나 남편은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태연하게 집에 돌아왔고 다음날부터 다시 술을 마시고 외박했다.
시간이 지나자 나 역시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변해갔다. 집안에 찬양이 그쳤고 기도가 멈췄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희망없는 나날 속에서 나는 피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어렵게 맺어졌기 때문에 꼭 인정 받는 가정을 꾸려보리라는 소박한 꿈이 산산조각이 났다.
나는 세상을 향해 열린 창을 꼭꼭 걸어 잠그고 달팽이처럼 안으로 안으로만 숨어들어 갔다. 습관적으로 장롱 속으로 기어들어 가기도 했다. 두리를 재우고 난 뒤 이불을 꺼내고 장롱 속에 웅크리고 앉아 있으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다. 맞벌이를 하느라 제대로 돌보지 못했던 딸아이를 내 고통의 깊이만큼 사랑하는 것으로 근근이 버텨가고 있었지만 마음은 온통 배신감과 좋지 못한 감정들로 꽉 차들어 갔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지? 내가 그렇게 노력하고 잘했는데…이제 우리 가정은 어떻게 되는 것이지?’
남편을 원망했다. 그 괴로움의 정도가 점점 심해지자 나는 정신쇠약에 불면증,대인공포증까지 생겼다.
남편을 기다리느라 노상 밤을 지새우는 통에 수면부족으로 어지럼증에 시달리면서 내 몸은 38㎏으로 앙상하게 말라갔다. 한창 바깥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 차야 할 세살짜리 두리도 숨어사는 엄마 때문에 혼자 노는 아이가 돼버렸다. 그러자 딸아이 역시 심한 스트레스 증상을 보였다. 심각한 변비에 소리공포증,그리고 네살이 되도록 말을 못했다.
음산한 바람이 불던 어느날 급기야 나는 해서는 안될 짓을 하고 말았다. 남편과 의논도 없이 둘째아이를 유산시켰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불행한 결혼생활에 물 한 모금 마실 수 없는 극심한 임신중독증에 시달리고 있기도 했지만 그나마 알량한 믿음마저도 다 잃어버렸던 것이다. 생명을 지운다는 것에 대한 양심의 가책도 느낄 수 없었다.
중절수술을 하고 몸조리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나는 매서운 추위에 눈보라가 몰아치는 거리를 하염없이 울면서 걸었다. 언제 어디쯤에서 길을 잃은 것인지 눈보라 속에서 집에 가는 길을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그날 나는 미친 여자처럼 얇은 겉옷만을 걸친 채 눈보라 속을 헤매고 다녔다.
술이 잔뜩 취해 새벽 4시에 들어온 남편은 아침 6시에 나가야 한다며 일찍 깨워달라고 말했다. 마주 대하는 것조차 싫었던 나는 아무런 대꾸도 않고 건넌방으로 갔다. 대충 이부자리를 펴고 잠을 청했지만 머리가 지끈거리고 아팠다. 더 이상 눈물도 나지 않았고 그를 위해 기도하지도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맑은 새소리가 들려왔다. 정확히 표현하면 ‘새들이 노래했다’는 게 맞을 것이다. 당시는 한겨울이었고 우리집은 아파트 3층이었다. 나무와 베란다도 없었다. 추운 겨울에 어디에서 새들이 이렇게 노래한단 말인가. 홀린 듯 새소리에 넋을 잃고 앉아 있는데 이번에는 찬송이 울려퍼졌다.
“천사의 목소리로구나. 천사들의 노래였어.”
점점 그 소리에 빨려들어갈 때 이번에는 한 음성이 들렸다.
“방금 하늘나라의 소리를 들으셨지요?”
기절할 만큼 놀랍고 떨렸지만 간신히 의식을 붙잡았다. 음성이 이어졌다.
“책자를 만드세요.”
더 이상 음성은 들리지 않았다. 누가 뭐래도 주님의 소리였다. ‘그런데 책자를 만들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무슨 책자를 만들라는 얘기지?’ 생각이 잠시 멈췄다.
갑자기 몸에서 기운이 솟구쳤다. 묵은 피를 다 빼고 새 피로 수혈을 한 듯 혈관 하나하나,뼈 마디마디,세포 조직까지도 새롭게 갈아끼운 듯 신선했다. 빨리 아침이 와서 누구라도 붙잡고 이같은 체험을 들려주고 싶었다.
이른 아침 두리를 업고 동생집으로 향했다. 구름 위를 걷는 듯 몸이 새털처럼 가벼웠다. 혼자가 아니라는 벅찬 감동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주님은 힘든 나를 안고 “내 딸아,그래 그래,괜찮아”라고 말씀하고 계셨다.
먼저 교회를 옮겼다. 인천에서 살면서 서울 염천교회로 주일성수만 하러 다니는 게 죄송스러웠다. 집 근처에 있는 성화교회로 교적을 옮겼다. 찬양대에서 봉사하면서 교회생활에 적응해 갔다. 성도들과 교제하면서부터 대인공포증도 사라지고 심방을 다니며 불면증도 치료했다. 주님은 딸과 나에게 세상을 향해 마주할 수 있는 용기를 주셨다.
다섯살 된 두리는 어느새 말을 배웠는지 엄마를 따라다니며 이것저것 참견했다. 두리 역시 소리공포증에서 해방됐고 쾌활한 아이로 변해 갔다. 우리는 새 사람이 되어갔지만 남편의 술버릇은 정도를 넘어섰다. 그는 술집에서 술이 떨어지도록 퍼마셨다. 길에서 잠이 드는 바람에 차고 있던 시계 지갑 등을 털리기도 했고 한번은 마주 걸어오던 남자와 대판 싸움이 붙어 밤에 경찰서에 찾아간 적도 있었다. 또 술김에 연탄재를 쌓아둔 곳을 집으로 착각해 잠을 자다 옷을 모두 태운 적도 있었다. 1주일에 이틀 정도 외박하던 횟수가 점점 늘어나 1주일,열흘씩 장기 가출이 다반사가 됐다.
남편과 상관없이 두리와 매일 저녁예배를 드렸다. 매일 밤 아이의 손을 잡고 기도를 드렸고 잠언을 한 장씩 읽어내려 갔다. “두리야,우리가 의지할 분은 오직 하나님 뿐이야. 두리는 하나님만을 섬기고 순종하며 살아야 해.”
아이는 나처럼 실패자로 살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둘이 드리는 예배는 눈물로 시작해서 눈물로 끝났다. 내가 말씀을 전하면 두리는 기도했다.
“하나님,아빠가 술 마시지 않고 집에 들어오게 해주세요. 두리처럼 하나님 잘 섬기는 아빠가 되게 해주세요.” 두리는 늘 아빠를 위해 기도하며 울음을 떠뜨렸다.
나의 고통은 너로 인함이니라. 내 딸아 용서하여라. 내가 너를 위해 내 살과 피를 주고 용서함 같이 너도 그를 사랑하여라.”
텅빈 성전에 홀로 십자가를 마주보고 앉아 쓴 뿌리들을 토해내던 어느날 주님은 이같은 말씀을 들려주셨다. 남편을 위해 기도하고 인내하기로 했다. 그를 용서하기로 했다.
밤 12시쯤 요란하게 전화벨이 울렸다. ‘남편이겠지.’
“나 지금 집앞 공중전화야. 데리러 내려와 줘.”
공중전화 부스 옆 벤치에 노숙인처럼 초라하게 앉아있는 남편은 꺼져가는 한숨소리를 내쉬며 땅만 보고 있었다. 긴 세월동안 아버지와의 단절감 속에서 그는 깊은 허무감에 빠져 있었다.
“모든 것이 허무하기만 해. 그냥 세상을 사는 것도 싫고…그래서 술로 풀어보려고 했어.”
“당신에게 마지막 제안을 하겠어. 새벽기도회와 성경공부 모임에 참석해. 당신이 예수님을 온전히 만나 술을 끊고 새 사람이 된다면 다 용서할게.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정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거야. 그게 싫다면 이혼해.”
나의 결심은 단호했다. 남편은 그 제안들을 모두 수용했다. 출근하기 전 새벽기도회에 참석했고 퇴근 후에는 성경 개인레슨을 받았다. 성경 지식이 깊으셨던 교회의 한 원로 장로님께 성경공부를 부탁했다.
성경공부를 시작할 때 남편은 번번이 복통을 호소했다. 그러나 배에 손을 얹고 간절히 기도하면 씻은 듯이 나았다. 1주일쯤 그런 증상들이 반복되더니 더 이상 사탄의 방해는 없었다.
남편의 눈이 한층 밝아졌다. 술에 절어 거무튀튀했던 얼굴도 혈색이 돌고 환해졌다. 우리 가정에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다. 딸과 함께 가정예배를 드리는 것을 시작으로 남편은 주일 저녁,수요일,심지어는 철야예배도 참석하는 ‘예수쟁이’가 되어갔다.
88서울올림픽으로 전국이 떠들썩하던 어느날 우리 가족은 교회 수련회에 참석했다. 마지막날 수련회를 통해 새롭게 결단한 일들을 그림으로 그려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을 싫어했던 남편의 차례였다. 뜻밖에도 남편은 앞으로 걸어나가더니 2장의 종이를 번쩍 쳐들었다.
그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림 속에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한 장의 종이에는 술병이,다른 종이에는 깨어져 산산조각난 술병들이 어지럽게 그려져 있었다. 수련회에 참석했던 성도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술병이 깨지는 역사가 일어난 이후 남편은 봉사활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베테랑 디자이너답게 성전 꾸미는 일에 앞장섰다. 성도들은 부활절과 성탄절에 남편이 장식한 성전을 보고 감탄했다. 그리고 그는 성경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다. 그는 2년동안 텔레비전도 보지 않고 눈만 뜨면 성경과 신앙서적을 탐독했다.
나는 찬양대의 솔리스트로도 열심히 봉사했고 여선교회회장을 맡아 헌옷 바자회 등을 열어 수익금으로 보육원 등 시설을 도왔다. 특히 보육원에 갈 때는 꼭 참석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이혼을 각오하고 중절수술로 무책임하게 죽게 한 생명에 대한 속죄의 마음이 컸다. 그곳에서 나는 결손 가정의 아이들을 더 큰 애정으로 돌봤다. 하마터면 ‘부모를 둔 고아’가 될 뻔한 딸 두리의 손을 꼭 잡고 우리 가정을 변화시켜준 하나님께 깊은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출처:CGNTV박 강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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