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전 공군 군종감 전을성 목사 편

2007. 6. 8. 22:17신앙간증

[역경의 열매] 전 공군군종감 전을성목사 편

 

 

◇필자 약력

 △서울신학대학교와 대학원 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대학원 졸업

 △미국 풀러신학대학원 목회학박사

 △공군 군종감(대령)

 △현 한국사랑의집짓기운동 서울지회 이사

 △현 세계선교교회 담임

 

 (1) 북한군에 총살당한 부모님 모습 ‘생생’


“탕 탕 탕!”


손과 발을 결박당한 채 나무에 묶여 있던 부부의 앞가슴이 피투성이가 되면서 고개들을 아래로 떨궜다. 현장의 주민들은 처참한 광경에 차마 얼굴을 들고 바라보지 못했다. 그들 가운데 섞여 있던 한 여자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아직 초등학교에도 들어가지 못한 사내아이와 그보다 더 어린 사내아이는 무서움에 질린 눈알만 멀뚱거렸다.


6·25전쟁 당시 북한군이 경기도 포천의 강변 백사장에서 반동으로 몰린 부부 한 쌍을 총살하는 장면이다. 이때 총살된 부부가 내 부모이고 세 아이 가운데 가장 큰 사내아이가 바로 나였다. 이처럼 우리 3남매는 어린 나이에 부모가 총에 맞아 돌아가시는 장면을 직접 보았다. 그때부터 우리는 고아가 돼 슬프고 아픈 인생길을 걸었다.


나는 어린 시절을 보육원에서 지내며 평생 부모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모르고 살았다. 거기다 어린 나이에 목격한 부모의 총살 장면을 평생 가슴에 담고 험한 인생의 파고를 헤쳐 왔다. 외로움과 설움을 액세서리처럼 걸치고 소외와 눈총을 벗 삼아 살았다. 그러나 나는 행운아였다. 이른 나이에 예수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분의 사랑으로 다른 모든 불리함을 상쇄할 수 있었다. 만약 내가 예수님을 알지 못했다면 아마도 불행을 탓하고 운명을 비관하면서 하류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내 인생 이야기를 신문에 연재한다는 게 두려웠다. 그러나 이내 생각을 달리 했다. 내 인생에서 역사하신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려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믿음의 폭과 깊이를 더하게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나는 한없이 자애롭고 공의로운 그분의 역사를 너무나 많이 체험한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품었던 공군 군종감의 꿈을 이뤄가던 과정, 목회자로서 여러 사역을 펼쳐가던 과정, 인간으로서 외로운 인생길을 걸어가던 과정 등에서 보여준 그분의 위대한 섭리를 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에 오히려 마음이 들뜨기까지 했다.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자. 내 부모를 총살한 북한군은 우리 3남매를 집에 가두고 문마다 빗장을 질러 못을 박은 뒤 물과 음식을 끊었다. 반동 자식들을 굶어죽게 하겠다는 심산이었다. 동네 주민들에게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엄포를 놓았다. 다행히 먼 친척 분이 한밤에 문을 뜯고 들어와 우리를 자전거에 태워 다른 마을에 살고 계시는 숙모에게 데려다줬고 우리는 숙모의 손에 이끌려 피란민 행렬에 섞였다.


나와 누나는 걷고 어린 동생은 숙모의 등에 업혀 피란길에 올랐다. 병이 든데다 허기진 동생은 피란길 내내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주위에선 ‘다 죽는다.’며 구박을 해댔다. 어쩔 수 없이 동생을 길가의 나무 밑에 내려놓고 피란길을 재촉했다. 우리와 헤어질 때 숨이 넘어갈 듯 울어대던 동생의 모습이 떠오르면 요즘도 명치끝이 아리다.


계속 밑으로 내려온 우리는 논산피란민수용소에 이르렀다. 거기서 숙모와도 작별하게 됐다. 숙모는 우리 남매를 강경 금강애린원이라는 보육원에 맡기고 “내년 이맘때 꼭 데리러 오마”란 말을 남긴 뒤 떠나셨다.

 



 

 (2) 초등학교 때의 큰 꿈 ‘공군 군종감’ 올라


“오늘 누구 교회에 갈사람 없니?”


보육원 원장인 임도례 권사님이 그날따라 수요 저녁예배에 참석할 원생을 찾았다. 그러나 추운 겨울 저녁에 1시간여나 걸어서 교회까지 가고자 하는 원생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숨을 죽이고 얼굴을 감추기에 바빴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교회에 가는 길은 생각했던 대로 힘들었다. 거친 시골길인데다 어둡고 춥기까지 했다.


“을성아, 신학교에 갈 마음 없니?”


불시에 나온 원장님의 질문이었다. 너무 충격적이어서 말문이 닫히고 몸이 후들거렸다. 예배를 드리는 내내 주님의 뜻대로 인도해달라고 간구했다. 그러자 마음속에 기쁨이 밀려들면서 “나에게 헌신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들렸다.


“원장님, 신학교에 가겠습니다.”


“참 잘했다. 오늘 밤에 네가 주님의 축복을 받았구나!”


돌아오는 길에 내가 신학교를 가겠다고 하자 원장님은 내 손을 꼭 잡아주시며 진심으로 격려해주셨다. 그때 원장님의 손은 분명 전능하신 주님의 손이었다.


여기서 잠깐 당시 우리들의 생활을 돌아보자. 한 마디로 비참했다. 대부분 전쟁고아들인 우리는 열악한 시설에서 항상 배고프고 추웠다. 전쟁 직후 부모가 있는 애들도 어려울 때인데 우리 같은 고아들이야 오죽했겠는가. 그러나 그보다 더 우리가 견디기 어려웠던 건 밖에서 당하는 멸시와 조롱이었다. 사회에서나 학교에서 ‘보육원 애들’은 언제나 경계와 차별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깡다구’를 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만이 설움 많은 세상에서 우리가 생존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우리 가운데 많은 친구가 잘못된 길로 빠진 것은 어쩌면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그런 환경에서 내가 강경상고를 졸업한 것만 해도 하나님의 큰 은혜였다. 그런데 서울신학대학교에 입학하게 됐으니 그 은혜야말로 어떤 식으로도 표현하기 어렵다. 신학대에 입학하자 어릴 때 품었던 꿈이 불현듯 되살아났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받았던 강렬했던 느낌이 오랜 세월을 건너뛰어 생생히 되살아났다. 당시 공군 군종감이던 임동선 목사님이 강경성결교회에서 인도하신 부흥회 때 큰 감동을 받고 “예수님! 저도 저렇게 멋진 공군 군종감이 되게 해 주세요”하고 기도했던 일이다.


서울신대에 입학한 후에는 열심히 군종장교 시험을 준비했다. 결국 재학 중에 군종장교 후보생 시험에 합격했고 졸업 뒤 시골교회에서 목회하며 준비과정을 거친 다음 십자가 군병을 키우는 사역에 나섰다. 그러나 군종장교의 길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나는 주위의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요셉의 성결 된 생활을 생각하며 일관된 길을 고집했다. 내 몸을 쳐서 주님의 말씀에 복종케 하며 기도 생활에 충실하려고 애썼다. 내가 근무하는 부대 장병들의 영혼을 위해 심령대부흥회와 새벽기도회를 쉬지 않고 이어갔다. 역시 기도하는 곳에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다. 어릴 때부터 마음에 새긴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뤄주시리로다.”(시 37:4)란 말씀을 붙들었다. 그런 덕분에 공군 군종감에까지 올라 어릴 때 품었던 소원을 성취했다.

 



(3) ‘폭우 뚫은 전도집회’… 성령의 불길 활활


지금까지의 내 인생은 하나님 사랑과 긍휼의 족적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공군 군종장교로서 근무할 때 뿐 아니라 사회목회를 할 때도 하나님은 내 인생을 통해 그분의 위대한 뜻을 전했다. 무엇보다 아내 임애자 사모를 만난 것은 하나님의 섭리로 그분의 임재하심을 몸으로 확인한 사건이다. 나는 서울신대를 마치고 전도사로 충남 논산의 천동교회에 첫 부임해서 아내를 만났다.


“전도사님, 제발 가지 마세요. 이런 폭우에 거기까지 가는 건 무리입니다.”


주일 낮 예배를 마치고 인근 상월면의 대명교회로 향하는 내게 교인들이 모두 말렸다. 그러나 나는 그날 저녁 대명교회의 특별 전도집회를 인도해주기로 한 임상호 목사님과의 약속을 지켜야 했다. 하늘에서 양동이로 물을 들이붓는 듯한 빗속을 뚫고 상월면까지 50리 길을 완행버스로 간 다음 걸어서 대명교회로 가야 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대명교회에 가기 위해서는 다리를 하나 건너야 했는데 그 다리가 폭우로 침수된 것이다.


“주님,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유라굴라 광풍도 이기고 지중해를 건넜듯이 저도 이 급류를 건널 수 있게 해주세요.” 주님이 용기를 주셨다. 옷을 모두 벗었다. 옷으로 성경책을 감싼 다음 허리띠로 묶어 머리에 이고 거센 물결을 헤쳐 갔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엄습했지만 “주여!”를 외치며 건넜다. 오직 하나님과의 약속은 지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천신만고 끝에 급류를 건넜다. 젖은 옷을 짜서 입고 7㎞쯤 되는 시골길을 정신없이 달렸다.


막 대명교회에 다다르니 어둠 속에서 은은한 찬송 소리가 들렸다. 예배가 시작된 것이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예배당으로 들어서자 교인들은 일제히 일어나 박수를 치며 “할렐루야!”를 외쳐댔다. 침침한 호롱불 속에서 동네 주민이 모두 모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온힘을 다해 설교했다. 그날 밤,성령님의 역사가 있었다. 말씀을 전하는 동안 회개의 역사, 신유의 은사가 나나났다. 주민들이 대거 현장에서 예수님을 영접했다.


예배를 마친 뒤 나는 쓰러졌다. 팽팽했던 긴장의 끈이 일시에 늦춰지자 몸에 이상이 생겼다. 기침과 고열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날 밤 임 목사님의 따님이 밤새 나를 간호했고 그로 인해 우리는 사랑의 끈을 맺었다. 하나님의 배려이자 크나큰 은혜이다. 1969년 우리는 단출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고 얼마 안돼 교단 총회로부터 군목 후보자로 목사 안수까지 받게 돼 복에 복을 더했다.


첫아이의 출산 때 나는 또 한번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다. 워낙 찢어지게 가난한 터라 병원에 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교인의 친척인 간호조무사에게 의지했다. 출산일이 다 되자 간호조무사는 분만촉진제로 분만을 시도했다. 그런데 분만 과정에서 큰 난관에 부닥쳤다. 몇 시간 동안의 산통과 발악으로 아내는 거의 죽어갔다. 그러다가 겨우 아이의 머리가 나오자 간호사가 힘으로 당겨 빼냈다. 아이가 나오자 ‘펑’하는 소리와 함께 자궁이 터졌다. 순식간에 온 방안이 피로 흥건했다. 아내는 실신했고 간호조무사도 충격으로 정신을 잃었다.


나는 하나님께 아내를 살려달라고 기도했다. 피투성이 몸으로 밖으로 나와 교회 종을 치기 시작했다. 들에서 일을 하고 있는 주민들이 들을 수 있도록 계속 종을 쳐댔다. 그런 뒤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아내가 방언을 하면서 기도를 하고 있었다.



 

 (4) ‘고치시는 하나님’ 역사… 잇단 기적 체험


거의 죽어가던 아내가 일어나 방언기도를 하고서는 스스로 탯줄을 끊고 아기를 깨끗한 천으로 감싸 안고 있었다. 내 입에선 “아, 하나님!” 소리가 절로 터져 나왔다. 이어 교회 종소리를 듣고 주민들이 몰려들었다. 누군가가 연락을 했는지 논산읍내 산부인과에서 의사가 달려왔다. 그는 지혈제를 주사하는 등 응급처치를 했다. 그런데 산모가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위험하다면서 자기로선 손을 쓸 수 없다고 가버렸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달리 방법이 없었다. 나는 교인들을 전부 방으로 들어오게 했다. 그런 뒤 피가 흥건한 방바닥에 꿇어앉아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눈물로 통성기도를 드렸다. 한참을 기도하자 마침내 아내의 얼굴에 생기와 핏기가 돌고 아기도 꿈틀대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우리는 소리 높여 성경을 읽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천동교회에 이어 충남 강경과 전북 함열 사이에 있는 화정교회에 부임한 뒤 몇 개월 만에 나는 또 한번 기적을 체험했다. 부임한지 몇 개월 후 감기 기운을 느꼈다. 그런데 감기 기운이 점점 심해지면서 기침으로 인한 호흡 곤란과 함께 극심한 고통에 휩싸였다. 인근에 변변한 약국이나 병원도 없고 해서 기도에만 매달렸다. 그러던 중 추수감사절을 맞아 서울 돈암동 교회  김정호 목사님을 모시고 부흥회를 열기로 한 날이 다가왔다. 나는 아픈 몸을 이끌고 심방을 하면서 동네에 전단을 돌리다가 과로를 이기지 못하고 논두렁에 쓰러지고 말았다.


막상 부흥회가 시작됐는데 나는 함열 병원에 입원하는 신세가 됐다. 병원에서 검사결과를 내놨다. 기관지확장증이 너무 지체됐다고 했다. 2주일여 동안 병원에 있으면서 음식은커녕 물 한 방울도 넘기지 못했다. 내 몸은 뼈만 앙상해졌고 숨소리는 갈수록 거칠어졌다. 병원에선 치료방법이 없으니 환자를 데려가라고 재촉했다.


“여보, 믿음을 잘 지키고 어린 딸을 부탁하오.” 마지막 기운을 내 유언을 하고 기도실로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다. 아내는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나는 이생의 마지막을 기도로 마무리하려고 했다. 그렇게 며칠을 틀어박혀 비몽사몽간에 기도하던 중 하늘의 음성을 들었다. “나의 사랑하는 종 전 목사야, 네 병은 죽을병이 아니다”라는 축복의 음성이었다.


갑자기 내 몸에서 힘이 솟구쳤다. 혼미하던 정신도 맑아졌다. 나는 무릎을 꿇고 새롭게 기도하기 시작했다. 회개기도가 쏟아졌다. 믿음 없던 것을 회개하고 잠시나마 낙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한 것을 회개했다. 그러자 주님의 강한 힘이 내게 임재 해 있음이 느껴지면서 마음속에 평안이 샘 솟 듯했다.


주님께서는 말라기 4장 2절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는 말씀을 주셨다. 놀랍게도 나는 그날 새벽예배 때 오랜만에 단에 올라 설교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 예배에 참석했던 교인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목사님의 얼굴에 광채가 떠올랐다”고 말했다.

 



 

 (5) 나의 구보 구령은 “할렐루야” “아멘”


기관지 확장증 합병증을 주님의 역사로 물리치고 나는 예전의 건강을 회복해갔다. 주님의 사무치는 은혜에 힘을 얻어 2년여 동안 시골교회에서 더욱 열심히 목회했다. 그러던 중 1972년 4월 공군 군종장교 후보생으로 입대하라는 영장이 날아왔다. 마침내 어릴 때부터 품었던 공군 군종감의 꿈을 이루기 위한 첫걸음을 내딛게 된 것이다.


그런데 막상 대전교육사령부에서 군사훈련을 받기 시작하자 완전히 치료된 듯했던 기관지 확장증의 후유증이 나타났다. 특히 매일 아침 해야 하는 8㎞ 구보가 힘들었다. 대열에서 달릴 때면 금세 숨이 차오르고 가슴이 아파왔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붙들 수 있는 건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 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는 이사야 41장 10절 말씀을 늘 암송했다.


그리곤 힘든 것을 잊기 위해 내 나름대로 구령을 개발했다. 구보 대열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할렐루야” “아멘”을 외치면서 호흡조절을 한 것이다. 그런데 옆줄의 법사께서 내 구령이 비위에 거슬렸던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로 대응했다. 개의치 않고 계속하며 10주간 훈련을 마쳤다. 그리고 공군 중위로서 일선부대 군종장교로 취임했다.


“목사님, 큰일 났습니다. 병사 한 명이 정신이 이상합니다. 밤낮으로 횡설수설하며 다른 병사들을 괴롭힙니다. 돌을 들고는 하나님이라고 외치는가 하면 자기가 빌리그레이엄 목사보다 더 훌륭하다고 소리 지릅니다. 눈동자에 초점이 없고 입에서 게거품을 내고 있습니다.”


일선부대 군목 시절, 군종병들의 영성수련회를 개최하던 수양관에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대충 상황이 짐작됐다. 난생 처음 당하는 일이지만 예삿일이 아니라는 예감이 들었다.


“힘센 병사 몇 명을 붙여서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해서 군종실 까지 데려오세요.”


곧바로 교회의 단 앞에 무릎을 꿇었다. 두어 시간이 지났을까. 그 병사가 도착했다. 그의 얼굴은 흉악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보고받은 모습 그대로였다. 그 병사가 교회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고 예배 때마다 그리고 수시로 그의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기도를 했다. 그러나 감시가 조금이라도 소홀해지면 이 병사는 바깥으로 뛰어나가 소리를 지르고 날뛰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부대 지휘관은 “당장 내보내라”면서 “문제가 생기면 군목이 책임져야 한다.”고 질타했다.


나는 퇴근하지 않고 아내와 함께 교회에 머무르면서 눈물로 지새우며 기도했다. 그 병사도 불쌍했지만 미력한 내 자신이 더 불쌍했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 저를 도와주소서. 주님! 제게 성령으로 채워주소서”를 끊임없이 외치면서 1주일을 보냈다. 악한 귀신과의 싸움은 치열하게 계속됐다. 다시 1주일이 지났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시 46:5)는 말씀이 귓전을 울렸다. 다음날 새벽기도회에 그 병사를 강단에 올라오게 해 머리에 손을 얹었다. 모든 교인은 그를 위해 통성으로 기도했다. 마침내 우리의 울부짖는 기도가 상달됐다.

 



 

 (6) 사형 앞둔 병사 회개하고 하나님 영접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예수께서 무리의 달려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가라사대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막 9:25)


나는 끊임없이 말씀을 선포했다. 그리고 교인들과 함께 부르짖으며 사생결단하고 기도를 했다. 그러는 가운데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우렁찬 일갈이 튀어나왔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악한 귀신아 물러갈 지어다!” 진동과 함께 뜨거움이 감지됐다. 그러자 미친 병사의 딱딱하게 굳어 있던 목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나는 다시 한번 귀신이 물러갈 것을 크게 외쳤다. 병사의 눈동자가 정상으로 돌아오고 입가의 거품도 없어졌다. 흉악했던 그의 얼굴이 평온하게 변했다.


교회당의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치유 역사에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모두 그 병사를 얼싸안고 기뻐했다. 그리고 감격의 눈물을 쏟아내며 약속이나 한 듯 찬송가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고마워’를 목청껏 찬송했다. 다음날 아침에 그 병사가 지프를 타고 정문을 빠져나갈 때 교인뿐만 아니라 모든 장병이 나와 손을 흔들며 축하 해 주었다.


1980년 서울 대방동 공군본부교회를 담임할 때 나는 또 한번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체험했다. 그때 나는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고자 장병들과 침식을 같이 했다. 주일에는 본부교회 오전 11시 예배를 드리기에 앞서 9시에 본부 내 교도소 강당에서 수감자들을 모아놓고 예배를 인도했다.


어느 주일 아침 평소처럼 교도소 예배를 인도하는데 앞줄의 특이한 수감자가 눈에 띄었다. 그는 팔목에 수갑이 채워진 채 양쪽에 선 헌병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 뒤에 알아보니 총기를 들고 근무지를 이탈, 서울의 한 호텔에서 여러 사람을 죽이고 인질극을 벌이다가 붙잡힌 박 일병이었다. 그는 자해 우려 때문에 하루 24시간 수갑을 차고 지내야 했다. 그날부터 나는 박 일병의 불쌍한 영혼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때때로 그를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며 복음을 전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도 중에 성령님께서 내 마음을 크게 움직이며 “박 일병의 생명이 얼마 안 남았으니 그에게 세례를 주라”는 음성을 들려졌다.


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나는 바로 교도소로 달려가 헌병대장을 만났다. 그리고 기도 응답 내용을 알려주고 도움을 청했다. 그러자 헌병대장은 내 손을 덥석 잡으며 “목사님, 감사합니다. 그는 사형수라서 곧 여기를 떠나야 합니다.”라면서 오히려 고마워했다. 나는 박 일병에게 줄 새 성경책을 마련해 지체하지 않고 세례식을 준비했다.


박 일병 가족과 동료, 그리고 본부교회 교인들이 경건하게 자리를 잡았다.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그의 모습은 너무나 진지하고 거룩했다. 모든 참석자들이 감동을 받고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사형수 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내리신 것이다.

 

 

 (7) 관절 치유 은사 받아… 수많은 장병 주님께로


“목사님, 부탁이 있습니다. 예배 때 제가 특송을 하면 안되겠습니까?”


사형수인 박 일병은 세례를 받고 나서 다음 주일예배에서 특송을 자청했다. 얼마 남지 않은 인생길에 찬송을 하다 하나님께 갈 것을 소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여기 있는 동안 계속 특송을 해 주게”라면서 오히려 부탁을 했다.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행 16:26) 수갑을 찬 박 일병이 하나님을 찬양하니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고 사형수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역사가 일어났다. 당시 공군참모총장인 윤자중 대장에게 박 일병의 소식이 전해졌고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해주는 특사가 베풀어졌다. 하나님의 은혜는 박 일병을 살리고 그의 두 손을 묶었던 쇠사슬도 풀어줬다.


박 일병은 그 뒤 교도소에서 가장 모범적인 생활을 하면서 전도왕이 됐다. 그러면서 형기가 점점 감해져 10여년의 형을 마치고 지금은 신학교에 다니면서 주님의 종으로 헌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할렐루야!


나는 목회를 하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위대한 치유 역사를 여러 차례 체험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이상한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이 가끔 있어 크게 내세우지 않았다. 그러다가 공군본부교회 담임 시절 여의도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님께 “하나님께서 전 목사에게 관절 계통의 치유 은사를 주신 것 같으니 그것을 통해 꼭 하나님께 영광 돌리세요.”라는 말씀을 들은 뒤부터 담대해졌다. 말씀을 전할 때에도 한층 힘차게 했고 특히 환자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꼭 기도 해 주었다. 말씀을 전하고 환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내 의무이지만 성도가 은혜 받고 환자가 치료 받는 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생각을 그때 마음속에 굳혔다. 그러자 금방 그것을 입증하는 일이 또 생겼다.


“예수님은 이 대령님을 사랑하십니다. 아비의 품을 떠난 탕자가 회개하고 돌아올 때 더욱 사랑하고 축복하십니다. 지금이라도 예수님께로 돌아오세요. 그러면 이 병도 고쳐질 것으로 믿습니다.”


한 병원의 병실예배를 인도하고 나오다가 무릎을 잡고 고통스러워하는 환자가 눈에 띄어 알아보니 특수부대 지휘관인 박 대령이었다. 무릎이 퉁퉁 부은 그는 사관생도 시절까지는 신앙생활을 하다가 하나님과 멀어졌다고 고백했다. 나는 그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진심으로 조언을 해줬다. 내가 안수기도를 하자 그는 거듭 고마워했다. 교회로 돌아와서도 이 대령의 치유를 위해 기도했다.


하나님은 역시 위대했다. 다음날 다시 병실을 찾았다. 문을 들어서는 순간 “군목님, 할렐루야!”라는 소리가 큰 병실을 울렸다. 흥분한 이 대령은 “자고 일어나니 무릎에 차 있던 물이 없어졌습니다. 통증도 없어졌고요. 하나님께서 제 병을 고쳐주셨습니다.”며 다른 환자들 앞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입증했다. 물론 그 이후 그는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군인을 전도하는 큰 일꾼이 됐다.


이후 이와 유사한 여러 차례의 체험을 통해 나는 ‘하나님께서 군복음화를 위해 특별히 치유의 은사를 주시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8) 죽음 앞둔 병상의 김정렬 전총리 전도


“군종감님, 저희도 성지순례를 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 예. 이루어질 것입니다.”


공군 군종감 시절, 회의를 마친 뒤 티타임 때 한 군목이 성지순례의 필요성을 제기하자 나는 나도 모르게 성사될 것이라고 장담을 했다. 사실 나 자신부터 성지순례를 하고 싶어 2년 전부터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마 21:22)는 말씀을 입버릇처럼 암송하면서 기도 중이었다. 그러면서도 현실적으로 성사되기 어렵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군종감, 잘 지내요? 5월말 공주 갑사에서 극동방송 직원과 수원침례교회 사무실 직원들의 수련회가 있는데 설교 좀 해주겠어요?” 평소 알고 지내던 극동방송 사장 김장환 목사님이었다. 기꺼이 응했다.


“군종감, 요즘 무슨 기도를 많이 하나요?”


“2년 전부터 저와 공군 군목들이 성지순례를 다녀올 수 있도록 하나님께 매달리고 있습니다.”


집회를 마친 뒤 식사 시간에 대화를 하던 중 내 간절한 마음을 내보였다. 그러자 김 목사님은 지체 없이 “그거 내가 후원해주면 안될까요?”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가. “할렐루야!”를 외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 김 목사님은 여행 경비 일체를 대주시고 공군참모총장을 찾아 특별히 부탁까지 해주셨다.


나는 공군 군목으로서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면서 군복음화에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전역한지 12년이 지난 지금도 당시를 회고하면 새로운 감회에 젖는다. 그 가운데 특별히 잊을 수 없는 일 하나가 병상의 김정렬 전 국무총리를 전도한 일이다.


“군종감, 빨리 서울대병원으로 가세요. 초대 공군참모총장과 국방부 장관을 거쳐 국무총리를 역임하신 김정렬 전 총장이 군종감을 기다리고 있어요.”


군종감이 되고 얼마 안됐을 때 참모총장의 호출을 받고 달려갔더니 뜻밖에 명령이 떨어졌다. 왜 그분은 일면식도 없는 나를 보자고 하는 것일까 궁금했다. 굳이 목사를 찾는다면 서울에 훌륭한 분들이 수두룩한데 말이다. 더구나 그분은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정보도 받았다. 아마 공군참모총장 출신이라 그러겠지 생각하며 서울대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실에 도착하니 낯익은 유명인사들이 들끓었다. 그분은 비록 환자였지만 위풍당당했다.


나는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의 시간을 가졌다. “하나님, 제가 여기 온 것에 무슨 뜻이 있습니까? 인도해 주십시오. 그리고 제게 담대함을 주십시오.” 그런 뒤 그분에게 내 나름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구원을 열심히 설명했다.


“총리님은 예수님을 믿지 않은 상태로 돌아가시면 지옥에 갈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이 시간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십시오. 누구든지 부르는 자마다, 믿는 자마다 영생을 받고 구원을 받습니다.”


그분은 그날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받아들입니다.”라고 분명히 말했다. 그러고 얼마 후 세례를 받고 고통 없이 편안하게 하늘나라로 가셨다. 공군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에서 나는 3부요인 앞에 두고 그분이 생의 막바지에서 긴박하게 주님을 영접한 것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열정적으로 설교했다.

 

 


 

 (9) 계룡산 무속인 계곡서 ‘천국잔치 부흥회’


계룡산은 대전과 공주, 논산시에 걸쳐 있는 명산이다. 그런데 못마땅하게도 그 산은 예부터 무속인들의 성지로 인식되고 있다. 많은 무속인이 그곳에 제단을 쌓고 온갖 기이한 행위를 하고 있다. 수많은 우상이 총집합한 곳이라 할 수 있다. 바로 그곳에 1989년 공군본부가 이전했다. 공군뿐만 아니라 육군과 해군 등 3군 본부가 이곳으로 다 모였다. 당시 나는 계룡대 본부교회에서 공군담임을 하면서 다른 군의 장병들과 더불어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다소 흥분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이전한 직후부터 부대에서 사고가 빈발했다. 차량사고를 비롯해 크고작은 사고가 줄지어 발생했다. 거기다 관사의 군인 가족들은 각종 질병에 시달렸고 자고 일어나도 늘 머리가 개운치 않고 밤이 되면 분위기가 스산해진다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우상이 득실거리던 곳이라 그렇다” “터가 강한 곳이라 그렇다”는 등 여러 말들이 나돌았다.


나도 이상한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열심히 기도에 매달렸다. 그러다가 이런 때일수록 함께 모여 기도해서 성령 충만의 역사가 일어나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육군담임인 홍순영 목사님을 만나 부흥회를 여는 게 어떻겠느냐며 의사를 타진했다. 그러자 홍 목사님도 그럴 생각이었다며 동의했다. 우리는 곧바로 부흥회 준비에 들어갔다.


마침내 우상의 터전이었던 계룡산 자락에서 ‘천국잔치 심령대부흥회’가 열렸다. 나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라’는 주제로 온몸과 온 마음으로 말씀을 전했다. 저녁집회 때 1300석의 자리에 2000여명의 장병이 모인 교회당에는 뜨거운 열기와 함께 은혜와 감동이 차고 넘쳤다. 다음날 새벽집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부흥회의 열기는 그 후로도 계속됐다. 본부교회 새벽기도회는 매일 부흥회가 되다시피 했다. 육군참모총장 김진영 장로님과 공군참모총장 이양호 장로님도 앞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리며 집회를 더욱 은혜롭게 했다.


그러자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계룡산에 우상들이 물러났다. 몸 아픈 사람들이 낫고 사고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께 올리는 찬양이 울려 퍼지면서 우상의 터에 마침내 그리스도의 계절이 도래한 것이다.


목회자로서 뿐만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21년의 군 생활은 참으로 소중하다. 중위로 임관해 대령으로 전역하기까지 고비고비마다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체험하면서 보낸 기간이었다. 1993년 계룡대의 본부교회에서 전역 감사예배를 드리던 날 나는 그간 미루고 쌓아뒀던 감정의 편린들을 눈물과 함께 모두 토해냈다. 군종장교로서 아킬레스건이 될 수 있는 이북 출신에, 부모님 얼굴조차 모르는 고아 출신이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 앞에 알렸다.


특히 그 자리에는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강경의 금강애린원 원생들을 초청, 보육원에서 생활하던 어린 시절을 회고하고 이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목회자가 돼 공군 군종감에까지 이른 과정을 간증했다. 예배실은 온통 눈물바다가 됐다. 모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간접적으로 절감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10·끝) 뒤늦은 교회개척 보람… 가족 같은 성도들


21년 동안 정들었던 군복을 벗고 막상 사회로 나오니 허전함과 후련함이 교차했다. 그리고 군대라는 울타리 안에서 지내다가 벌판에 내던져진 것 같은 두려움도 있었다. 주님의 인도에 따르기로 하고 열심히 기도하자 하나님은 서호성결교회와 강남성결교회에 담임으로 시무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 뚫려 있는 구멍을 어쩌지 못했다. 훗날 하늘나라에서 주님께서 “내 종 을성아, 너는 무엇을 하고 왔느냐?”고 물으실 때 막상 내놓을 것이 마땅찮았다. 늦었지만 내 스스로 교회를 개척하기로 했다.


1997년 나는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세계선교교회를 개척했다. 그러나 사회라는 곳이 만만치 않아 전세금을 사기 당하고 말았다. 주님이 주신 시련으로 여기고 다시 2003년 서울 한남동 한 상가에 세를 얻어 자그마한 교회를 세웠다. 낮은 자들과 함께하기 위해 혼자 사는 불쌍한 노인과 생활고에 쪼들리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목회 방향을 양적 성장보다 한 명이라도 참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데 뒀다. 그 덕분에 지금 40여명이 모여 함께 예배드리고 식사하고며 서로 어려움을 나누는 가족공동체 같은 교회로 자리 잡았다. 언젠가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흡족한 교회로 성장할 것으로 믿고 있다.


군에서도 그랬지만 사회에서도 나는 강단에서 말씀을 전할 때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는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고 그리고 건강의 복을 받는다고 하는 요한삼서 1장 2절 말씀을 확신 있게 선포한다. 그런데 세계선교교회의 정규석 집사님에게 문제가 생겼다. 순수하게 신앙생활을 하던 그가 언제부터인지 배의 통증을 호소하면서 식사를 제대로 못했다. 밝은 미소가 흐르던 그의 얼굴이 창백해졌고 대소변도 보지 못했다.


나는 자나 깨나 정 집사님을 위해 기도에 매달렸다. 그런 뒤 “기도원에 들어가겠다.”는 그를 말리고 “모든 교인이 같이 하나님께 매달려보자”고 설득했다. 나는 교인들과 함께 매일 자정 넘게까지 통성기도를 하면서 울부짖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도 헛되이 병원에서는 암이라는 진단을 내놨다. 정 집사님은 수술날짜를 받고 입원했다.


우리는 더욱 기도에 매진했다. 나는 수시로 병원을 찾아가 정 집사님의 배에 손을 얹어 안수를 했다. 그의 몸은 하루가 다르게 야위어갔다. 그런데도 그의 얼굴에 이상하게 밝은 미소가 흐르는 듯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정 집사님이 갑자기 진통을 호소하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리고 돌아온 그는 뭔가 큰 덩어리가 빠져나간 듯하면서 시원해졌다고 했다.


“의학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의학계에 발표해야 할 것 같습니다.” 수술을 앞두고 마지막 점검을 한 의사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암덩어리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정 집사님은 퇴원했다. 우리는 “할렐루야”를 외치며 정 집사의 집으로 몰려가 감사예배를 드렸다. 모두 하나님께 한없는 영광을 돌렸다.


이제 연재를 끝낸다. 연재를 통해 내 보잘것없는 인생에 개입하신 하나님의 크나큰 은혜와 사랑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 것 같아 내내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 남은 삶에 더 큰 역사를 베풀어주실 것으로 믿는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끝까지 정진하면서 주님의 종노릇을 충실히 해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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