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2. 9. 17:12ㆍ좋은 글, 이야기
의인의 길을 가는 죄인!
“하나님이 세상을 이토록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 마다 죽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누군가 당신에게 “도대체 믿음이라는 게 뭐예요? 무얼 믿는다는 거냐고 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까? 나름대로 많은 대답이 가능합니다만, 믿는 자의 고백인 <사도신경>의 전부를 온전히 나의 삶을 통해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예수그리스도! 십자가의 대속! 부활! 영생! 믿지 않는 자는 이 낱말들의 진정한 의미를 모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알 수 없으니까요, 하나님의 사랑과 주님의 은혜로 “구별된 삶”을 살게 된 자로서, 개인적으로는 참으로 가슴에 항상 간직하고 있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는 의인(義人)의 길을 가는 죄인(罪人)입니다”라는 말입니다. 회개와 용서를 통해 구원받은 크리스챤이라 해서, 곧 의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그렇게 칭의(罪의 가리움)될 뿐, 본질상 여전히 나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의인의 길을 살아갑니다.
죄인이기에 의인으로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자들 중에는 의인으로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의인이 되려는 것 자체가 죄(罪)요, 하나님 보시기엔 의인이란 하나도 없답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3).”
마찬가지로, 의인의 길을 가기에 죄인들처럼 살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삶이 의인의 삶이라는 것을 모르고 "나는 죄인"만을 자처하는 겸손이 지나친 맹목적인 신앙인들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죄인(罪人)입니다, 그러나 의인(義人)답게 살아야합니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악에 마침표를 찍으셨답니다.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단 한번의 영원한 제사가 되시고, 이 제사를 받으신 하나님은 우리의 죄와 불법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신즉 너희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다시 제사 드릴 것이 없다 하십니다.(히10:1-20) 그런데, 우리는 그 마침표 뒤에 의문표를 찍는 어리석은 믿음의 행태를, 마치 겸손한 믿음인양 반복합니다, 어찌보면 믿는 자들의 딜렘마처럼 느껴지나, 겸손도 지나치면 무례(無禮)가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기도(祈禱)는 신앙생활 그 자체일수도 있습니다.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말씀 따라 우리는 주님 앞에 죄의 짐을 지고나와 그 앞에 내려놓고 통회하고 자복하며 죄 사함을 구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 밑에 내려놓은 죄 짐 대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으로 위로받고 세상 죄를 이길 힘을 기쁨으로 대신 받아 나오나, 내려놓은 죄 짐을 되 지고 나오는 사람들도 많은 듯합니다.
구한 것은 받은 줄로 알지 못하는, 이러한 확신 없는 죄의 고백은 자탄(自嘆)의 후회는 될지언정, 그 죄와 잘못으로부터 완전히 돌아서는 진정한 회개(悔改)는 아닙니다, 마냥 반복되는 죄의 고백과 용서를 구하는 기도는 진정한 회개를 통한 구원의 확신 없거나,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믿지 못하거나, 주의 십자가의 보혈로 용서받고 구원받았다는 확신 없기, 결국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주님을 멸시하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부인하는 불신(不信)의 또 다른 모습일 뿐입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하나님과의 동행(同行)하는 삶을 사는 게 믿는 자의 삶일진대, 그러한 삶을 살아온 자의 기도는 감사의 기도가 될 수밖에 없으나,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죄에 빠져 산 어리석고 못난 우리를 또 용서해 달라고만 한다면,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늘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내내 잊고, 제멋 겨워 살다가 어느 순간 하나님 앞에 선 사람의 기도가 그렇듯, 용서만을 구하는 기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회개란, 범죄한 사실을 입으로만 인정하고 용서를 비는 행위가 아니라 구부러진 길이나 삐뚤어진 방법을 곧고 올바르게 변화, 개조, 반전(反轉)시킨다는 원어(메타노이아)의 뜻과 같이 그 열매가 수반되는 사죄 행위입니다(마 3:8).
우리의 율법적인 행위가, 우리의 의와 믿음의 결핍을 보상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무서워하는 사람처럼, 여차하면 잘못했다고 징징짜며 용서만을 비는 아이처럼, 이러한 습관적인 회개의 기도는 오히려 죄에 대해 면역력만 길러줄 뿐, 과식하고 소화제 먹으면 된다는 식의 영성의 무감각을 초래할 뿐, 겸손한 믿음의 모양은 아닐 것 같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바로 죄인이 의인처럼 살려고 할 때, 의인의 길을 가는 우리가 죄인처럼 살 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닐지 생각해봅니다.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사 66:24)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
칼 럼 필 자 |
에이원맨/평강교회 서울 양천구 목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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