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6. 14. 09:26ㆍ신앙간증
1987년 11월 중순 어느 주일이었다. 예배시작 20분 전에 우리는 여느때와
다름없이 그 자리에 가서 앉았다. 우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난 다음 예배순서지를 훑어보았다. 늘 나의 눈길을 끄는 것은
환자를 위한 기도란이었다. 그날따라 내 눈에 확 들어오는 환자이름이 있었다.
정영화 전도사. 한번도 인사를 나눈 적이 없어
잘 생각이 나지 않는 전도사님이었다.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짧은 광고문구를 읽는데 갑자기 가슴이 뭉클하고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무슨 일이지? 잘 알지도 못하는 분인데.'
순간적으로 마음의 감동이 있었으나 곧 정영화 전도사님을 잊었다.
그날 밤 11시 쯤, 집안 정리를 끝내고 마지막으로 아이들의 도시락 반찬을
점검하고 있을 때였다. 정영화, 갑자기 머리속에 또렷이 그 이름이 생각났다. 환자란에
다른 이름도 많았건만 유독 그분의 이름이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
다시 주보를 꺼내 병실을 확인하였다. 이미 밤 12시가 가까워 오고 있었다.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빨리 정전도사님에게 가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1982년 남편이 한때 쓰러져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가 회복한 후
나는 병자들을 위문하는데 열심을 다했다. 새벽 1시에 갑자기 화장실에서
쓰러져 오른쪽 마비가 일어났지만 주님의 은혜로 회복하였다. 그 소문을 듣고 많은
환자들이 기도받기 원해 우리집을 찾아왔다. 남편은 간단히 기도해 준 다음 나에게
기도원에 모셔다 드리라고 말했다. 나는 봉고차로 많은 사람들을 기도원에 인도해주었고
환자들을 찾아가 위문하곤 하였다. 그래야만 남편을 회복시켜주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 같아서였다.
주로 밤늦은 시간을 이용해 환자들을 돌보았다. 낮에 시간이 없기도 하였거니와 환자들은
밤이면 더욱 외로와지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깊은 밤에 누군가 불쑥 찾아줄 때 반기는 화사한 표정, 그 얼굴
때문에 나는 밤간호를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길이 훤히 뚫려 신나게 빨리 갈 수 있다는 것도
또 다른 매력이었다.
모두가 잠든 거리를 휙휙 달려 연건동 서울대병원에 들어서니 낮에 그렇게 북적거리던
병동이 쥐죽은듯 고요하기만 했다. 11월인데 난방기운이 없어서인지 썰렁했다.
병실을 다시한번 확인하고 똑똑 노크를 했다. 네 , 하고 힘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깊은 밤임에도 금방 대답하는 걸 보니 잠못이루고 있음이 분명하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보니 교회서 몇번 지나친 적이 있는 전도사님어어서 낯이 설지는 않았다.
"정영화 전도사님이시죠?"
정전도사님의 핏기없는 얼굴에 의아힘이 잔뜩 묻어 있었다. 자꾸만 일어나 앉으려고 애썼다.
"그냥 누워계세요. 저는 같은 사랑의 교회에 나가는 원종옥 집사예요. 진흥11 다락방 순장이예요."
"저는 기억이 없는데..."
정도사님의 얼굴에 반가움이 깃들면서도 여전히 의아한 눈빛이었다.
"저도 몇번 지나치기만 했지 한번도 전도사님과 대화를 나눈어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이 밤에 웬일이세요."
"도와드리려고 왔지요. 지금 어디가 제일 불편하세요."
나는 그녀의 무릎을 주무르면서 물어보았다. 다시금 마음에 뜨거운 감동이 인다.
나는 소리내어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 때문에 형제와 자녀를 사랑합니다. 주님.
이밤에 전도사님께 찾아왔습니다. 속히 병이 낫게 해주십시오."
기도를 끝내고 누을 뜨자 전도사님이나 나나 눈에 눈물이 흥건히 고였다. 예수님 때문에
한자매인 우리가 밤에 만난 것이 감격스러워서였을까.
그때 서울대학 병원은 노조가 파업 중이어서 난방은 물론 식사도 공급되지 않았다.
정전도사님은 허리가 불편하여 몸을 움직일 수 없었는데다 마땅히 간호해줄 사람도
없어 어려움을 겪고 있던 중이었다.
"마침 너무 춥고 허기가 져서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있었어요.
하나님, 천사를 보내주세요. 저는 움직일 수가 없어요. 너무도 심신이
괴롭습니다. 저쪽 덜 닫힌 창문을 꼭 닫았으면 좋겠는데 저는
일어설 수가 없어요. 발도 시리고 무릎도 시큰거려요. 하면서 하니님께 마구 하소연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집사님이 나타나셔셔 무릎을 주물러 주시면서 기도해
주시니까 얼마나 기쁜지 눈물이 나네요. 집사님은 오늘 하나님이 보내주신 천사예요."
그러고 보니 병실 안인 냉골이었다. 게다가 열려진 창문으로 11월의 칼바람이
숭순 애어들어오고 있었다. "전도사님, 잠깐만 기다리세요."
나는 급히 주차장에 내려가 차트렁크를 열었다. 어머니가 늘 깔고 앉아
기도하시던 인조 밍크 털조각 기도방석을 가지러 가기 위함이었다. 내 차 트렁크는
온갖 잡도사니가 다 들어있어 아들들이 늘 만물상이라고 놀려대곤 했다.
나도 어머니처럼 기도대장이 되고 싶어 애지중지 하시던 그 방석을 들고 자주
청계산으로 올라갔다. 그무렵 나는 시간만 나면 청계산에 올라가 소리높여 기도했다.
생각해보면 1980년대는 하나님께서 나를 준비시키던 기시였던 것 같다...
...
털담요를 정전도사님 어깨에 둘러주고 어머니의 기도방석으로 발을 감싸주었다.
그녀의 발은 마치 추운 곳을 뛰어다니다 온 것처럼 차가왔다.
"집사님은 정말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예요. 얼마나 떨었는지..
평소 안면도 없는 원집사님이 내 기도를 들으셨군요."
전도사님은 눈물이 글썽하여 나를 바라보았다.
새벽 4시까지 우리는 가슴을 활짝열고 수많은 믿음의 언어들을 주고 받았다.
순식간에 마치 백년지가처럼 가까와졌다. 하나님 안에서
한 자매라는 생각이 우리를 강력하게 묶었던 것이다.
나는 전도사님께 잠시 눈을 붙이라고 말한 뒤 다시 집으로 달려갔다.
차가 별로 다니지 않아 연건동에서 서초동까지 20분밖에 안걸렸다.
집으로 돌아와보니 부지런한 남편은 벌써 일어나 골방에서 찬송가를
부르고 있었다. 밤에 없어진 아내가 어디 또 병문안 갔겠거니 생각한
남편은 무사히 잘 돌아오도록 벌써 기도를 끝냈을 것이다.
우리는 믿음안에서 서로 깊이 신뢰하고 있었으므로 내가
밤에 나가 환자 심방을 하고와도 어디 갔다 왔느냐고 묻지도 않았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으면서 그때의 나의 열정적인 이웃 사랑이 떠올라
속히 그 첫사랑을 회복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날이 훤히 밝을 때 돌아오면서 느끼는 뿌듯함을
어디다 견줄 수 있으랴.
그때는 이웃을 위해 밤을 샜지만 요즘은 글을 쓰느라 밤을 하얗게 밝히곤
한다. 하나님은 아무래도 나를 너무 사랑하시나 보다.
다 늦게 밤을 밝힐만한 일거리를 또다시 주시다니 이 모든게 어머니의
기도 덕택이리라.
나는 양지머리를 불에 올려놓고 아침준비를 시작했다. 아이들 도시락을
싸고 아침상을 차렸다. 가족들이 식사를 하는 동안 양지머리를 푹 고은
물에다 무를 두춤이 썰어서 곰국을 끓였다. 김을 굽고 잘익은 배추김치를
썰어서 또 하나의 도시락을 만들었다.
남편을 출근시킨 후 도시락을 들고 다시 대학병원을 찾았다.
전도사님은 여전히 핏기엇는 얼굴로 나를 맞았다.
"전도사님, 식사하세요."
침대를 조금 세운 후 갖고 온 도시락을 풀자 또다시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보온병에다 넣어간 뜨거운 국물을 그렇게 맛있게 드실 수가 없었다.
"집사님, 정말 너무 맛있어요. 어제부터 아무 것도 못먹었거든요. 이렇게
맛있는 국은 정말 처음이예요."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 전도사님의 얼굴에 그제야 화색이 돌았다.
두세 시간 푹 끓인 데다 정성을 듬뿍 넣어서인지 국이 맛있었나보다.
다시 나는 오직 가족을 위해 날마다 식사 준비를 최대의 관심사로
생각했던 평범한 가정주부였으니 국이 맛있 법도 하였을 것이다.
그 후 다른 교역자를 통해 그 전도사님이 만나는 사람마다 내가
그날 밤 찾아간 것을 얘기하신다는 소리를 들었다.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였다고. 나는 진정으로 그날 밤 내가 맡은 역할이 즐거웠다.
그후 전도사님은 허리를 완전히 회복하셨고 지체가 부자유한 목사님과
결혼하여 사회봉사 활동을 많이 하신다는 소리를 들었다.
많은 환자를 방문하였지만 정전도사님께 내가 달려갔던 기억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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